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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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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는 붉게 물들어 가는 서편 하늘을 아스라이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대명(大明)이 건국된 지 어언 일백 년. 영락대제 때 국위(國威)를 만방에 떨치고 홍희(洪熙: 仁宗)·선덕(宣德: 宣宗) 양제 동안 인선지치(仁宣之治)로 불릴 만큼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운이 기울어 정통 연간에는 급기야 황제가 오랑캐에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는 치욕의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네(주).

그 후 다시 조종의 근간을 세워 국본을 이끌어오긴 했으나 한번 쇠해진 국력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고목에 꽃이 피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구나. 이처럼 국위가 떨어진 근간에는 환관의 발호가 있었으니, 영종 대의 왕진, 헌종 대의 왕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왕진은 천자의 위의를 헛되게 내세워 급기야 오랑캐에 사로잡히게 했고, 왕직은 그 위세가 천자를 능가하여 세간에 '왕태감이 있음을 알 뿐 천자가 있음을 모른다'는 말이 떠돌 지경이었다네.

건국 초기 천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설치한 창위(廠衛)는 날로 폐해가 더해졌으니 홍무제 때 창설한 금의위와 영락제가 신설한 동창이 대표적인 감찰기관이지. 이들 창위는 애초에 의도했던 천자의 보필과 사직의 안위를 넘어 자체로 권세를 탐한 바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네. 특히 황상의 지근거리에서 눈과 귀를 자처한 동창의 폐해가 극심하여 조정은 불알없는 환관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구나.

환관들이 장악한 동창은 금의위의 위세를 넘어서더니 급기야 선대에는 환관 왕직이 주도하여 서창(西廠)이라는 또 하나의 창을 만들었음은 자네도 익히 알 터이네. 이렇듯 사찰이 횡행하는 정국이 되다보니 조정의 대신들은 간(諫)을 꺼리고 소(疏)를 멀리하게 됨은 당연지사. 이에 따라 천자의 눈과 귀도 어두워져 하늘의 명(命)과 천지의 도(道)를 소홀히 함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소리조차 듣지 못하게 되었지. 그 결과 민생은 날로 피폐해지고 탐관의 착취와 오리의 학정은 더욱 심해져 급기야 선대에는 형양에서 난이 일어나고 말았다네. 

다행히도 하늘이 굽어 살피사, 영명하신 홍치제께서 천자로 등극하시매 민생은 빠르게 회복되고 조정은 조속히 안정을 되찾고 있다네. 황상께서는 일차적으로 서창을 폐하고 조정 대신과의 시강(侍講)과 경연(經筵)을 부활시켜 제도의 근본을 세우시니 비로소 나라의 기강이 제대로 선다 할 수 있겠다네. 그러나 일백 년 동안 뿌리 내려온 환관의 세력이 한꺼번에 뽑히진 않아 비록 일시적으로 꺾이긴 했지만 동창을 기반으로한 저들의 세력은 아직도 든든하구나.

내 비록 만리 떨어져 유배생활을 하고 있지만 은밀히 교감을 하고 있는 바 황상께서 내가 조정에 복귀하게 되면 금의위의 수장이 되어 이들의 기세를 꺾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교지를 은밀히 내리셨다. 금의위 역시 그동안 저지른 악행의 폐해가 없다곤 할 수 없지만 독을 제거하기 위해선 독을 사용해야 하는 바(以毒攻毒) 사찰엔 사찰로 맞서 그 배후를 쳐야 하느니라. 

동창의 실세는 노순광이라는 자이다. 너는 동창에 잠입하여 이 자를 제거하도록 하여라. 동창의 인원은 금의위에서 선발하기 때문에 너를 천거하면 동창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환관들은 황궁 안에서 지내기 때문에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고 자칫 무력을 사용했다간 불충의 역모로 몰릴 수도 있다. 방안을 강구하여 이 자를 궁 밖으로 끌어낸다면 일을 도모하기 쉬울 것이다.

너의 검이 의(義)를 좇겠다면 이 길이 합당하고, 이것이 너를 내게 보낸 북명(北溟) 선생의 복안일 것이다."

예진충은 모빈에게 삼배하고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모빈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동안 동창에서 보낸 자객이 둘 있었지만 모두 예진충의 칼날 아래 불귀의 객이 되었다.

"동창 내부에서 은화사를 해체하기로 했다네. 애초부터 공식적인 조직이 아니니 이 또한 은밀히 진행돼고 있지만."

"차제에 동창의 해체까지 고려해봄이 어떠실는지요?"

"그건 아니 될 걸세. 황상께서도 기밀수집과 동향파악이라는 동창 본연의 임무까지를 거부하는 건 아니니 말일세. 다만 보고에 그쳐야 할 동창이 무력까지 갖추는 건 위험하기 때문에 나에게 교지를 내리신 것일 뿐 동창 자체의 감찰 기능까지 무력화하자는 건 아닐세. 공식적 집행기관으로서의 도찰원, 친위 무력조직인 금의위, 정보수집 및 정세파악을 위한 동창, 이 세 가지 감찰기구가 솥발처럼 서로를 견제하여 안정적 구도를 형성하고자 함이 현 황상의 복안이라네."

모빈장군은 물병을 들어 주전자에 물을 따랐다. 깊은 맛이 드러나는 두 번째 찻물이 찻잔에 담겼다.

"그나저나 자네의 마지막 결투가 '수월정(水月亭)의 결(決)'이라고 하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더군. 그자는 살수였다지, 아마?"

"살수였지만 예검비화 채욱을 저승으로 보낸 고수였습니다."

"일개 살수가 은화사 최고수라 일컫는 채욱을 꺾다니, 과연 천하는 넓고 강호의 우물은 마를 새가 없네 그려."

모빈이 무영객과의 결투를 화제로 꺼내자 예진충은 당시의 장면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에 전율이 흘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답했다.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사실 그 결투는 제가 패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제가 살아남았다는 것일 뿐 무공의 성취에선 그 자가 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그자는 죽고 자네가 살아 있는 이유가 무언가?"

"그자는 저와 대결하기 전 이미 부상을 입어서 마지막 수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저로서는 천행이었습니다."

"자네의 겸양이 지나치구먼."

"겸양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승패와 생사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병가에서도 전쟁의 승패와 장수의 목은 별개이지. 그래도 현실은 항상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네."

생사보다 무공의 승복이 더 중요한 게 강호의 대의입니다."

"그렇게 강한 그자는 과연 어디에서 무공을 익힌 자란 말인가?"

"그 자가 익힌 무예의 뿌리는……."

예진충은 '저와 같은 사문입니다.'라는 말이 목구멍을 차고 올라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삼켰다.

"……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네도 이제 정식으로 금의위에 들어와 교위 직을 제수함이 어떤가?"

모빈장군이 마지막 잔을 따르며 말했다.

"한낱 강호의 무뢰배에 불과한 저에게는 과한 소임입니다. 달맞이꽃은 오로지 달빛을 받으며 필 뿐입니다. 햇살을 받으며 피는 꽃은 따로 있사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무림의 동향은 어떤가. 태허진인의 유품이 소멸되어 무극진경의 소재는 영영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던가?"

모빈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품이 일부는 소실되고 일부는 파쇄되었다는 소식이 강호에 전해지자 무림맹도 더 이상 명분 없는 수경대를 해산하였답니다. 비룡문은 제자들이 모두 흩어져 해체된 상태고, 비룡표국은 상인회 작천방에서 인수하기로 했답니다."

"음, 경지를 추구하는 무림인들이나 경세를 들먹이는 선비들이나 하는 짓은 매일반. 오늘 서로 먹으려고 으르렁거리다가 내일 되면 그릇째 차버리니 대저 의(義)란 허공에 새겨진 글자에 불과할 뿐일세, 그려."

"강호는 장공편운(長空片雲)이라. 드넓은 하늘에 걸린 조각구름은 흘러가면 그뿐, 새로운 구름이 몰려오면 몰려오는대로 구름을 맞이할 것입니다. 네 제자의 기구한 운명은 한 잔 술의 객담에 불과하고, 진경의 향방 역시 여항(閭巷)의 뜬구름으로 흘러갈 뿐입니다."

"들게나."

모빈이 찻잔을 눈앞에 들었다.  

예진충은 마지막 남은 고려차를 목안으로 넘겼다. 파란 가을하늘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다. 봉래산 모옥 마당에 추국(秋菊)이 필 때가 됐다고 예진충은 생각했다.

(주) 토목의변(土木之變) : 정통 14년(1449년) 몽골 오이라트부족이 족장 야선(也先 : 에센)의 지휘로 명나라에 침공하였다. 이에 영종(정통제)은 환관 왕진의 의견을 받아들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토목보(土木)堡)에서 맞섰으나 참패하여 에센의 포로가 된 사건.
                                                              
※ 다음편은 최종회 '에필로그'가 연재됩니다.


태그:#무위도 107, #예진충, #무영객, #무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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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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