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눈
 눈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한 번쯤은 '에스키모 말에는 내리는 눈, 단단한 눈, 밟으면 미끄러지는 눈 등을 가리키는 단어가 다 달라서 수십 개나 된대'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에스키모라는 말은 멸칭이고 이누이트라고 불러야 한대'라는 말도 팩트체크 대상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북극 근처 원주민들 중에는 이누이트 말고 유픽, 알류트 등 다른 원주민들도 있고 이누이트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하는 동네도 있다. 또한 다른 이름을 쓰는 동네도 있고 매우 다양하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이름을 쓰는지 물어보고 확인하는 것이 낫다. 무작정 이누이트라고 불렀다가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에스키모 말'이라는 것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에스키모 말이 이렇다더라'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흐리멍텅한 말이다. '동북아 말에 성조가 있다며?'라는 질문에 '예'나 '아니오'로 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북아 말'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질문 자체가 틀렸어. 중국어에 성조가 있냐고 물으면 맞지. 하지만 동북아에 있는 다른 언어, 한국어나 일본어에는 성조가 없어'라고 길게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틀린 질문에는 짧게 답할 수 없다.

'눈' 관련 단어가 많은 건 사실, 하지만

그렇다면 일단 '이누이트 말'이라고 문장을 바꿔보자. '이누이트말에는 눈 단어가 수십 개가 있대.' 이누이트말 외에도, 핀란드말, 사미말에도 각각 눈 단어가 수십개라는 소문이 있다. 정말일까? 

결론만 말하면 일단은 거짓이다. 이 '도시괴담'은 1970~1980년대에 미국의 작가가 50개로 뻥튀기하고 뉴욕타임즈의 한 칼럼('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꼭 따라붙는 외부 원고)에서 100개로 부풀린 뒤, 전세계로 신나게 퍼져나갔다.

비유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영어권의 언어학자가 한국어를 대충 배우고 나서 의기양양하게 이런 발표를 했다고 하자. '한국어에는 do에 해당하는 단어가 수십 개나 된다. 하다-한다-했다-한-할-하는-하고-해서-하니까-했고-하므로.'

한국어 사용자가 보면 이게 무슨 헛소리냐 싶을 것이다. 어근은 '하다' 하나인데 변형되어 뜻이 첨가되는 것 뿐이니까. 눈 이름 괴담도 이와 비슷하다. 여러 접미사가 붙은 형태들을 죄다 다른 단어라고 손꼽아 세기 시작하면 거의 무한히 늘어난다.

이누이트말, 핀란드말, 사미말은 문법적으로 굴절어 또는 교착어 또는 종합어의 성격이 강해 상대적으로 고립어의 성격이 강한 영어의 사용자들이 보면 '우와~ 단어 많다!'라고 하겠지만, 그 '단어'라는 것도 사실 영어(고립어)의 편협한 관점에서 나온 개념일 수 있다.

눈에 해당하는 단어가 수십 개라는 말은 그럼 단순히 괴담일 뿐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한국어 '눈'이나 영어 'snow'보다 많긴 많다.

이누이트어의 'qaniɣ'는 떨어지는 눈, 'aniɣu'는 떨어진 눈, 'apun'은 땅 위의 눈을 가리키는 각각 다른 단어다(지역 방언마다 좀 다르지만). 눈에서 파생된 단어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다. 한국어에서도 딱 '눈'만 있는 게 아니라, 눈보라, 진눈깨비, 눈꽃 등등의 파생어가 있고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서리, 살얼음, 상고대처럼 눈이나 얼음과 관련된 단어들이 더 많이 있다. 

​게다가 하다-하는-해서-하고-했다, 처럼 교착 또는 종합된 단어들까지 하면 사실상 무한하다. 예를 들어, 누나비크어(Nunavik)의 '바다 얼음' 관련 단어는 무려 93개가 있다고 조사됐다.

qautsaulittuq는 '작살로 강도를 확인한 뒤에 깨지는 얼음', kiviniq는 '밀물 중에 몰려들고 쌓인 물의 무게 때문에 초래된 해변 얼음의 내려앉음', iniruvik는 '조수 변화 때문에 갈라지고 추위 때문에 다시 얼은 얼음'이라는 뜻이다. 짧은 단어에 매우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어 함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착어와 종합어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핀란드어 역시 매우 함축적인데, 예를 들어 'Grace Kolarista Sairaalaan'은 '그레이스 공주가 사고 직후 병원으로 바로 이송되었다'이라는 뜻이다. 교착어라 파생되는 단어가 무수한 데다가, 핀란드 역시 눈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핀란드어에도 눈이나 눈 관련 단어가 매우 많다. 진눈깨비, 눈보라, 서리, 고드름 수준으로 범위를 넓게 잡으면 수십 개는 충분히 된다.

결론: '이누이트어, 핀란드어에 눈 관련 단어가 수십 개다'라고 하면 대체로 맞다. 그런데 단어들이 딱 떨어지는 단어들이 아니라 형태소들이 자유자재로 뭉쳤다 떨어지는 단어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덧붙이는 글 | 어찌나 '에스키모말에 눈 단어가 수십 개이고, A말에는 B단어가 수십 개이다'라는 진부한 표현이 남용되었는지, 'snowclone'는 '언론의 상투적 표현'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시) '에스키모말에 눈을 일컫는 단어가 수십 개라면, 독일어에는 관료제를 일컫는 단어가 수십 개다.'(독일은 모든 것이 관료적이고 독일 사람들이 늘상 관료제에 대해 생각한다는 냉소적인 비꼼 표현) 혹은 '에스키모 말에 눈 단어가 수십 개라면, 현대 미국에는 당황스럽다는 다양한 표현이 거의 무한대로 존재한다.'(당황스럽다는 말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쓴다는 뜻)


태그:#이누이트어, #핀란드어, #에스키모, #도시괴담, #SNOWCLONE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