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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그림여행>은 11세기 이후 서양 회화를 조감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을 권하는 데 있어 동서양 미술을 차별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내 취향에 맞고, 어느 정도 접해본 것이 서양 미술일 뿐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미술을 감상하며 보내는 시간이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예전에는 미술에 관심도 지식도 없던 사람이었다.

문외한의 미술 기행
 
 <천년의 그림여행> 표지
 <천년의 그림여행> 표지
ⓒ 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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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그림이라고는 미술 교과서에 실린 것밖에 보지 못했다. 게다가 타고난 곰손이라, 언제나 미술 점수는 처참했다. 미술을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 시절 유럽 배낭여행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런던에서는 국립미술관을 비롯해서 웬만한 미술관은 무료였다. 외국 문물을 접하러 갔는데 공짜 박물관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넬슨 동상을 뒤로하고 우선 국립미술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에 압도당했다.

국립미술관에는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림들이 실물로 걸려 있었다. 쇠라의 <아스니에르의 물놀이>가 그렇게 큰 그림인 줄 몰랐다. 그렇게 큰 화면에 점 찍는 노동을 해댔으니 요절할 만도 했다.

런던에서는 끝도 없이 터너의 그림이 이어지는 테이트, 그리고 부셰의 그림이 사방에 걸린 월리스 컬렉션에 자주 갔다. 그러면서, 나도 미술관이 무료인 나라에서 자랐다면 이렇게까지 미술에 무지한 사람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첫 해외여행에서 미술관에 압도당한 덕분에, 이후에는 여행할 때마다 미술관 방문이 주요 일정이 되었다. 특히 유럽 지역 미술관에 가면, 아이들 여남은 명이 인솔자와 함께 그림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손에 크레파스를 들고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지어지고 흐뭇하다. 생생한 이미지에 자극받은 저 아이들의 뇌 속에서는 새로운 신경세포 네트워크가 한창 피어나는 중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뇌는 감각의 제국이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달팽이의 사촌에 불과한 문어가 놀라운 지능을 보여주는 이유는 커다란 눈과 긴 팔로 받아들이는 자극의 양과 질이 달팽이와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1.4킬로그램의 우주라고 하는 놀라운 뇌를 가진 인간이라도, 감각의 투입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제한된다.

잔인한 일이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아기 고양이의 눈을 일정 기간 가려두는 실험이 있었다. 나중에 눈가리개를 벗었지만, 고양이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망막도 시신경도 모두 멀쩡했지만, 뇌가 시각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울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시각장애인은 시력 회복 수술 후에도 한참 동안 시각 정보 처리 훈련을 해야 볼 수 있게 된다. 외부 입력이 없다면 뇌는 퇴화한다.

사랑에 빠지다

유럽 여행으로 미술을 접하게 된 이후에도, 나는 다들 좋아하는 인상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비드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좋아하던 내게 인상파 그림은 너무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는 자신도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2006년 10월, 스위스 바젤로 짧게 여행을 갔다. 모네의 수련 연못을 화랑에 재현해 놓은 것으로 유명한 '바이엘러 퐁다시옹'을 방문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미술관을 찾는 버릇이 있어 바젤 여행의 핵심은 이곳이었다. 모네의 그림 옆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수련 연못은 예상대로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사건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당시 바이엘러 퐁다시옹은 다른 박물관에서 빌려온 세잔 그림 서너 개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보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소설 <금각사>의 주인공 미조구치가 왜 불을 질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 그림 한 개 때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는 세잔이다.

운명 같이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마다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감각에서 출발한다. 음악도, 미술도 많이 접하다 보면, 인식은 확장된다. 그러다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될 수도 있고, 미처 모르던 자신의 어떤 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알면 더 사랑한다
 
 피터 브뤼헬, <이카루스의 추락>
 피터 브뤼헬, <이카루스의 추락>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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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나 <자드부팽의 전경, 겨울>과 같이 한눈에 압도되는 그림도 있지만, 알고 보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다. 알면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미술도 마찬가지다.

나는 제임스 오든의 시 '미술관(Musée des Beaux Arts)'을 통해 피터 브뤼헬(Pieter Brueghel)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고, 오늘날의 우리와는 정말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밝고 정겹다. 그의 그림을 설명하는 오든의 시가 아니었다면, 난 그 그림의 제목이 왜 <이카루스의 추락>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카루스의 추락>은 브뤼헬의 그림 중에 가장 쉬운 그림에 속한다.
 
 폴 들라로슈,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폴 들라로슈,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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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국립미술관에는 브뤼헬의 그림이 정말 많다. 하찮은 농민들의 삶을 묘사한 그의 그림을 플랑드르 귀족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많이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나라의 억압받는 민중을 그린 그림은 지배층이 꺼리겠지만, 남의 나라 얘기라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곳, 빈 국립미술관에서 나는 오디오 가이드가 포함된 입장권을 구입했다. 그전에는 오디오 가이드를 빌린 적이 없었는데,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한 번 시도해 봤다. 이때 내가 감상한 브뤼헬은 그 전에 보던 브뤼헬과는 달랐다. 거대한 화면에 조그맣게 그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어떤 생활상을 보여주는지 상세한 설명을 듣고 보는 그림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동양화도 마찬가지다. 문근영과 박신양이 주연했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나의 무지를 일깨웠다. 김홍도의 아류라고 생각했던 혜원의 그림이 내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드라이한 서술이라면, 신윤복은 심리묘사의 달인이다. <월하정인>을 보라. 남자의 발끝을 주목하기 전까지는 혜원의 제발(題跋; 그림에 쓰여있는 글귀)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달빛도 침침한 3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이 알겠지.

상봉이 아니라 이별을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그림의 느낌이 반전된다. 아직 깊은 밤인 3경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발길은 바깥을 향한다. 남자의 발길 외에도 증거는 더 있다. 이 그림의 제발은 혜원의 창작이 아니라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이 지은 칠언절구의 일부다. 칠언절구의 나머지 두 줄이 이별을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알고 보면 달라 보이는 그림에서 반 고흐를 뺄 수는 없다. <별이 빛나는 밤>이나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이다. 하지만 빈센트의 삶의 궤적을 모른다면 감동은 덜 할 수밖에 없다.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라는 영화를 보라. 21세기 컴퓨터 기술이 아니었다면 만들지도 못했을 영화다. 아를과 오베르에서 완성된 반 고흐의 마지막 화풍에 따라 그려진 인물들이 움직이며, 그의 생애를 추적한다. 우체부 룰랭, 의사 가셰, 라부 여관의 아들린이 그림에서 튀어나와 움직인다. 그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빈센트의 삶은 그의 그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해설 딱지다.

그래서 나는 <천년의 그림여행>과 같은 미술책을 한 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꼭 이 책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림을 해설해 주는 책은 정말 많으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책형이 큰 게 좋다. 해설은 나중에 보더라도, 그림은 크게 보는 것이 좋으니까 말이다.

<천년의 그림여행> 274~275쪽에 나와 있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보라. 우선 바라보면서 그림 그 자체를 느껴보자. 그러고 나서 해설을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다. 신경세포 신호는 전기로 전달된다. 정말 짜릿하지 않은가.

천년의 그림여행 - 특별 보급판

스테파노 추피 지음, 이화진.서현주.주은정 옮김, 예경(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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