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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전 기사 '이동인과 조선사절단 김홍집의 극적인 만남'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에요. 이동인 스님을 덮고 있는 안개를 흩어버릴 수 있는 '극비문서'를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영국정부가 오랜 세월 말 그대로 '극비문서(very confidential)'로 봉인해 놓은 기록물이니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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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주일 영국공사대리 케네디(J.G. Kennedy)가 본국의 외교장관 그란빌(Earl Granville)에게 두 차례에 걸쳐 보고한 문서로서 각각 7월 27일과 11월 21일(양력)에 작성되었습니다. 두 문건 모두 '극비Very Confidential'로 분류되었습니다. 

먼저 이 문서의 보안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들여다 봅시다. 보고자 케네디는 첫 보고서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군요.
 
"보고서를 마무리 하면서, 본인은 이 보고서 및 특히 첨부자료들에 담겨있는 정보를 비밀로 다루어 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만에 하나 공개가 된다면, 여기 언급된 사람들의 안전이 위험받을 수 있고, 또 본공사관이 현재의 정보입수 수단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일 공사 파크스(H.S. Parkes)는 요양차 본국에 체류중이었으므로 차석인 케네디가 공관장 대리로서 장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보고서에는 케네디가 쓴 본문과 별도로 총 네 건의 문건이 첨부되었습니다. 첨부물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첨부물 중 세 건은 1878년과 이듬해에 중국의 이홍장과 조선의 이유원(영의정 역임, 당시는 영의정에서 퇴임)이 주고받았던 서한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동인과 접촉 중이던 주일 영국 공사관의 사토우 서기관이 작성한 문건입니다. 

보고서는 첫 머리에서 "이들 문서는 모두 사토우씨가 제출한 것으로써 어떤 조선인이 비밀리에 제공했으며 첨부된 사토우의 문건에 담긴 정보도 그 조선인으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아가 "조선인 정보원은 개명된 청년으로서 자국 동포의 이익을 위하여 바깥 세상의 정보를 얻고자 밀출국했다"면서 "그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 사토우와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을 하였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그 조선인은 여기 첨부된 자료들 외에도 조선의 개화당에 대해서도 다량의 정보를 털어 놓았다"면서 "앞으로도 계속 정보를 제공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또한 조선과 중국 간에는 우호관계가 존재하고 있고, 일본인의 존재는 조선인들에게 불가피한 악(unavoidable evil)으로 치부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 등장하는 '어떤 조선인'은 물론 이동인 스님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만일의 보안 사고를 염려했음인지 실명을 적지 않고 있군요. 아무튼 보고서의 내용은 전적으로 이동인이 제공한 자료와 정보인 셈입니다.

창나라 이홍장과 조선의 이유원 사이에 오고간 왕복 서한은 주로 대외관계에 대한 의견과 입장에 대한 것으로서 국가 기밀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불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일본에 있는 이동인의 손에 국가기밀 문서가 들어갔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자료를 무슨 목적으로 이동인에게 어떻게 전해주었을까?

약간의 추리력으로 미스터리를 풀어볼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경로를 이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료를 입수한 김옥균이 그걸 탁정식(무불無不스님)에게 주었고 탁정식이 이동인에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무불스님은 강원도 청담사 출신인데 어느 날 서울의 화계사에서 김옥균과 만나 의기투합한 인물입니다. 김옥균이 1880년 5월 탁정식을 동경의 이동인에게 밀파하였습니다. 탁정식과 이동인은 같은 개화당의 동지로서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이입니다. 동경에 도착한 탁정식은 이동인의 숙소에서 같이 지냈습니다(사토우의 일기).

이동인의 일본 밀항을 위한 여비를 댔던 김옥균이 새로이 탁정식을 일본에 보낸 것입니다. 탁정식의 밀항을 위해서 일본 승려들도 협조하였을 것입니다. 김옥균은 탁정식 편에 이동인에게 전할 많은 정보와 자료를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거기에 이홍장과 이유원의 왕복 서신 사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왜 이런 기밀 문서를 김옥균과 이동인이 공유해야 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김옥균이 매우 일찍부터 정보망을 가동했다는 단서가 있습니다. 김옥균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벌써 1874년에 왕비의 측근 궁녀였던 모씨로부터 비밀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42세로서 고대수顧大嫂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신체가 우람하였고 남자 이상으로 힘이 셌다고 합니다.

아마 민왕후의 경호실장격이 아니었나 싶군요. 김옥균은 궁녀뿐 아니라 정부 고관, 사대부, 중인, 승려 및 일본인들을 포괄하는 폭넓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고 1880년에 이르러서는 이동인과 탁정식을 통해서 활동범위를 서양에까지 넓히고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죠.

나 조지 포크가 1884년 봄에 한양에 부임했을 때 김옥균,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수시로 찾아와 조선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도 해주고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왔습니다. 그들은 훗날 갑신정변이라 일컬어질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흉금을 터놓고 한국말로 소통하였습니다.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었고 머지않아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어렵지 않게 내다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그들의 거사 계획이 성급하고 위험하다고 여겨 만류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제출한 뒤 1880년 늦가을에  조선의 남부 지역으로 장기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갑신정변 발발 소식을 듣고 무척 당황했고 위험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난리 통에 서울 나의 집에 있던 물건들도 많이 없어져 버렸구요.

나의 보고서에 담긴 내용과 예측이 결과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드러나자 미국정부에서 우수 보고서로 평가하여 출판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비밀 외교문서를 부주의하게 공개해 버린 거지요. 그 사건으로 나는 청나라와 조선의 친청 사대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조선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고 보니, 나의 기구한 운명은 조선의 개화당과 엮여 있었던 셈이군요.

그 문제의 문건이 지금 미국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을 겁니다. 나중에 찾아보기로 하죠. 이야기가 좀 옆길로 샜군요.

아무튼 김옥균 등은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최소한 10여년 전부터 조선의 봉건체제를 일대 혁신하려는 생각을 품고 움직이고 있었으며 1880년 이동인의 일본 밀행으로 활동 범위가 일본은 물론 영국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죠. 그들이 애초부터 일본의 사주나 조정을 받아 활동한 것이라는 견해는 이제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한편 1880년 5월 도쿄의 이동인과 접속한 탁정식은 이동인의 소개로 사토우를 만나게 되고 그 인연으로 나중에 고베 주재 아스턴 영국 영사의 한글 선생이 됩니다. 아스턴은 훗날 초대 조선 주재 총영사로 부임하게 될 거구요. 

한편 이동인은 탁정식 편으로 본국의 김옥균에게 전할 정보를 알려주었고 수집한 물품을 또한 전했습니다. 물품 품목은 시계, 성냥, 소형 망원경, 옥양목, 서양 문물 사진(일부는 사토우가 제공) 등이었지요. 이 중에 성냥은 최초로 조선에 소개된 것이고 아마도 망원경이나 서양 문물 사진 자료도 최초였을 겁니다. 그런 물건과 자료를 탁정식이 조선으로 들여간 것은 1880년 6월이었습니다.

이제 보고서에 첨부된 사토우 문건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이동인, #조지 포크, #김옥균, #사토우, #탁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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