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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 차도를 점거한 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벌이자, 경찰이 이를 저지하고 있다.
▲ "박근혜는 퇴진하고 경찰은 퇴근하라"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 차도를 점거한 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벌이자, 경찰이 이를 저지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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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광장은 만원이었다. 서둘러 찾아온 추위 탓에 오후의 햇살이 콘크리트 바닥을 덥히고 있었지만 힘에 부쳐 보였다. 늦가을의 햇살은 광장을 훑는 세찬 겨울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들 장갑에 두꺼운 패딩 차림이었고, 무릎 담요를 망토처럼 뒤집어쓴 이들도 보였다. 목도리로 온 몸을 미라처럼 칭칭 동여맨 어린 아이들의 모습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광장의 맨 앞자리는 늘 보던 깃발들 차지였지만, 대오에 끼어들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보아하니 집회에 처음 나와 본 듯한 사람들이었다. 다함께 구호를 외칠 때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팔도 드는 둥 마는 둥 하는 '초짜'들이다. 그 데면데면함을 견디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듯 광장을 빠져나가는 이들도 더러 보였다.

그럼에도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흡사 유명 연예인의 공연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 단풍이 절정인 주말인데다 무슨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별로 긴급 동원령이 내려진 것도 아닌데,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이렇게 많이 모인 건 예상 밖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 광장 밖을 에워싼 경찰의 숫자 정도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적었다.

'박근혜 퇴진'

광장을 휘감은 유일한 구호였다. 최근 성과 연봉제에다 국정 교과서, 사드 배치, 위안부 졸속 합의, 한일 군사협력과 개헌 추진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이슈가 연달아 터져 나왔지만, 이번 '최순실 게이트'는 이 모든 것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버렸다. 집회와 거리 행진 등 세 시간이 넘도록 그런 이슈들은 단 한 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국정 붕괴가 현실화된 마당에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은 추동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도덕적 권위가 무너져 내린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상 없다. 그를 정점으로 한 청와대 비서진들과 정부의 고위 관료들의 모습은 시정잡배들의 행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음이 언론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최순실과 그의 측근들을 구속시킨다고,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을 대폭 개편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지난 3년여 동안 익히 보아왔듯 대통령의 인사는 돌고 도는 '회전문'이었고,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끝났다. 대통령의 눈과 귀는 오로지 최순실에게만 뚫려 있었음이 드러났고, 국정 농단의 주범은 최순실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었다.

부모와 함께 집회에 참여한 초등학생 아이조차도 '박근혜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단상에 오른 한 대학생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건, 국민을 위한 일이기에 앞서 정작 자신의 안위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고 갈파했다.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과 무지는 용서할 수 있어도 그의 후안무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분노했다.

한 집회 참가자는 단상 뒤편 옛 전남도청 꼭대기에까지 최순실의 마수가 뻗쳐있다며 손가락으로 깃발을 가리켰다. 태극기 왼편으로 '최순실표 태극 문양'이 선명한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깃발이 함께 펄럭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이곳에 국정 농단의 상징물이 뻔뻔스럽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가자들은 모두 경악했다.

대한민국의 얼굴인 정부의 상징조차 신뢰를 잃었다. 주무 부서인 문체부는 최순실과는 무관하다고 적극 해명했지만, 안타깝게도 수긍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장관과 차관조차 '최순실 라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다, '나쁜 사람'과 '그 사람 아직도 있어요?'라는 대통령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문체부는 최순실의 직속 비서실이라는 조롱까지 받고 있는 마당이다.

이어서 정갈한 차림의 원불교 교무 한 분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참회부터 했다. 지금껏 원불교는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시위에 동참하기는커녕 개인적으로 발언하는 일조차 극도로 자제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드 배치 문제를 계기로 평화와 상생을 해치는 정부의 친미 의존적인 정책에 공분하며 이번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광장에는 원불교뿐만 아니라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소속 신부님들과 개신교 목사님, 스님들도 자리를 함께하며 '식물 대통령'을 성토했다. 사랑과 자비, 용서와 화해를 가슴에 품고 사는 성직자들조차 그만큼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 모두 내달 12일에 서울 광장에서 있을 민중 총궐기 집회 때도 기꺼이 함께하겠노라 다짐하며 손에 손을 맞잡았다.

집회를 마치고 도청 앞 금남로를 따라 거리 행진이 이어졌다. 깃발을 따라 거대한 인간 띠가 만들어졌고, 경찰의 유도에 따라 도로 위 차량들은 기꺼이 길을 내주었다. 얼마 동안 도로 위에 갇혀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는 상황인데도 운전자들은 부러 창문을 내리고 박수를 치거나 손을 흔들었다. 집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함께하고 있다는 표현인 셈이다.

가로수마냥 길가에 늘어서서 박수를 치고 팔을 들어 올리며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시민들도 많았다. 빌딩마다 창문을 열고 머리를 빼꼼히 내민 채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졌지만, 지나는 거리마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박근혜 퇴진' 구호는 어느덧 '광주의 노래'로 자리매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에 실려 온 거리에 울려 퍼졌다.

특히 젊은이들의 참여도 눈에 띄게 늘었다. 요즘 들어 '고령화 사회'를 가장 먼저 실감하는 곳이 집회 현장이라지만, 거리 위에 펄럭이는 대학 깃발들이 반갑고도 든든했다. 언제부턴가 대학 캠퍼스 내가 아니라면 집회에서 대학생들을 만나기란 좀처럼 힘들다. 요즘 젊은이들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며 기성세대로부터 도매금으로 손가락질을 받아온 터다.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 이어진 '광주 출정가'와 '민중의 노래'의 노랫말을 즉흥적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도청'은 '청와대'로, '독재정권'은 '무당정권'으로 바꾸는 식이다. 또, 노래와 노래 사이에 '박근혜 퇴진'이라는 추임새를 넣는 등 거리 행진에 흥을 돋우기도 했다. 거리에 비장함과 발랄함이 공존하고, 의미에 재미를 더한 새로운 모습이었다.

거리 행진을 통제하는 경찰들도 사실상 집회에 '합류'하는 모양새였다. 누구 하나 폴리스 라인을 넘어서지 않았으며 차량들도 거리 행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회하거나 멈춰 기다렸다. 그들은 거리 행진의 간격을 유지시키고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손에 든 무전기와 형광색의 튀는 복장만 아니라면, 누가 경찰이고 누가 시위대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앳된 경찰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이어폰을 꽂은 경직된 자세에서 비록 소리 내어 크게 부르진 않았지만, 입모양을 통해 그조차도 우리와 한마음 한뜻임을 알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도 입대하기 전 파릇한 대학생이었을 테고, 귀에 익숙한 노래가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 것이리라.

오후 4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거리 행진 후 캄캄해진 7시가 다 되어서야 마무리 됐다. 시작은 광장이었고, 끝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과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었던 시장에서였다. 그 시간 철시를 준비하던 상인들은 시위대를 향해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었고, 함께 '박근혜 퇴진'을 목 놓아 외쳤다. 입구에 '박근혜 퇴진' 손 팻말을 가져다 붙인 가게도 있었다.

해산 이후 삼삼오오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 TV에서 속보라며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진 전원의 사표를 요구했다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걸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노답'이라는 것. 모두들 대통령이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게 없다고 못 박았다. 대통령의 말로가 보인다는 한 분은 집회를 갈무리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난국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야. 결자해지. 최순실이고, 우병우, 안종범이고 간에 다 곁다리일 뿐, 박근혜 대통령이 즉시 물러나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물론, 그게 끝일 순 없어. 하야가 문제 해결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일 뿐이야. 그런데도 저렇게 버티려드니 답답할 노릇이지.

국민의 열망과 명령을 거부하고, 생뚱맞게 국정을 다시 이끌겠다고 하니 국민이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지. 섣부르지만, 2016년 11월 12일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날로 남을지도 모르겠어. 민중 총궐기가 있을 그날, 함께 상경하겠다는 사람이 내 주변에만 수십 명이 넘어. 이렇듯 들끓는 민심을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느끼긴 할까?"


태그:#최순실 게이트, #대통령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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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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