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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성격은 매우 복합적이다. 국지전과 국제전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도 보인다. 그리고 전선의 이동 형태를 보면 전형적인 '톱질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준다. 톱질 전쟁이란, 톱날을 왔다갔다 하듯이 전선이 밀고 밀리면서 점령과 수복을 반복하는 전쟁 형태를 말한다.

한국 전쟁의 전선은 상대방 세력의 거의 최말단까지 서로 오가는 양상을 보였다. 한반도의 좁은 지형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매우 극단적인 톱질 형태다. 이렇게 전선이 이동하게 되면 전후방의 개념이 사라지고 결국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 청주는 이런 톱질 전쟁에 의한 민간인 희생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첫 번째 톱질, 군경에 의한 학살
  
  당산공원 바로 맞은편으로 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 청주형무소 옛터  당산공원 바로 맞은편으로 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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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청주형무소의 재소자 수용 정원은 500여 명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여순사건 관련자 등 여러 정치범들이 들어오면서 1600여 명까지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청주형무소는 1950년 6월 28일부터 비상근무에 돌입한다.

이 비상근무 지침에는 '전 직원이 생사를 같이 하면서 형무소장과 서무과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정문을 나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때문에 면회는 물론 만기출소자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에 재소자 가족들이 몰려와 항의하자 7월 1일부터는 아예 형무소 앞 통행마저 금지시킨다. 그런데, 출입이 통제된 내부에서는 재소자에 대한 '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6월 29일 충청지역 위수사령관이었던 2사단장이 형무소로 찾아왔다. 그리고 재소자 처리는 군의 지휘를 따르라고 명령하며 정치범 재소자의 인도를 요구한다. 이에 따라 6월 30일 자정께 육군방첩대(CIC)와 경찰들은 여순사건으로 복역 중인 재소자 36명을 트럭에 태웠다. 그리고 이들을 남일면의 화당교 아래 개울가로 데려가 총살한다. 하지만 동네와 너무 가까워 다음부터는 학살 장소를 바꾼다.

이후 남일면 쌍수리와 고은리 분터골, 낭성면 도장골, 가덕면 공원묘지 등에서 본격적인 재소자 학살이 진행됐다. 이 학살은 7월 2일부터 5일까지 자행됐는데, 희생자는 800여 명이었다. 단 나흘 만에 재소자 전체 인원 중 절반을 정리한 것이다.

군경의 민간인 학살은 재소자에 이어 보도연맹원으로 이어진다. 정부의 보도연맹원 검거 및 처리 명령에 따라 충북경찰서는 검거를 독려하기 위한 독찰반을 설치한다.

그리고 청주경찰서는 보도연맹원들에게 피난을 시켜주겠다며 양식과 용돈, 옷가지 등을 챙겨서 집합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렇게 7월 5일에 보도연맹 사무실로 모인 인원들은 400여 명이었다. 하지만, 트럭 10여 대에 나눠 타고 이들이 향한 곳은 피난지가 아니라 청주 형무소였다. 그리고 7월 6일과 7일, 군경은 이들을 앞서 재소자들이 희생됐던 분터골로 끌고 가 학살한다.

청주지역에서 군경이 학살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은 1200여 명이었다. 그런데  학살 기간은 7월 2일부터 7일까지, 불과 6일 남짓이었다. 매일 평균 200여 명씩 죽인 것이다.

두 번째 톱질, 인민군에 의한 학살과 납치
 
  현재는 전원 주택 단지를 위한 택지 조성 작업 중이다.
▲ 분터골  현재는 전원 주택 단지를 위한 택지 조성 작업 중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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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다리 아래 개울가에서 첫 번째 재소자 학살이 일어났다.
▲ 현재의 화당교  이 다리 아래 개울가에서 첫 번째 재소자 학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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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3일, 인민군은 청주 지역을 점령한다. 그리고 9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지역 내 민간인들을 꾸준히 처형한다. 이는 당에서 명령을 받은 지역 정치보위부가 다시 내무서에 지시해 이뤄졌다. 학살의 집행자는 인민군과 내무서원 그리고 빨치산 등이었다. 희생자들은 군경과 정치 및 종교 운동가, 공무원, 미군 등이었다.

가장 많은 희생이 발생한 시기는 다시 전선이 밀리던 9월 말이었다. 이때는 한국군이 보은까지 올라왔다는 소식에 인민군이 다급히 퇴각을 준비하던 때였다. 퇴각 직전인 9월 24일, 인민군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들을 형무소 바로 뒤에 있는 당산으로 끌고 가 학살한다.

목격자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대부분 둔기로 머리를 맞고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많은 시신이 땅에 묻힌 채 얼굴만 내놓은 모습이었는데, 이는 산 사람을 땅에 묻은 뒤 머리를 내리쳐 죽인 것이다.
  
  이 공원이 있는 당산에서 인민군의 재소자 학살이 일어났다.
▲ 당산공원  이 공원이 있는 당산에서 인민군의 재소자 학살이 일어났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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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은 당산에서 학살 직후 형무소에 불을 지른다. 당시 형무소는 신축 건물 일부와 취사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목조 건물이었기에 불은 삽시간에 번졌다. 그나마 목조 건물인 덕분에 많은 재소자들이 문과 벽을 부수고 탈출했지만 일부는 그러지 못했다.

같은날 밤, 인민군과 내무서원들은 청주내무서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을 무심천으로 끌고 갔다. 이 과정에서 도주를 막기 위해 옷을 모두 벗기고 양팔은 뒤로 묶었다. 그리고 미군 폭격으로 만들어진 구덩이에 앉힌 다음 머리에 총을 쐈다. 현재는 청주대교로 인해 인도로 변한 서문대교 동남쪽 방향 아래 무심천 인근이 사건 장소다.

1952년 충북경찰국이 내무부를 거쳐 미8군 전범조사과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인민군이 학살한 재소자는 총 234명이었다. 이 중 220명은 당산에서 희생됐고, 14명은 형무소 방화로 인한 희생자였다. 그리고 방화 당시 탈출한 인원은 200여 명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나마 어느 정도 확인된 인원들로 실제 희생자 규모는 더 클 것이다.

또한 같은 보고서에 무심천에서 희생된 사람은 120명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된 인원이 320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제 희생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현재 당산 공원 앞 명장사 위치에 있었던 정치보위보 지하에는 150여 명이 감금돼 있었다. 이들은 인근 산성리 토굴로 끌려가 희생됐는데 최소 95명 이상이었다.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이런 학살뿐 아니었다. 당시 인민군은 정렴 지역에 '전시동원령'을 내렸다. 여기에는 점령지역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치안 담당 인원과 노무 인력 동원과 함께 의용군 모집이 포함됐다.

의용군은 보통 대규모 집회를 통해 모집했다. 의용군은 일부 첩보요원 등이 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간단한 신체검사를 거쳐 보충병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처음 의용군 모집은 자발적 지원 방식이었다. 청주 지역에서는 7월부터 9월 중순까지 여덟아홉 차례에 걸친 의용군 모집이 있었다.

하지만 지원자가 부족해 목표 인원을 달성하지 못하자 점차 강제성을 보이게 됐다. 그러다가 8월 초부터는 '도망 방지' 요원까지 두면서 사실상 납치와 다름없는 징집이 이뤄졌다.

이런 의용군의 규모는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휴전 회담 당시 그 신분의 모호함 때문에 포로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선택을 강요받으며 고통받는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법
 
  건너편 강변이 학살 장소이다.
▲ 서문대교에서 내려다 본 무심천  건너편 강변이 학살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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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퇴각 후 한국군이 수복한 지역에서는 부역 혐의자 처형이라는 세 번째 톱질이 있었다. 하지만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들 중에는 많은 경우 식사와 청소 등 보조적인 역할이나 인민군의 강제 동원으로 어쩔 수 없었던 이들이 상당수였다. 또한 완전 무고한 이들도 있었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검증 절차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한국 전쟁 중 ①한국군 퇴각 ②인민군 점령 ③한국군 수복을 거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사하고 일관되게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민간인의 피해는 엄청났다. 실제로 한국 전쟁 이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남한의 인적 피해 중 군인은 98만7000명이다(사망 14만7000명, 부상 70만9000명, 행방불명 13만1000명). 그리고 민간인 피해는 47만3000명이다(사망 24만4000명, 부상 22만9000명).

북한은 자신들의 인적 피해를 군인 61만 명(사망 29만4000명, 부상 22만5000명, 행방불명 9만1000명), 민간인 268만 명(사망 40만6000명, 부상 159만4000명, 행방불명 68만 명)으로 발표했었다.

여기서 남북한 사망자를 보면 군인은 44만여 명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민간인 사망자는 65만여 명으로 규모가 훨씬 크다. 이는 전선이 이동하며 전후방의 개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남북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만큼 우리는 전쟁에 둔감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전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외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전쟁의 역사와 아픔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적개심을 고취하며 전쟁 불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중 무수히 희생된 무고한 생명을 기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전쟁의 비극이 다시 이 땅에 재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각각 인민군과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전쟁은 결국 모든 민간인의 극심한 희생을 담보해야 한다.
▲ 당산공원의 반공유적비(좌)와 도장골의 학살 장소 표지판(우)  각각 인민군과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전쟁은 결국 모든 민간인의 극심한 희생을 담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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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윤성준(2019), <한국전쟁기 북한의 점령정책과 조선인민의용군의 동원>, 한국근현대사연구, 89(1): 173-203
진실화해위원회, <청주지역 신교식 등 8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및 강제연행(납치)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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