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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에 막내가 어린이집에 간다. 내 나이 마흔을 맞아 건강관리를 위해 낮시간에 본격적인 운동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결혼 전에 열심히 했던 수영을 다시 시작할까, 이사 오기 전 동네에서 3개월 열심히 했던 요가를 다시 할까, 아니면 어려서부터 제일 잘하는 걷기를 해볼까.

지난 8년 동안 24시간 집에서 붙박이로 아이 셋 키우는데 온 힘을 쏟았던 터라 어딘가에 묶여 꼬박꼬박 뭔가를 하자니 부담이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1주일에 하루쯤은 좀 멀리 가고 싶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찾아, 뜸했던 공연장과 전시장의 새로움을 찾아 애 셋 아줌마로 존재하는 동네를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던 차에 만난 그림책 <여기는 한양도성이야>. 작년에 기사에서 언뜻 본 배우 김남길의 '길을 읽어주는 남자, 한양도성' 길이야기 캠페인​이 생각났다. 기사를 보며 서울살이 20년이 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구나, 언제고 한 번은 걸어봐야지 하며 지나쳤던 한양도성 길이야기. 그림책으로 만난 후 3월에 걸을 첫 번 길로 한양도성길을 눌러 적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한양도성

우리가 기억할 성돌 하나하나에 새긴 마음
▲ 알지만 몰랐던 한양도성 우리가 기억할 성돌 하나하나에 새긴 마음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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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을 중심으로 한양이 성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인왕산과 북악산, 낙산, 남산의 능선을 따라 도심 속에 끊어진 듯 이어진 성곽 길을 걸으면 서울 도성 한 바퀴를 돌 수 있다는 건 그림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림책이지만 마치 역사책과 지리책을 보는 기분이 들었던 <여기는 한양도성이야>. 글작가가 누군지 들여다보니 학부에서 지리학과 국문학,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이력의 김향금 작가이다. 지리학을 바탕으로 지은 여러 책이 흥미롭다.

화사한 살구꽃이 핀 한양 도성 풍경이 그려진 표지를 넘기면 여러 모양의 돌로 쌓은 성곽의 겨울 풍경이 면지에 가득 차 있다. 성곽의 한 귀퉁이 네모반듯한 성돌에 '석수 도변수 오유선'이 새겨져 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사대문 밖 허름한 외딴집에 사는 아이는 '석수 오유선'이 적힌 종이 한 장 들고 이름 아침 서른 세 번의 종소리와 함께 숭례문이 열리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간다.

"과거 시험 보러 온 경상도 선비도, 땔나무 잔뜩 진 땔감장수도 꽃구경 순성놀이(하루 만에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놀이)를 나온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간다.

관복을 입고 말을 타고 출근하는 나리도 보이고, 중생을 살피러 나온 스님의 모습도 보인다. 성곽 아래 공터에서 어울려 노는 댕기머리 아이들도 있다. 모두 다 제각각 바쁘게 시작하는 하루의 풍경이다. 사대문 안 사람들보다 더 일찍 일어났을 도성 밖 사람들의 부지런한 걸음이 한양 도성의 하루를 연다.

도성 밖 사람들이 여는 한양도성의 하루
▲ 숭례문이 열리는 이른 아침 도성 밖 사람들이 여는 한양도성의 하루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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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 오유선'을 찾아

도성에 들어온 아이는 도성 구경할 새도 없이 성돌을 살피며 부지런히 성곽길을 오른다. 가파른 인왕산길에 접어들자 날이 훤히 밝아온다. 인왕산 남쪽 봉우리 필운대는 살구꽃 세상, 춘상객들로 북적거린다. 그 곳에서 아이는 한 선비를 만나 종이를 내밀며 '석수 오유선'이 새겨진 성돌을 물어본다. 그러나 선비는 요맘때 한양 제일의 구경은 꽃구경이라며 한시나 읊는다.

아이는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인왕산 꼭대기를 향해 걷는다. 삿갓바위에서 한 정승을 만나 다시 종이를 내밀며 성돌을 찾는다. 정승은 "석수라면 성벽을 쌓은 장인이라는 건데"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저으며 한양에서 가장 멋진 한양의 터 자랑만 늘어놓는다. 네 개의 산이 감싸 안은 도성의 풍경은 아이의 눈에도 장관이다. 

힌트: 한양을 설계한 인물
▲ 아이에게 한양 터를 자랑하는 저 정승은 누구일까요? 힌트: 한양을 설계한 인물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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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

그러나 감탄도 잠시, 아이는 주먹밥 한 덩이를 먹으며 다시 길을 걷다 군사들과 함께 나온 임금님 행렬을 보고 작은 성문 뒤에 급히 몸을 숨긴다. 임금은 산성을 둘러보며 외적들 걱정을 내려놓는다.

나라를 지켜주는 나라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아이는 함께 주먹을 쥐어보지만 갈 길이 급하다. 다시 길을 걷다 "궁궐을 품고 반쯤 핀 모란꽃"같은 북악산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만난다.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본 화가는 '네모반듯한 성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는 하던데"라며 처음으로 아이에게 단서가 될 이야기를 해준다.

아이는 뛰듯이 곡장과 혜화문을 지나 낙산 활쏘기를 잠시 구경하고 낙산 끄트머리에 도착한다. 흥인지문이 보이는 내리막길에서 드디어 '석수 도변수 오유선'이 새겨진 성돌을 찾아낸다. 아이는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할아버지의 성돌을 찾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성돌을 만지자 꿈처럼 한양도성 공사 현장이 펼쳐진다.

한양 밖에서 난 돌을 높은 산으로 옮겨 오고, 다듬어 깎고, 한 돌 한 돌 쌓아 올린 이들의 수고로움은 생각만으로도 먹먹하다. 나라를 살피는 임금님도, 나리들도 기억하지 않는 한양도성을 쌓은 무명씨들의 이름. 그들은 성돌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기며 당대를 넘어 후손에게까지 이르는 책임감으로 한양도성을 이루었다. 

석수 도변수 오유선은 아이의 할아버지!
▲ 드디어 찾은 할아버지의 성돌 석수 도변수 오유선은 아이의 할아버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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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겐 무명씨, 그러나 지금도 빛나는 이름들

한양을 재우는 종소리가 스물여덟 번 울리면 사대문과 사소문이 닫히고 아이는 성문 밖 외딴집으로 돌아온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라지만 성을 쌓아 성 안팎을 구분하며 살았던 그 옛날, 아이는 도성 안의 삶이 궁금하고 부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도성 안의 높고 화려한 삶보다 제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민초의 후예가 자신임을, 그것이 한양 제일임을 깨달은 아이는 시대를 넘어 오늘의 촛불로 그 값진 유산을 남겨 주지 않았을까?

"한양도성에서 가장 멋진 건 바로 성벽을 쌓은 수많은 사람들이에요!"

이 책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아이의 외침과 함께 펼쳐지는 그림은 묵직하고도 뜨거운 감동으로 오래 머물 것 같다. 장장 18.6km에 이르는 길고 긴 성벽 길과 그 길을 쌓은 무명씨들의 이야기가 함께 새겨진 그 그림은 오늘도 타오르고 있는 촛불의 바다로 이어졌다. 이름이 있지만 기억하는 이 없는 그들은 무명씨로 통칭되다 '보통사람들'을 지나 '시민'이 되어 굳게 잠긴 푸른 지붕집을 향해 기꺼이 자신의 일상을 태워 빛을 내고 있다.

가을을 빼앗기고 겨울마저도 차가운 길 위에서 버티며 새해를 맞았다. 해가 바뀌었지만 오래 묵은 숙제는 펼쳐볼수록 상상 이상이다. 오직 진실을 바라며 바다를 이루었던 성숙한 시민들의 촛불은 오늘도 계속 타오르고 있지만, 저쪽에서 펄럭이는 '그들만의 태극기'도 가짜뉴스 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몰아쳐 오고 있다.

오래 기다려온 봄, 그저 며칠 늦는 것일 뿐

입춘이 지났다. 아이들의 졸업식이 동네 곳곳에서 연일 열리고 있다. 3월 입학식 전에 상식적으로 흘러가는 일상이 새롭게 시작되리라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리려나 보다. 괜찮다, 며칠 조금 더 걸리는 것일 뿐이다. 저 길고 긴 한양도성 길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을까? 한 돌 한 돌, 걷고 걸어 네 개의 산을 이어 없던 길을 옛날의 우리가 만들어 냈다.

알고 보니 참 귀한 한양도성 길, 아이들 손을 놓고 홀가분하게 뛰듯이 하루 일정으로 걷고 싶지만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무수한 시간으로 쌓은 길이다. 아이와 함께 걷는 길은 더디지만 아이의 길에선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도 길벗이 된다.

오래 기다려온 미래가 늦어도 여름 전에는 올 듯 하니, 아이들 걸음에 맞춰 시간을 나누어 오래된 길을 천천히 걸어 봄 속으로 걸어가야겠다. 그림책 뒷 면지에 기어코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할아버지의 성돌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우리가 쟁취한 미래를 우리 스스로에게 자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나무는 키 큰 나무 그늘로 자란다.
▲ 빛나는 유산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 작은 나무는 키 큰 나무 그늘로 자란다.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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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재미있어요*

1. 역사 속 인물을 찾아
아이가 만난 네 명의 사람들은 역사 속 실제 인물들이다. 인왕산 필운대에 살았던 이항복,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탕춘대성을 세운 숙종, 북악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화가 겸재 정선이다. 지리학과 역사, 그리고 문학의 만남, 아이들과 함께 하기 더없이 좋다.

2. 각기 다른 모양의 성돌
'작고 아름다운 존재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작가 문종훈이 섬세하게 그려 넣은 성벽을 자세히 보길! 그림책의 성곽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곳에서는 둥글고 작은 성돌이 겹겹이 쌓여 있고, 또 어디에선 자로 잰 듯 네모난 성돌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을 짓고 보수하던 시기마다 돌의 모양도 달라져 성돌의 모양이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이다.

3. 석수 오유선을 찾아라!
그림책 속 '석수 도변수 오유선'이 새겨진 성돌은 어디에 있을까요? 힌트 하나, 동대문 구간 어디쯤, 힌트 둘 '네모반듯한 성돌'.


여기는 한양도성이야

김향금 글, 문종훈 그림, 사계절(2016)


태그:#여기는 한양도성이야, #촛불,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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