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불갑산 유해
 불갑산 유해
ⓒ 진실화해위원회

관련사진보기

 
전남 장성군 삼서면 여맹위원장 김묘신(가명, 1927년생)은 맹원들과 함께 죽기 살기로 뛰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알은 마치 비 오듯 했다. 비명을 질렀다가는 정조준의 대상이 되기에 묵묵히 뛸 뿐이었다. 사람이 총알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총알이 사람을 피해 가는 상황이었다.

불갑산 주둔지인 용천사에서 삼서면 방향으로 무작정 뛰는데, 모두 메뚜기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산과 개울에 온통 시신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흙바닥에 널려 있는 시신들은 대부분 여성과 노인, 아이였다. 김묘신의 증언이다.

"불갑산은 너무 했어요. 한 발도 그냥 못 걸어요. 애기, 노인. 노인이 제일 많이 죽지요. 애기들하고. 애기가 죽을 때는 엄마가 죽지요. 엄마가 죽으니까 애기가. 그러면 애기가 살아서 막 엄마를 부르고서 울지. 피투성이 속에서 엄마는 죽어서 뻗어있지. 요리 가면 할아버지, 저 가면 할머니. 그랬어요."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유해 발굴 보고서>)

녹사태에서 죽어 간 성악가

삼서면당 조직원들은 태청산에서 불갑산으로 이동한 지 3일만인 1951년 2월 20일 불벼락을 맞았다. 아기 울음소리와 빨래처럼 널린 시신을 뒤로 하고, 김묘신이 찾아간 곳은 어머니가 피난 가 있던 전남 영광군 염산면 오동리였다.

김묘신의 외가였지만 그 마을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빨치산(?)을 숨겨 주었다가는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마을 뒤 밭에 땅굴을 파고 일주일을 지내다 동상에 걸렸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외가에서도 눈치를 줘, 진물이 흐르는 퉁퉁 부은 발을 이끌고 장성군 삼서면 당 조직이 있는 태청산으로 갔다.

"오빠!" 불갑산에서 헤어진 오빠 김윤신(가명, 1923년생)을 기적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오빠는 "아무데나 배겨 있을 것이지 무엇 때문에 다시 찾아왔냐"고 힐책했다. 여동생의 안전을 걱정하는 오빠의 애절한 모습이었다.

태청산은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군경의 공세가 시작되자 삼서면당은 장성군 삼서면 석마리 녹사태 마을로 이동했다. 녹사태는 부촌이기에 식량도 확보할 요량으로 간 것이다. 김묘신이 다리를 절룩이며 녹사태 마을에 도착한 것은 1951년 3월 23일 새벽이었다.

"인민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빨치산이오. 밥 좀 지어 주시오"라는 빨치산의 요청에 주민들은 묵묵히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밥을 푸짐히 먹고 곤한 잠에 빠진 빨치산에게 청천벽력의 소리가 들렸다. '탕탕탕' 주민들의 신고로 출동한 토벌대의 총격 소리였다.

김묘신이 오빠의 손을 잡고 뛰려 했으나 김윤신은 여동생의 손을 뿌리쳤다.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마을 앞 개울을 뛰는데 눈에 전깃불이 튀었다. 그녀가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피로 물들은 팔과 진물이 흐르는 발로 야산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정지하는 듯했다. 오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음대를 나와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윤신이 토벌대의 총격에 저세상 사람이 됐다.

인도 지나 전쟁터에서 뛰어내린 조선인 청년

기차가 커브 길을 가느라 속도가 낮아질 때였다. "하나둘 셋" 김윤신이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탈출에 성공한 김윤신은 1944년 학병으로 끌려왔다. 이후 프랑스령 인도지나(베트남) 전선으로 되어 가던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학병에 끌려간 장남이 해방이 돼도 돌아오지 않아 가슴앓이하던 이미순(가명)은 꿈결에 아들 윤신이의 "어머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벌였다. 1946년 5월 8일이었다.

김윤신의 귀국이 늦어진 것은 베트남전선에서 탈출한 그가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천석꾼의 외동아들이었던 김윤신은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해 마을의 자랑이었다.

그는 학병에서 돌아와 보성전문으로 복학하지 않고 성악이 하고 싶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편입학했다. 졸업을 앞둔 그는 임시로 장성여고 음악 교사를 맡았다. 김윤신의 여동생 김묘신은 일제강점기에 아사히(旭)고등여학교(전남여고의 전신)를 졸업하고 장성군 삼서초등학교 분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녀는 이화여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다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전북 고창 출신의 양조장 집 아들과 결혼 날짜를 잡았다. 1950년 7월 14일이었다.

여동생 결혼식 준비 때문에 시골인 장성군 삼서면 대도리에 와 있던 김윤신은 그날 오후 전쟁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이다. 김묘신의 결혼식은 자동 연기되었고 두 남매의 삶은 이때부터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오빠는 선전부장, 여동생은 여맹위원장

"자네들은 대표적인 반동 집안이지만 특별히 배려해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했네"라며 김윤신의 친구이기도 한 삼서면당 위원장 나철주가 마치 큰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말했다.

"김윤신 동무를 (삼서면)당 선전부장에, 김묘신 동무를 (삼서면) 여맹위원장에 임명하오."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위원장 동무. 저 애는 결혼 날짜까지 받아 놓고 있으니, 나만 일하면 안 되겠소?" "안 되오." 김윤신의 건의에 삼서면당 위원장의 입장은 단호히 거절했다. 김윤신 남매는 본의 아니게 인공시절 완장을 차게 되었다.

사실 김윤신 남매는 일천석 지주 집안의 자녀로 오빠는 성악가로, 동생은 교사로 이념과는 상관없는 평이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삼서면에서는 그 남매만큼 요긴한(?) 인물은 없었다.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확성기로 당의 정책을 홍보하는 일에는 성악가 출신의 김윤신이 적임자였고, 학교 선생인 김묘신 또한 여맹위원장으로서는 적합한 이였다.

울며겨자먹기식 '완장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만 오지였던 장성군 삼서면은 군경의 수복시기가 다른 곳에 비해 늦었을 뿐이다. 1950년 12월 말 장성군 삼서면에 이웃한 태청산으로 입산했다. 산에 편안한 가옥이 준비되어 있을 리 만무다. 한겨울에 나무와 짚을 이용해 움막을 쳤다.

"요런 식으로 짚으로, 짚 엮어서 요렇게 해요. 그러고서 나무 모두 다 짤라 내켜 갖고, 인쟈 거시기로 마람 엮는다고 하지요? 지붕할려면 마람이라고 있잖아요. 그걸 엮어서 이렇게 둘러요. 그럼 바람이 조금 덜 들어오고, 조금 보온이 되지요. 그렇게 해 놓고 거기 가서 자는데 오죽이 춥고 오죽 헐 것인가요. 우선 안 죽을라니까 그리 피난 온 격이 되지요."

짐승도 살 수 없는 움막은 그나마 토벌이 시작되면 군경의 발에 걷어 차이고, 불에 태워지기가 일쑤였다. 낮에는 부서지고 밤에는 다시 움막을 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태청산은 은폐물이 적어 빨치산이 활동하기 부적합한 곳이었다. 토벌대가 본격적인 진압작전을 펼친다는 소문에 삼서면당은 '대보름작전' 3일 전인 1951년 2월 17일 불갑산으로 이동했다.

군 고위장교에 의해 석방된 여맹위원장

녹사태 사건이 있고 나서 며칠 지난 후 태청산에서 나철주(김묘신 증언) 삼서면당 위원장은 후일을 기약하며 당 조직의 해산을 선언했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묘신은 가족의 권유로 지서에 자수를 했다. 자수라고는 하지만 인공시절 면당 여맹위원장이라는 감투는 결코 적지 않은 죄(?)였기에, 그녀는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끽'하는 소리와 함께 군 장교가 삼서지서에 들어서자 지서장이 경례를 올렸다. "여기 김묘신양 있지요?", "네", "즉시 풀어 주시오", "네?" 전시에 군 장교의 요청은 감히 지서주임이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프차를 타고 온 군 장교가 고위직에 있는 상관의 명령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김묘신이 석방된 데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실은 사촌여동생 남편의 힘이 작용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인이었던 사촌제부는 해방 후 광주서중학교에서 배속장교를 하다가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당시 일부 장교들이 고속승진을 했듯이 김묘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6.25 당시 별까지 달았다.

그러니 인공시절 피난 가지 못한 사촌제부의 가족은 반동으로 처형대상 일순위였다. 사촌제부의 부모와 형수, 조카가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묘신의 사촌여동생인 그의 아내가 삼서분주소에 구금됐다.

김윤신과 김묘신은 사촌여동생의 구명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김묘신의 어머니 이미순은 매일 분주소로 밥을 해 날랐는데, 다행히 김묘신의 사촌여동생은 석방됐다. 이 일이 있은 지 약 약 6개월 만에 생명의 은인인 사촌언니 김묘신이 삼서지서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기의 남편에게 이야기해 김묘신을 석방시켰다. 김묘신의 사촌제부는 후일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냈다.

영원한 아웃사이더
 
유해발굴 표지석
 유해발굴 표지석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삼서지서에서 풀려난 후 김묘신은 도저히 고향에 있을 수 없어 광주로 나왔다. 어머니가 "니가 결혼을 해야 내가 죽어도 눈을 감겄다, 니 오래비 그래 두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이냐"라고 사정했다.

어머니 소원 들어준다는 기분으로 28세에 결혼했다. 자식이 둘 있는 남편이었다. 6.25 전에 학교 선생이었던 그녀가 도저히 생각할 수 있는 결혼 상대가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결혼 후 그녀의 삶은 '고립된 섬'이었다. 교편을 잡는다거나 직장생활을 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길거리를 걷거나 시장을 갈 때마다 '혹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나'라는 생각으로 머리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인공시절 삼서면 여맹위원장을 맡았다. 그녀의 오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군경수복 후에 태청산과 불갑산에 쫓기듯이 입산했고, 그 와중에 오빠는 토벌대의 총격에 사망했다. 그녀 역시 팔에 총상을 입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누군가를 해치지도 않았고, 관공서를 습격한 적도 없는 그녀에게 죄가 있을까. 있다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닐까.
 

태그:#녹사태, #태청산, #성악가, #여맹위원장, #선전부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