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을 넘긴 이들에게 '고향'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무엇이냐 물어 본 적이 있다. 이때 많은 이들이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신작로와 저녁연기 피어오르던 굴뚝이 있는 시골집과 같은 70년대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던 풍경들을 고향에 대한 이미지로 말했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일세
깊은 밤 날라 오는 눈송이 속에
고향을 불러보는 고향을 불러보는
젊은 푸념아
백년설 선생께서 부르셨던 <고향설>이란 노래 1절이다. 이 노래는 50대에서도 집안에 형이나 누나가 이미 칠순을 목전에 둔 분이 계실 정도가 되어야 기억한다. 요즘처럼 많아야 3 정도의 자녀를 크게 차이 안 나게 낳아 기르는 가정에서는 생소할 풍경이 있었다. 맏이와 막내의 나이 차이가 20년 이상 되는 가족이 예사로 만나지던 1970년대의 시골풍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들은 여전히 이런 풍경을 동경한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강원도라고만 하면 거두절미하고 오지 중의 오지를 떠 올린다. 그러나 이 말은 교통이 불편했던 1970년대까지의 이야기다. 당시엔 강원도뿐만 아니라 거의 수도권과 다름없는 환경으로 변모한 충청남도도 주소 하나 들고 찾아가기는 불편하고 어려웠다. 하물며 경상북도나 전라남북도와 같은 고장이야 강원도나 마찬가지로 오지란 말이 손색없었다.
하지만 이젠 양양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를 이르는 부연동이나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와 같은 특수한 곳을 제외하면 오지라는 말과 강원도는 어울리지 않는다. 부연동도 대중교통만 없을 뿐 얼마든지 차가 들어가고 전기를 사용하니 오지라고는 해도 문명과 동떨어진 세상은 아니다. 이렇듯 오지란 말은 전기가 안 들어간 가구들이 마을을 이루고 도로 또한 눈비가 내리면 소통을 할 수 없는 환경으로 급변하는 포장이 안 된 구불구불한 길일 때나 어울린다.
그러나 강원도에 대해 사람들의 지닌 생각은 청정한 산과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등이 가장 먼저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지는 고립무원의 불편한 삶터가 아닌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청정무구의 삶터로 대치된다. 그중에서도 이곳 양양군은 설악산과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릉의 동쪽에 위치하여 극상림의 숲이 제공하는 다양한 산채와 맑은 공기, 유리알같이 맑고 깨끗한 수자원이 풍부하다.
최근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접근성은 더 좋아졌다. 강릉이나 삼척으로 이동하는 차량까지 이 도로를 이용하는 모습도 어렵잖게 만난다. 새로 개통된 도로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1시간 20~30분 정도에 서울에서 양양을 올 수 있다는 예측에 따라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강릉을 가지 않고 서울양양고속도로를 이용해 체증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교통여건이 이렇게 좋아진 강원도를 찾는 많은 이들이 시설이 좋은 숙박업소를 찾는 이들도 많으나 여전히 조금 불편하더라도 인정을 느낄 수 있는 민박집을 찾으며 단골로 이용하기도 한다.
양양군은 강원도에서 농어촌이 가장 살기 좋은 여건을 두루 갖춘 고장이다. 물론 전국을 돌아보아도 양양군만큼 농어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춘 경우는 만나기 쉽지 않다. 자립형 마을들이 이렇게 양양군에 집중될 수 있었던 과정엔 양양군의 지속적인 노력과 각 마을 주민들의 일치된 협동과 의식변화가 큰 역할을 했다. 또 하나는 바로 옆 마을이 내 사는 마을과 비교해서 더 좋은 조건을 갖췄다고 볼 수도 없는데 강원도와 정부의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마을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며 스스로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이 마을들을 이용하는 이들은 자녀를 동반한 부모들이다.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고구마를 심고 캐는 일 모두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엔 수입을 안겨준다. 그런데 대부분 극히 짧은 기간에 이루어질 뿐 사계절 지속적인 체험거리를 제공하기 어렵다.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 이룬 것은 가장 기본적인 진행과정에서 기초를 다진 일일 뿐이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현대적 시설로는 더 이상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감성을 흔들 촉매가 필요한 시점이다.
고향의 풍경과 체험을 제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구불거리며 층층이 이루어진 다랭이논에 소가 쟁기질을 하고, 여기에 못줄을 띄우고 손으로 모를 심던 풍경과 논둑 조금 넓은 자리에 앉아 나누던 못밥이 체험이 될 수 있고, 초가와 너와집에서 아궁이를 불을 지펴 밥을 하고 숯불을 화로에 담아 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굽던 생활이 체험이 될 수 있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새 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흘러간 유행가 절로 흥얼거릴 풍경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게 한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했던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누며 나눴던 이야기가 있다.
"오색이 옛날처럼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겠지?"경섭이란 친구가 먼저 말했고 정엽이란 친구가 여기에 동의했다. 이에 친구들과 몇 번 이야기 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거들었다.
"경섭아, 예전 너희 집처럼 그런 두부공장이 있고 굴피집과 너와집, 그리고 초가집이랑 예전 같이 약수여관이니 선녀여인숙이니 하는 숙박업소들이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됐어. 거기에 너네 가게 이름처럼 덕성상회와 같은 가게들이 그 시절 풍경 그대로 돌담길을 끼고 돌아가면 만날 수 있었다면 오색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마을로 남아 있겠지."징검다리와 섶다리는 물론이고 통나무를 두 세 개 겹쳐 개울을 가로질러 놓았던 다리 또한 큰물만 나가면 새로 놓아야 되긴 했으나 다시 되살려 양양의 관광자원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 다리를 건너 점방에서 막걸리 한 잔 평상에 걸터앉아 마시고 돌담길 돌아서면 채마밭에 파릇하게 자라는 파와 무 배추, 고추가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관광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고향이며 동시에 우리가 갈망하는 참다운 여행지의 모습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