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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6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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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바겐(grand bargain).

대권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한일관계 핵심 인식이다. 그는 지난 6월 29일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윤봉길 기념관)에서 대선 도전 연설문 낭독 이후 기자회견에서 이 개념을 제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윤 전 총장의 상당수 대답이 두루뭉술했던 것과 비교하면, 한일관계에 대한 답변은 꽤 구체적이면서도 강도가 높았다. 

"죽창가 부르다가 여기까지... 한일 현안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랜드 바겐"

윤석열 전 총장은 "지금 한일관계가 사상 최악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악화돼 있는데, 이런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는 NHK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지금 한일관계는 국민 여러분께서 다 아시겠지만 수교 이후에 관계가 가장 열악해지고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관계가 망가졌다"라고 전제한 뒤 양국 관계의 기본원칙과 세부 방안을 설명했다.

먼저, 기본원칙이다. 그는 "외교는 실용주의·실사구시·현실주의에 입각해야 하는데, 이념 편향적인 죽창가를 부르다가 지금 여기까지 왔다"며 "(문재인) 정부가 정권 말기에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하는데, 이제는 잘되지 않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이후 윤 전 총장은 '상식'을 거론했다. "저는 상식에 비춰 보더라도 한일관계에서는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우리 후대가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진상을 명확히 해야 하는 면도 있지만, 또 미래에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 실용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는 것. 이어 그는 '그랜드 바겐'이란 개념을 끄집어 냈다.

"이 정부 들어와서 망가진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이런 것들과 한일간의 안보협력이라든가 경제·무역 문제 이런 현안들을 전부 다 같이 하나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랜드 바겐을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하고, 한미관계처럼 한일관계도 국방·외무 또는 경제로 해서, '투 플러스 투'나 '쓰리 플러스 쓰리'의 정기적인 정부 당국자 간의 소통이 향후의 관계를 회복하고 풀어나가는 데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9일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대선출마 선언에 앞서 자리에 앉아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6월 29일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대선출마 선언에 앞서 자리에 앉아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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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및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이 나오는 것을 두고 '잘됐다'고 하지 않고 '망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 정부나 극우세력의 견해와 궤가 같다. 윤 전 총장의 역사인식이 위험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윤 전 총장의 해법은 '식민지배 문제 때문에 한일관계가 꼬이고 다른 분야까지 함께 흔들리고 있으니, 모든 문제를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일괄 타결하는 그랜드 바겐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이 방식을 통해 쌍방이 조금씩 양보하면 한일관계를 풀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게 그의 생각이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탄생 원인... 일괄 타결식 접근

윤석열 전 총장이 제안한 방식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외교정책으로 등장한 시점은 5.16 쿠데타 이후다. 과거사 문제와 경제 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방식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 제1차 본회담이 열린 뒤로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렀던 한일회담에 탄력을 불어넣는 원인이 됐다. 그 결과로 도출된 게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협정(청구권협정 등) 체결이다.

박정희 정권이 그랜드 바겐 방식을 채택하기 전부터 일본은 과거사와 경제 문제를 연관시켰다. 이 방식은 한국보다는 일본이 선호하던 것이었다. 2008년 <동북아 역사논총> 제22호에 실린 이현진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의 논문 '한일회담과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방식'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은 한국과의 청구권 회의 동안 한일간 경제협조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며 한일간의 경제교류가 조속히 이뤄지기를 희망했는데, 이는 청구권 문제를 경제협력 방식으로 타결하려는 계획 하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일 경제협조와 대일청구권은 별도로 해결돼야 하며, 대일청구권 등 현안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후에 한일 경제협조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일괄 타결을 선호한 것은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꺼렸기 때문이다. 경제협력을 함께 논의함으로써 식민지배 문제를 얼버무리고자 했다. 진정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마음이 있었다면, 과거사 문제부터 정리한 뒤 경제협력 문제를 꺼냈을 법하다. 굳이 그랜드 바겐을 원한 것은 한국에 사과하고 배상한다는 모양새를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김종필이 공항에서 들은 비판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62.10.20)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62.10.20)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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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들은 그런 식의 해법을 거부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을 사과·배상을 논의해야 할 자리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을 경제협력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일괄 타결 불가'가 1950, 1960년대 한국 국민들의 일반적 정서였기에 박정희 이전의 정부는 이런 방식을 시도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그랜드 바겐을 관철시켰고,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식민지배 문제를 사실상 포기하는 선에서 약간의 경제협력으로 한일관계를 봉합하는 식으로 처리된 것이다. 두 문제에서 쌍방이 조금씩 양보하는 식으로 해결되지 않고,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의 민족적 이익이 무시되는 방향으로 문제가 봉합된 것이다.

그 덕분에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해 한 마디의 사과와 배상 없이 약간의 지원금을 주는 방법으로 한일관계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덤으로, 한국을 종속적인 경제 시스템으로 끌어들이는 성과까지 거뒀다. 박정희 정부와 지지 세력은 민족적 자존심보다는 경제적 이익이 중요하다고 봤지만, 1965년 조약 및 협정은 일본의 민족적 자존심을 세워주는 쪽으로 귀결됐다.

당시의 국민들은 그랜드 바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국민들은 한일회담을 이끈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김종필은 '제2의 이완용'이라고 불렸다. 1964년 3월 28일 치 <경향신문> 기사 '어수선한 공항, 김종필씨 오는 날'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낮 12시 10분경 서울 영등포공고생 7백 80명도 '누구를 위한 정치냐' '제2의 이완용을 추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서 김포 가도에서 시위한 후 시내로 향했다.
 
말로만 그랜드 바겐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논의한 것은 경제협력에 불과했다. 식민지배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김종필은 위안부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에서 그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지만 한일회담에서 거론되지 않았다"며 "위안부는 단 한번도 의제가 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일괄 타결을 한다고 해놓고 핵심 문제들을 빠트렸던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박정희 정부 자체에 대해서도 명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거국적 저항을 일으켰다. 1964년 6월 3일의 전국적 시위에서는 '박정희 하야' 구호도 등장했다. 박정희는 계엄령 발포로 강압적으로 상황을 억눌렀다.

불안의 씨앗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을 당시 작성된"김-오히라 메모"원본.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을 당시 작성된"김-오히라 메모"원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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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태에서 1965년에 국교가 체결됐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불안하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한일관계가 불안정한 것은 바로 그 '그랜드 바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괄 타결이라는 미명 하에 핵심 문제들을 미해결 상태로 방치했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더욱 혼란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강제징용 판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 정부가 '이미 1965년에 해결됐다'고 말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과거사 문제를 희생시켰을지라도 그 덕분에 경제협력을 받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랜드 바겐 덕분에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얻은 쪽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채무 부담을 덜어주는 대신에 일본이 한국에 경제협력 자금을 제공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협력이 감소하는 대신에 일본이 한국에 경협 자금을 제공하는 일이 당시의 한미일 사이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논문 '한일회담과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방식'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후(戰後)처리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GARIOA(점령지 구제기금) 원조 및 EROA(점령지 경제부흥자금) 원조에 대한 대미 채무변제를 끈질기게 요구했으며, 대미 채무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는 일본이 동아시아에 대한 경제원조의 방식을 통해 일부를 변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됐다. 결국 이 과정은 청구권 처리에 있어서 일본 정부가 경제협력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주요 계기가 됐다.

윤석열 전 총장이 높이 평가한 그랜드 바겐 방식은 박정희 정부와 일본 집권세력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국민적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가 수십년 누적되다 발생한 것이 2018년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과 2019년 일본의 경제보복이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그랜드 바겐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1965년에 그랜드 바겐을 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랜드 바겐을 시도하자는 윤석열의 주장은 한일관계를 한층 더 위험에 빠트리는 발언이다. 윤봉길 의사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장소에서 언급할 만한 방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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