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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편집자말]
요즘 친구들이나 또래 선후배를 만나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잘 나이 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잘 나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들어보면 각자마다 다르다. 적어도 이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모델은 있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실린 한 시민기자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회사 다닐 때 여성 선배들 중 정말 존경해 따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작 아주 높은 직급을 가진 이들 중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더 높은 기준을 들이대며 젠더 감수성이란 것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고. 그 말을 듣는데 공연히 찔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을 했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친구와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계속 회사 생활을 하다가 마흔 넘어서 퇴직했다.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두 배로 노력했야 했던 경험, 여성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오해들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까칠해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버젓이 이루어졌던 성희롱들...

임신한 여성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한 시절이었다. 출산은 곧 퇴사로 이어지는 게 비일비재했다. 출산한 후 복직한 여성들이 전과 같지 않을 때, 그 당연한 변화를 우리 역시 다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라서 저렇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독해지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탓이다. 지금이야 그런 과거가 구닥다리처럼 들리겠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인 시기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확실해요?' 하고 묻게 된다. 소모적으로 각개전투를 하느라 무엇 하나 제대로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만 잘해 살아남는 것에서 더 나아가 후배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시민기자가 쓴 글에 찔리고 부끄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글을 보고 나서 여러 가지 회한이 들었다. 핑계일 수 있지만 그런 선배가 많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확신을 주는 언니 세대가 별로 없었어요. 지금도 남성에 비해선 훨씬 적죠.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니어도, 어릴 때부터 주목받을 기회가 주어진 게 아니어도 자신의 지향대로 삶을 이끌어 나가다 보면 힘을 갖게 되고 그걸 누군가에게 나눌 수도 잇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 싶어요."

연애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곽정은씨가 <언니들이 있다>라는 책에서 했다는 말을 우연히 접했다. 도망갈 구멍이 생겨서일까. 아니면 나도 이 나이에 언니가 필요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라도 좀 더 잘 나이 들어서 좋은 언니가 되고 싶어서일까. 저 몇 문장에 <언니들이 있다>라는 책이 궁금해졌다.

그래도 다시 일어서 손 잡아 주는 언니들
 
 '언니들이 있다' 책표지
 "언니들이 있다" 책표지
ⓒ 헤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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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비뚤어진 마음(이라 쓰고 '질투'라 읽는다)도 있었다. <한국일보> 김지은 기자가 인터뷰했다는 '언니들'이란 어쨌든 어느 정도 입지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마이크도 그런 사람들의 차지인가 싶었다. 존경은 하지만 내가 따라가기엔 무리여서, 쫓아가다간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라는 걸 확인해 주는 사람들. 굳이 나는 흉내낼 수 없는 삶을 보며 속상해지기 싫었다. 꼭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하는 것 같아서. 난 내만큼의 그릇이 있고 수준이 있는데, 너무 높은 수준을 올려다 보면 소박하게나마 최선을 다해 일군 내 삶을 초라하고 쓸데없다 여기게 될까봐.

그때 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다시 일어서 손 잡아 주는" 언니들이란다. 다시 일어났는데 손을 잡아준다고? 그럼 넘어졌다는 이야기고, 넘어져서 일어난 다음에 하는 일이 손을 잡아주는 거라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넘어갔다.

책을 보니 내 우려는 선입견이었다. 언니들은 그런 언니들이 아니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추천사로 쓴 것처럼 언니들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상처 없는 세상이다.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던진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질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당한 부당함과 불행, 고통에 질문했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지 않고 한 사람들이다. '여성 최초' 역사를 써온 카피라이터이자 현재는 <최인아 책방>으로 유명한 최인아씨는 이름이 아닌 '미스 최'로 불리던 초창기에 "혁명을 할 게 아니라면, 현실을 돌파한 샘플이 되어보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변화가 필요할 때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게 출발지예요. '견딜 건가, 바꿀 건가, 나한테 뭐가 중요한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 질문이 먼저 있어야 답을 찾을 수 있어요."

13살 때 시설에 맡겨졌던 발달장애인 동생과의 동거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 <어른이 되면>의 장혜영 감독도 질문에서부터 출발했다.

"만약 누군가 열세 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너는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서 외딴 산꼭대기의 건물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평생을 살아야 해. 그게 네 가족들의 생각이고 너에게 거절할 권리는 없어. 이게 다 네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야.'"

'용산 참사'를 스크린으로 소환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만든 김일란 감독은 "카메라를 들면서 늘 갖고 있는 신념이나 원칙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게. 저는 특별한 게 없는데. 음, 물어본다는 거밖에 없어요. 사실 모르는데도 묻지 않아서, 지레 짐작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큐도 마찬가지에요. 섬세하게 물어야 하죠. 좋은 질문을 제대로 만드는 게 다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 대답에 대한 김지은 기자의 각성과 성찰이 훅 다가왔다.

"'그렇구나' 새삼 생각했다. 질문은 변화의 시작이니까. 묻지 않고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묻지 않는 것은 무관심이고 포기다. 질문은 그렇기에 사랑의 징표일까. 나는 얼마나 질문하며 살고 있나. 점점 질문의 수가 적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맞다. 나는 질문하지 않았고, 했다 해도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나에게 갇혀서 내가 겪은 불행을 사회적 언어로 확장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밖에.

나를 지키기 위한 질문

30대 때 미친 듯이 일할 때, 남성들과 경쟁할 때, 부당한 구조와 잘못된 관행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개인 차원에서 살살 좋게 좋게 해결했다. 그게 능력이라고 여겼다.

방송작가로 일하다가 하루아침에 해고당했을 때에도 "왜 부당한 해고가 당연하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은 있었지만 내 능력 탓이라는 개인의 비극으로 축소시켰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찍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생존에 급급해서 기존의 구조에 비겁하게 순응했다. '다음'을 위해서 말이다. 나같은 사람이 다수이다 보니 여전히 방송작가계의 불안하고 부당한 고용 시스템은 계속되고 있다.

해고당했을 때,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언니였다. 손잡아주는 언니. 내 나이가 많다 보니 선배도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있는 선배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연락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적으로 내 부덕의 소치이고 무능력의 결과다. 그와 별개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그때, 아무리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어도 잡을 것이 없다는 건 내가 당한 일보다 더 마음 아픈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질문하지 못했던 건 비겁했고 패착이었다. 그때는 내가 나설 일인가 싶었다. 나같이 나이는 많으나 경력은 짧고, 열심히 했으나 능력이 없어 해고당한 작가는 나설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섰다가 상처받기도 싫었고, 진짜 그 업계에서 나쁜 소문이 돌아 매장 당할까봐 두려웠다.

그 결과 나 개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나의 좌충우돌은 후배들에게 아무런 기여를 못한 개인기로 그쳤다. 나이 마흔에 방송작가에 도전해서 꿈을 이뤘다는 출발은 좋았으나 그 이상의 샘플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요즘의 젊은 후배들은 다행히 이미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 오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곤 한다.

그래서 겨우 시작한 것이 내가 겪은 실패와 후회를 쓰는 것이다. 그 당시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또한 밑천이 떨어질 날이 올 텐데,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이 깊다. '고작 이런 경험팔이로 무엇을 바꿀 수 있담' 하는 생각이 드는 날에는 모든 것이 의미 없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쉽게 지치고 낙담하고 포기하고 싶어하는 나에게 언니들이 건네는 위로는 따뜻하다.

"인생 같아요. 꽃은 질 걸 뻔히 알면서도 정말 열심히 피거든요. 그것도 엄청 '디테일하게' 열심히 피고 져요. 우리가 다 죽을 줄 알면서도 살잖아요. 굳이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듯이. 찰나로 피고 져도, 그거 자체가 의미이고 인생이라는 진리가 담겨 있는 거죠." - 옥상화가 김미경

언니가 언니에게
 
 언니들은 지금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있다.
 언니들은 지금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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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의 이야기도 든든하게 다가온다. 이진순은 첫 서울대 총여학생회장이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외치다 구속됐고 나와서는 서울 구로공단에 여공으로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했다. 나중에 복학이 되기는 했지만 출소하고 나서 공장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6년 동안 일당 3300원 받는 여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 시기가 이진순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 때문에 세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이런 힘은 생겼죠. '내가 이런 것도 해봤는데 이 정도 가지고 겁을 내나?' 살면서 누구나 힘든 순간이 있잖아요. 그럴 때 옛날 등 따순 데 찾아서 도망가지 않았잖아. 근데 지금 이런 것도 못하면 너무 맛이 간 거 아니야'라면서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거죠. 나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할 때 도움이 되는 것 같네요."

<언니들이 있다>는 언니들의 삶을 통해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사유하게 하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과거의 비겁하고 협소했으나 그래도 열심히 살았던 30대의 나에게, 여전히 내 코가 석자인 채로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종종 낙심하는 지금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었다. 너도 도망치지 않고 잘 살아냈다고.

한편으로는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질책도 해주었다. 너도 좋은 언니가 될 수 있다고.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해야 한다고.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숨지 말고 작은 목소리라도 보태야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결국 그게 잘 나이드는 것 아닐까.

책에 나온 언니들은 지금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있다. 다 열거할 수 없으니 대표적으로 이진순의 예를 들겠다.
이진순은 나이 마흔에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은 청년 리더를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 기성 정치인들로부터 쓸데없는 일을 한다는 손가락질을 받지만 그녀는 괜찮다면서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 거니까. 다만 좀 외로울 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 거니까"라니. 요샛말로 진짜 '존멋'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언니들이 있다 - 그래도 다시 일어서 손잡아주는, 김지은 인터뷰집

김지은 (지은이), 헤이북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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