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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두 아이가 지난 13일에 2박 3일 일정으로 캠프를 갔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것인데 둘이 모두 중학생이기 때문에 함께 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근처에 사는 동생네에서 생활하시기로 하고, 나는 오래간만에 아내와 함께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차를 가져가지 않고 버스를 타고 갔는데, 피서 철이라 그런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인천에서 영월까지 가서 가까운 곳에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을 참배하고 바로 정선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도 나와 같이 아리랑의 고장인 정선을 한번 꼭 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방향을 정한 것입니다.

버스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가느냐고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함께 앉은 우리는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어린아이처럼 마구 재미있어 했습니다. 정선 터미널에 도착한 후 바로 화암동굴로 가는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아내가 그곳에서 민박을 하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전체가 다 그렇겠지만 공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숙박 장소를 정하고 우리는 밤공기를 쐬며 주위를 돌아다녔습니다. 무엇보다도 몇 년 만에 이렇게 아내와 단 둘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왔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아내는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먼저 화암동굴을 관람했습니다. 말만 웅장하다고 들었지 동굴 안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줄은 몰랐습니다. 밖은 더위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 안은 추워서 저절로 몸이 움츠려졌습니다. 일제 시대에 금을 채내는 금광이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관광지로 개발했는지 신기하기만 느껴졌습니다.

동굴을 한 바퀴 다 둘러보고 나서 근처에 있는 민속박물관을 관람한 뒤 우리는 다시 정선 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대부분의 지방이 그렇지만 그곳도 다니는 버스가 아주 뜸해서 기다리는 것이 무척 지루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터미널에서 아우라지 가는 버스 편을 살펴보고 너무 더워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에 가서 등나무 밑에 놓인 평상에 몸을 눕혔습니다. 덥지만 그늘진 그곳에 누우니 제법 바람이 불어와 무더위를 잠시라도 식혀주었습니다. 그냥 그곳에 오랫동안 누워있고 싶었지만 아리랑 처녀를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터미널로 돌아왔습니다.

가끔 신문과 방송에서 정선을 소개할 때에 가장 먼저 나오는 장면이 바로 아우라지 처녀상입니다. 그곳에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터미널에 비치된 많은 관광안내책자에도 가장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아우라지 처녀동상이었습니다. 아리랑의 전설이 서려있다고 소개되어 있어서 한시라도 빨리 그곳에 가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그곳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 30여 분 정도 가서 내렸습니다. 주위에 있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고 우리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기찻길도 나오고 강원도 특유의 풍성한 옥수수 밭도 보였습니다. 아우라지는 승강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그림 같은 강물이 참 반가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책자와 방송에서만 봤던 처녀상을 찾았습니다. 금방 눈에 띄지를 않아 고생을 했지만 오래지 않아 강 건너 산기슭에 그녀는 조그만 모습으로 서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선 먼저 나룻배를 타야했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노를 젓는 것이 아니고 강가 양쪽에 연결된 줄을 두 손으로 잡아당기며 승객들을 태워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밀짚모자를 멋있게 쓴 그는 아우라지 처녀에 대한 구슬픈 전설을 우리에게 들려주웠습니다.

이웃에 사는 총각과의 사랑, 뗏목을 싣고 한양으로 간 그를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돌아오지 않아 그만 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그래서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처녀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뱃사공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바라는 처녀상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는 것을 잠시 후 깨달았습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선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너야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보니 건너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 건너고 발만 동동 굴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아내와 나는 이곳까지 왔는데, 처녀상을 보기 위해서 왔는데 여기에서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우리 부부의 추억을 여기에서 또 한 번 만들자며 건너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먼저 운동화를 벗어 등에 맨 배낭에 넣고 양말을 신은 채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우리는 호흡을 맞추며 냇물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몇 걸음 못 가서 아래옷은 다 젖었습니다. 좀 무서웠지만 다행히 아내가 잘 따라주어 첫 관문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이번에는 물살이 전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리 깊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가 무서웠습니다. 나도 속으로 겁이 났습니다.

아내를 격려하며 건너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둘이 손을 꼭 잡고 위쪽에서 건너려고 발을 넣었습니다. 아내도 나도 손을 잡은 강도가 전과 달랐습니다. 힘을 꽉 주고 잡았지만 진땀이 얼마나 나는지 미끌미끌했습니다. 그렇게 긴장을 하고 벌벌 떨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는데 그만 3분의 1 정도 와서 아내가 현기증이 난다며 도저히 못 간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 당시 몹시 힘들어했는데, 간신히 아내의 손을 잡고 건너고 있는데 아내가 그렇게 말하니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잠시 그곳에 서 있다가 방향을 조심스럽게 바꿔 다시 나오고 말았습니다.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바로 눈앞에 처녀상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그만 주저앉아야 되나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아래쪽은 조금 덜할 것 같으니 그곳으로 건너가자고 해서 나는 얼씨구나 좋다 하며 아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급히 내려갔습니다.

아내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그곳은 전에 건너던 곳보다 좀 얕고 물살도 덜 했습니다. 그래도 건너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몸을 꼭 잡은 손에 의지하며 내가 외치는 “하나, 둘” “하나, 둘” 구호에 맞춰 그곳을 힘겹게 건너갔습니다. 건너자마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아내가 대견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는 또 한 군데 냇물이 흘러갔는데 폭이 매우 좁아서 서로 손을 잡지 않고도 혼자서 쉽게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앞장서고 아내가 뒤에 섰습니다. 둘의 반바지는 물론 속옷도 다 젖고 윗옷까지 아래가 젖어 영락없는 물에 빠진 생쥐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발걸음을 급히 놀려 마침내 아우라지 처녀상 앞까지 갔습니다. 이것을 가까이 보려고 아내와 물살 센 냇물을 겁을 내며 어렵게 건넌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반가웠습니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떠난 임을 그리는 그 처녀상이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만났기에 아내도 나와 느낌이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동상에 손을 댔습니다. 아내도 나도 정성스럽게 동상 아랫부분을 어루만졌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이 우리 가슴에 와 닿는 듯 했습니다. 그 처녀상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우리 부부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영원히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빌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박자를 맞추며 물살 센 냇물을 건넌 그 마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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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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