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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지난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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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힘겨운 쇄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쇄신이 힘겨운 것은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 외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힘이 '내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인 측면이 크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관련된 15일자 대국민 사과문도 그런 내부 요인 때문에 불충분한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이 사과문은 이명박·박근혜의 정경유착과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해 반성하면서도 "민주와 법치가 오히려 퇴행한 작금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며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라며 민주당 정권에도 간접적으로 책임을 돌렸다.

사과문 결론 부분에 "이 작은 사과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겸손의 뜻으로 사용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그것은 '작은 사과'였다. 이처럼 반성과 사과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당 쇄신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보수정당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당이 쌍둥이었다는 사실 

국민의힘은 1981년 1월 15일 창당된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민주공화당(공화당) 및 자유당과도 맥이 닿는다. 1인 독재자의 집권을 목적으로 창당했다는 점, 기득권층 및 보수층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 등이 같다. 또 이념과 지향점에서도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국민의힘의 구조적 문제점은 민정당뿐 아니라 공화당·자유당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보수정당의 원조인 자유당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이맘때 창당됐다. 그런데 그해 12월 23일 세워진 이 당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국회의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원내 자유당'과 원외파를 기반으로 하는 '원외 자유당'이 그것이다. 같은 당명을 쓰는 쌍둥이 자유당이 한날 한시에 이승만 대통령한테서 나왔던 것이다.

똑같이 이승만을 구심점으로 하고 똑같이 자유당을 당명으로 쓰는 정당이 두 개나 태어난 것은 내부 진통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1951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사설 '발족하는 자유 양(兩)당'은 국회의사당과 동아극장에서 각각 거행된 자유당 발당(창당)대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분열된 두 개의 신당 운동은 화합을 보지 못한 채 23일에 각기 그 정통을 주장하면서 동명이체의 양 자유당을 결성하였다.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원내 자유당 발당대회는 당헌·당강을 통과시키고 중앙위원을 선출하였으나 당 대표의장 선출을 보류한 채 3명의 부의장만 선출한 데 대하여, 원외 자유당 발당대회는 전일 발기인대회에서 이승만 박사를 당수로 선출한 데 이어서 부(副)당수 1명과 상집위원을 선출하였다."

대한민국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될 당시, 이승만은 일종의 탕평주의자였다. 조선 영·정조처럼 그도 정당 무용론을 견지했다. 강력한 대통령을 중심으로 당쟁 없는 국가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탕평을 펴려면 당쟁을 억누를 힘이 있어야 했다. 그런 리더십이 없었던 그는 결국 탕평론을 접게 된다. 한국전쟁 26일 전의 제2대 총선에서 자파 후보들이 대거 낙선하자, 그는 현실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 이듬해인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사에서 신당 창당을 언급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열흘 뒤 '신당 조직에 관하여'라는 담화를 통해 창당에 박차를 가한 이승만에게 호응하면서 시작된 것이 자유당 창당 작업이다.

창당 세력은 얼마 안 가 둘로 갈라졌다. 이승만이 국회 양원제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표방하면서부터였다. 국회에 자기 세력이 적었던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기존의 국회 간선제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 하에 국회를 둘로 갈라 약화시키는 양원제,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들에게 주는 직선제를 추진했다. 직선제를 희망한 것은 국민적 인기가 높아서가 아니라 국회 간선을 일단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의 구상은 그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주판알을 튀기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들 원내파는 국회를 약화시키는 구상이 불만스러웠다. 결국 그들은 이승만의 구상을 전폭 지지하는 원외파와 갈라섰다. 이로 인한 두 파벌의 경쟁이 1951년 12월 23일 두 개의 자유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원내 자유당도 이승만을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을 편들었다. 그는 원외 자유당과 합세해 원내 자유당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이에 따라 원내 자유당원들이 원외 자유당으로 넘어가고 원내 자유당은 1953년에 교섭단체 지위를 잃고 무력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당은 원외 자유당이 원내 자유당을 흡수한 당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정부 하의 최초의 집권당인 자유당은 오로지 이승만의 집권 연장을 위해 태어났다. 전쟁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틈타 오로지 집권자를 위해 태어났다. 그런 뒤 현직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정치권력과 자금력에 의존해 유지돼 나갔다.

이 때문에 자유당은 국민의 힘이 아닌 집권자의 힘에 의지하는 정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는 정당을 지향할 필요성을 이들은 느끼지 못했다.
 
 4.19혁명으로 파손된 자유당 당사
 4.19혁명으로 파손된 자유당 당사.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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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만 국민 찾는 정당, 그 이유

집권자의 필요에 따라 비상시국을 이용해 정당을 만드는 이 같은 선례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도 되풀이됐다. 공화당과 민정당 역시 집권자의 필요에 의해 비상시국 기간에 창당되고 집권자의 힘으로 유지됐다. 공화당과 민정당 역시 국민의 힘에 의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정당이 됐다. 명절 때만 안부를 묻는 사람들처럼 이들은 선거 때만 국민을 찾는 정당이 돼버렸다.

그런 구조를 가진 정당이 얼마나 허약한가는 4.19 혁명과 10.26 사태 뒤에 증명됐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자 자유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박정희가 피살되자 100만 당원의 공화당은 전두환 신군부 앞에서 맥을 못췄다. 6월항쟁 뒤에 민정당이 살아남은 것은 집권자를 몰락시킬 정도까지 시민혁명이 전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권자의 후계자가 그해 겨울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이다.

집권자가 흔들리면 보수정당이 동요하는 양상은 촛불혁명 이후에도 재연되고 있다. 대선 패배가 아니라 시민혁명으로 대통령을 잃은 보수정당은 4년 넘도록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집권자의힘'으로 살아온 경험 때문에 '국민의힘'으로 살아갈 앞날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 집권자들의 과오를 공식 사죄하자는 비대위원장의 주장에 대해 격렬한 반발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국민의힘이 기층 당원 중심의 건전한 정당이었다면, 그 같은 내부 반발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집권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데 익숙한 보수정당 내에서 기층 당원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역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정당

만약 보수정당이 자체 힘으로 기층 조직을 확충해왔다면, 자유당 창당 70년이 경과한 지금쯤이면 한국 사회 곳곳에서 보수정당의 지방 조직을 접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사찰이나 교회 혹은 성당처럼 보수정당 지방 조직도 지역 사회에서 친숙한 존재가 돼 있어야 한다. 

여타 정당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보수 정당의 지방 조직은 지역과 결코 친숙하지 않다. 평생 보수정당에만 표를 던진 유권자들조차도 자기 지방의 정당 조직과 친숙하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보수정당이 기층 조직의 자체 형성을 등한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보수정당의 공식적 지방 조직은 지역 정치가의 사조직이나 선거운동 조직으로 역할이 제한된 측면이 컸다. 이들은 기층 조직의 형성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당내 기득권 세력을 억누르고 반성과 사과를 추동할 힘이 국민의힘 내부에서 나오지 않는 원인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보수정당의 지부 역할을 한 실질적 지방 조직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수정당이 공식적인 시도당 조직 외에 사실상의 지방 지부로 활용한 집단들이 있었다. 바로 '관변단체'들이다.

보수정당은 내부 역량으로 지방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지역 활동을 하기보다는, 정부 지원을 받는 반공연맹(자유총연맹)·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새마을운동본부 같은 관변단체를 만들고 이들을 앞세워 지역 활동을 전개했다. 중앙 조직뿐 아니라 지방 조직마저도 공권력의 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보수정당의 지방 조직은 낯설어도 관변단체들의 지방 조직은 낯설지 않은 것은 관변단체들이 보수정당의 지부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했기 때문이다.

6월항쟁 이후의 민정당·민자당 정권이 시민혁명을 당하고도 선거 득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두환 정권의 건재, 1987년 대선 승리, 1990년 3당 합당 덕분이기도 했지만, 6월항쟁 후에도 관변단체들이 여전히 지방 지부 역할을 대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권자에 의존하는 관행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1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지난 1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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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국민의힘 쇄신 작업이 내부 반말에 직면한 이유 중 하나는 집권자에게 의존하는 당내 관행 때문이다. 만약 기층 조직이 튼튼하다면 그런 반발이 약해질 수 있지만, 보수정당은 처음부터 기층 조직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 쇄신을 막을 내부 역량을 기대하기도 힘들게 됐다. 그렇다고 당 밖의 관변단체를 돌아볼 수도 없다. 관변단체은 촛불혁명 이후 현저히 약해져 지금은 국민의힘을 도울 여력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관변단체에 대한 기대감을 아예 끊은 상태에서, 집권자 1인에게 의존하던 관행을 타파하고 이제라도 자기 돈과 자기 노력으로 기층 조직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국민의힘의 쇄신 작업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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