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라는 별명만큼이나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통영 탈환의 주역이었던 해병대의 상륙작전에 대한 전적비가 있다. 또한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에 참전한 통영 출신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도 있다.

하지만, 통영 역시 수많은 민간인들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깨끗하게 사라져 잊히고 있다.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 통영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1950년 7월 25일께, 인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후 경상도로 진격한다. 7월 30일, 인민군은 진주를 점령하고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8월 16일에는 경남 고성을 점령하고 통영으로 진입했다. 8월 17일에는 도서 지역을 제외하고 통영 북부와 읍내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통영경찰서는 이미 거제도로 후퇴한 상태였다.

같은 날, 인민군을 막기 위해 거제에는 대대 규모의 해병대가 상륙했다. 먼저 해병대 정찰대 2개 조가 통영 용남면 해안에 침투한다. 뒤이어 본대가 상륙했고, 19일 오전에는 통영 읍내를 탈환한다. 하지만 9월 15일까지도 광도면과 도산면 등 통영 북부 지역은 완전히 수복하지 못하고 대치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약 한 달 동안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의 눈치를 봐야 하는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시국강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극장에 모인 사람들
  
  폐업 후 철거되어 현재는 공터가 되었다.
▲ 옛 봉래극장 터  폐업 후 철거되어 현재는 공터가 되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2층에 있던 극장에 약 200여 명이 가득차 있었다.
▲ 옛 통영극장 자리  2층에 있던 극장에 약 200여 명이 가득차 있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전쟁 이전부터 보도연맹원들은 수시로 소집을 당했다. 각종 작업과 훈련, 강연 등의 명목이었는데, 소집에 늦으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코앞에 다가오자 통영경찰서와 해군, 헌병대는 통영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한다.

7월 25일, 도천동, 태평동, 항남동 등지의 보도연맹원들은 당시 통영경찰서 건너편에 있던 봉래 극장으로 모인다. 그리고 다른 연맹원들은 통영 극장으로 소집됐다.

그런데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보도연맹원만이 아니었다. 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모인 일반 학생이나 시민들도 상당수였다. 당시 통영 극장 안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그날 자정 경 통영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서 유치장에는 통영 전역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들로 가득했다. 감금된 사람들의 가족들은 면회를 요구했고, 갇힌 사람을 빼내기 위해 뇌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한 가족은 30만 원을 주면 석방이 가능하다는 말에 급히 돈을 준비해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이미 희생된 후였다.

경찰들은 감금된 사람들을 분류한 후 다시 트럭에 태워 광도면의 무지기 고개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대여섯 개의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경찰들은 한 구덩이에 50여 명씩 몰아넣고 총을 쐈다. 증언에 따르면 이 총살은 며칠간 계속됐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7월 26일과 27일 이틀뿐이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무지기 고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급히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경찰들이 사격을 가하며 쫓아냈기에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무지기 고개에서 살해된 사람들은 110~250명이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들은 여기뿐 아니라 일부 인원들을 배에 태워 인근 바다에 수장했다. 그래서 당시 가덕도 부근 바다에서 끈에 묶인 시신이 여럿 떠다니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또한, 남망산 조각 공원에서도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인근 고성 지역으로 끌려가 죽은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보도연맹원에는 우익단체 간부인 국민회 통영 지부장인 박세홍도 있었다. 그리고 부지부장인 김철호도 있었는데 그는 인근 바다에 수장됐다.

이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은 회원 확보에 대한 실적 압박 때문에 경찰의 협조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통영뿐 아니라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양상이었다.
  
  아스콘 공장 뒷 편이 학살 현장이다.
▲ 무지기 고개  아스콘 공장 뒷 편이 학살 현장이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전쟁, 정적 제거의 좋은 기회

군은 보도연맹원 외에도 좌익 혐의자들을 체포해 항남동의 멸치 창고에 감금했다. 이 과정에서 헌병대는 '이승만 앞잡이를 잡아라!'라고 외치며 적군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국군은 후퇴하기 직전인 8월 16일경, 일부 인원은 풀어주고 나머지는 한산도 앞바다에 수장했다. 당시 통영 헌병대 수석 문관으로 근무했던 증언자에 따르면, 바다에서 48명을 총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 야산에서도 총살이 있었다.
 
  통영 인근 바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었다.
▲ 한산도로 가는 뱃길  통영 인근 바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이때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대한청년단 통영 군부 부단장 등 우익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철호와 김기택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김철호는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등 항일 활동에 참가했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의 경남지구 조사관으로 일했다. 김기택은 통영 공립 수산 중학교 교장이었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이나 친일파 반대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당시 경찰이나 군에는 친일 행적이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전쟁을 틈타 자신들의 반대 세력에게 좌익 혐의를 씌워 처리한 것이다.

통영사연구회 박형균 회장에 따르면 이는 '독립운동과 친일파 반대활동을 했던 인사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친일파들에 의해 제거되는 과정'이었다. 이런 일은 통영뿐 아니라 청주 도장골을 비롯해 전국에서 유사하게 일어났다. 이처럼 어떤 이들에게 전쟁은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수복 이후 다시 열린 멸치 창고

8월 17일 인민군이 통영 읍내를 점령했지만, 국군은 8월 19일에 다시 탈환한다. 인민군이 통영 읍내를 점령했던 시기는 불과 이틀 정도였다. 하지만, 군은 그 기간 동안 인민군에게 협조한 부역자 색출에 나선다. 그리고 헌병대는 항남동 멸치 창고를 다시 열었고, 체포한 이들을 여기에 감금했다.

부역 혐의로 지목된 사람들은 대부분 인민군의 협박 때문에 밥을 운반하거나 곡식과 재산을 빼앗긴 이들이었다. 그리고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군청 직원과 우익 인사들도 포함됐다.

통영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사람들도 멸치 창고로 이송됐다. 당시 경찰관들은 헌병대로 이송하면서 사람들을 향해 '푸른 동산에 가서 고이 잠들어라'며 조롱했다고 한다.

멸치 창고는 'ㄷ'자 형태였으며, 창고 벽에는 생선에 크게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도마 위에 놓인 고기떼들'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갇힌 사람들이 있었다. 무더위 속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앉은 창고는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창문으로 갇힌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역 혐의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데, 혐의를 부인하면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며칠에 한번씩 새벽 1시께가 되면 군인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깨웠다. 그리고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호명해서 데리고 나갔다. 끌려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붉은색으로 '이적'이라고 쓰인 멸치 포대를 씌우고 손은 뒤로 묶었다.

불려 나가는 사람은 한 번에 30명에서 36명 정도였다. 이들은 한산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는데, 증언자들은 그 수가 15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명정동 뒷산 절골이라는 곳에서 희생되었다. 이런 민간인 학살은 9월 말까지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현재는 호텔이 세워져 있다.
▲ 당시 항남동 멸치창고  수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현재는 호텔이 세워져 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겨우 발견한 작은 흔적

통영 지역은 인근 섬을 포함해 곳곳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사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규모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민간인 학살에 대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다 겨우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무지기 고개에 들어선 아스콘 공장 앞 버스 정류장 화단에 세워진 작은 원혼비(冤魂碑)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지 못할 정도로 작은 크기에 어떠한 장식이나 설명도 없었다.

국군의 기념비와 비교하면 몹시도 초라하다. 이렇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한 그 모습은 마치 지난 수십 년간 억울한 죽음을 말할 수 없었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얼핏 보면 찾기 힘들 정도로 작고 초라하다.
▲ 무지기 고개의 원혼비  얼핏 보면 찾기 힘들 정도로 작고 초라하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참고 자료]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부산 경남 지역>, 역사비평사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진실화해위원회, < 경남 통영ᆞ거제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희생 사건>
전갑생 (2005),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역사와경계, 56, 23-53
한성훈, <가면권련, 한국전쟁과 학살>

덧붙이는 글 | 현장답사는 지난 6월 초에 이뤄졌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