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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2002년 8월 13일 촬영한 북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
ⓒ 2005 연합뉴스
2.13 북핵 합의 이후 미국 내에서는 주목할 만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제2차 북핵 위기의 발단이 되었던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정보 평가에 대한 의문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의혹 제기의 주체 역시 일부 민간 전문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찍이 미국의 진보적인 한반도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은 북한의 HEU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평가가 대단히 과장되어 있다고 주장해, "친북 인사"라는 비난에 직면한 바 있다.

@BRI@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미국의 저명한 핵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 및 국제안보 연구소(ISIS) 소장, 국무부 관리 출신은 조엘 위트 등도 부시 행정부의 정보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고,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대표적인 언론 역시 이 문제를 크게 보도하고 있다. 그러자 북한의 HEU 보유를 그토록 확신한다던 미국 정보기관조차 꼬리를 내리고 있다.

꼬리 내리는 부시 행정부

3월 1일자 미국의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미국 정보기관조차 북한의 HEU 보유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며, 부시 행정부의 북핵 정보 역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정보 평가와 흡사하게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만약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HEU를 불확실한 정보에 기초해 과잉 대응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부시 행정부의 신뢰는 더욱 떨어지게 된다. 이미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후세인 정권의 WMD 개발 의혹을 조작·과장한 것으로 드러났고, 최근에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 및 이라크 저항세력 지원과 관련해서도 과장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셉 디트라니는 2월 27일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내놓았다. 부시 행정부에서 북한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디트라니는 북한의 HEU 보유 가능성에 대해 "중간 수준의 확신"(mid-confidence level)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중간 수준의 확신이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불확실한 정보"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북한이 획득한 장비와 물질이 HEU 프로그램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파키스탄의 A.Q 칸으로부터 원심분리기를 수입한 이후에도 HEU 프로그램을 계속 추구해 왔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전까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지속적으로 HEU를 추구하고 있다며, 북한의 핵폐기 대상에 이 프로그램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과장된 평가의 결과는?

▲ 위성에 바라본 북한 영변 핵 시설단지.
ⓒ 2003 몬테레리 연구소
잘 알려진 것처럼, 북한의 HEU 문제는 이른바 2차 북핵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10월 초 제임스 켈리의 방북 당시에 북한도 이를 시인했다며, 이를 근거로 중유 제공을 중단하는 등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미국과의 합의(제네바 합의)와는 달리 핵무기를 만들 목적으로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북한과 제네바 합의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북한 역시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추방하고,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 줄곧 유지해왔던 영변 핵시설의 동결을 해제해, 본격적인 핵무기 제조에 나섰다. 그리고 이미 10개 안팎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작년 10월에는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실체가 모호한 HEU가 촉발한 결과치고는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2002년 10월 북핵 문제가 재발한 이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북한이 2005년이 되면 매년 2개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우라늄 농축 시설의 건설을 시작했다"는 정보 평가를 미국 의회에 전달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북한이 시인했다는 말만 되풀이해왔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북한이 HEU를 보유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잭 리드 상원의원은 부시 행정부가 불확실한 정보에 기초해 북핵 문제를 다루는 사이에 북한의 핵능력이 4배 늘어났다며, "만약 (부시 행정부의 HEU 평가가) 북한의 야심과 실제 능력을 혼합해서 이뤄진 것이라면, 이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과학적으로 평가했어야 할 북핵 정보가 정치적 편견에 따라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미국 정부 관리 역시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가 2002년에도 오늘날과 같은 신중한 평가를 내렸다면, 북핵 협상은 달라졌을 것이고, 작년 10월 핵실험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방적 시인?

파문이 확산되자 국가정보국(DNI)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평가를 공개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DNI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능력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는 높은 수준의 확신을 갖고 있으나, 이것이 계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중간 수준의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프로그램 진척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미국 정보기관은 왜 최근 들어 북한의 HEU에 대한 정보 평가를 누그러뜨리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뉴욕타임즈>는 정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2·13 합의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입국을 허용하기로 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IAEA 사찰단이 북한의 HEU 의혹을 검증하게 될텐데, 이때 미국 정부가 주장했던 내용과 실제 사찰 결과 사이에 불일치가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 미리 자신의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예방적 시인인 셈이다.

HEU 논란의 앞날은?

이처럼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HEU에 대해 과거보다 한층 솔직해진 모습을 보이면서, 이 문제의 향방에도 관심을 모이고 있다. 자신의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시인한 마당에 예전처럼 북한의 항복을 요구하기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2·13 합의 직후인 2월 21일 브루킹스 연구소 주최의 강연회에서 HEU는 상당한 생산 기술을 요구하는 복잡한 프로그램이라며 북한이 이 기술을 완성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HEU 보유 증거로 제시해온 북한의 알루미늄관 수입과 관련해, "우리는 그것들이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 유형에 맞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만약 알루미늄관이 HEU 프로그램에 이용되지 않았다면, 다른 곳에 쓰였을 수도 있다"며, 알루미늄관이 다용도라는 기본적인 '상식'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알루미늄관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북한과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며, 북한과 이 문제를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풀기로(try to resolve this to mutual satisfaction) 했다고 소개했다.

이는 북한이 HEU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신고해 자진해서 폐기해야 한다는 이른바 '리비아식 모델'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태그:#북핵, #고농축우라늄, #HEU, #부시, #영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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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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