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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에 '진보'를 말하는 이들은 많다.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 김규항, 우석훈 등 유명 논객들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진보 세력은 국민들과의 연대를 이루지 못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표류 중이고, 그 틈을 확고한 보수 세력이 차지해버렸다. 지난 대선과 총선의 결과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에 진보란 존재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가 지난 3월 <성찰하는 진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그동안 지은이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써왔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지은이는 책의 서문을 통해 "최근 우리 사회의 '우향우' 분위기 속에 진보의 핵심 가치인 민주·인권·평등·사회적 연대·약자 배려·관용·평화 등이 장식용 군더더기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에 이 책을 통해 이 가치들을 의도적으로 강조해야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성찰하는 진보'일까? 그는 "범진보진영이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또는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낡은 구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중의 상태와 감각에 무지하거나 무감한 채 낡은 축음기로 흘러간 옛 노래 음반을 돌리고 있는 진보는 '수구·무능좌파'라는 욕을 들어 마땅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는 또 "진보는 지식인이나 혁명가의 지적 염결성과 자존심, 이론적 완결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며 "사회구조를 바꾸고 대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과감히 발가벗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을 '성찰하는 진보로' 잡은 것에 대해 "진정한 진보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의 비전, 정책, 한계 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백범의 보수'와 '몽양과 죽산의 진보'를 본받자
 
지은이는 제1장 '정치 개혁'에서 대통령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정당정치 정착의 바람을 나타내고, 이승만과 박정희 신화 등을 비판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백범의 보수와 몽양과 죽산의 진보를 배우자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현대사의 인물 중 존경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백범 김구 선생은 단연코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반대하고, 나아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던 그의 정신과 노선은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백범의 경우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로 철저한 민족주의에 일관하다 보니 미국과 구소련의 힘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들과 반목하며 대립하는 등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통일을 위한 백범의 헌신은 모든 정치세력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 보수의 미래는 '이승만식 보수'가 아니라 '백범식 보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본문 중에서)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일제 강점기 좌파의 독립운동은 우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하거나 폄하했다. 그러나 몽양 여운형 선생이나 죽산 조봉암 선생 같은 분들의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연대를 위한 노력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몽양과 죽산의 죽음, 그것은 광신적 반공주의가 야기한 진보와 평화의 죽음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백범의 보수와 몽양과 죽산의 진보가 함께 어우러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좌우의 올바른 공존이 아닐까? 민족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자기 식대로 유리하게 적용할 뿐이다.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덜 알고 있는 몽양이나 죽산의 정신을 새롭게 배우고, 백범의 활동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삼성은 자신이 만드는 반도체 수준만큼의 경영윤리는 가져야 한다
 
2005년 삼성 'X파일'이 보도되면서 우리 사회의 정계·재계·언론·검찰 파워엘리트 간 은밀한 '사각 동맹'이 드러났다. 얼마 전에는 삼성 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삼성의 치부가 온 천하에 다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기업 내의 썩은 관행을 제대로 도려내지 않고 봉합한다면 기업은 속으로 더욱 썩어 들어간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기업의 주가가 떨어지고 경영에 어려움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기업범죄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과 국가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요컨대 삼성은 자신이 만드는 반도체 수준만큼의 경영윤리는 가져야 하며, 국가와 시민사회는 그렇게 되도록 강제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지은이는 삼성전자 이재용 전무에게도 편지를 보내는데, 워런 버핏의 말을 빌려 "지난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장남들을 2020년 올림픽 대표선수로 뽑는 것과 같은 끔찍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 전무가 삼성의 경영권을 정당하게 승계하려면 탁월한 경영 능력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은이는 상설 특별검사제 도입을 주장하는데, 이는 권력 핵심 인사나 검찰 수뇌부가 수사 대상이어서 검찰이 엄정하게 수사하기 힘든 사건은 국회 의결만 있으면 바로 특검 수사가 발동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인권을 위협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국가보안법을 개폐해도 형법상 내란죄, 간첩죄 등의 조문이 있기 때문에 국가안보에 대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일으키는 행위는 처벌할 수 있다. 대만의 경우 1991년에 우리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법률을 폐지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지은이는 "국가보안법은 냉전, 분단, 독재, 자본의 논리에 반대하는 사상과 실천을 처벌하기 위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말한다. 침대 길이에 맞추어 키 큰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키 작은 사람은 잡아 늘이는 것이다. 87년 이후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상당히 발전했다고는 하나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잘 보여준다.
 
전형적인 국가보안법의 남용 사례 중 하나로 지은이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이다. 한총련의 강령이나 규약 내용인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 미군 철수 등은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공공연히 제기, 논의되는 주장으로, 형사 제재를 통해 무조건 금지해야 하는 '불온'사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를 낸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의 강령이나 활동과 비교해 볼 때 한총련의 강령과 활동은 훨씬 '온건'하다고 말한다. 게다가 공안당국이 특히 주목했던 한총련의 '연방제 통일 강령'은 2001년 한총련 스스로 공식적으로 폐기한 바 있다고 지적한다.
 
"생각건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한총련을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은 과거 냉전·독재논리와 다를 바 없다. 이제 정부는 한총련 관련자를 수배 해제하고, 형 확정자를 가석방하는 조치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와 의회는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반복하지 말고, 국가보안법 대폭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와 대체입법 제정, 국가보안법 폐지와 형법 보완 중에서 어느 대안을 택할지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본문 중에서) 
  
달려라, 로시난테!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빠르지 않게, 반쯤 빠르게!
 
지은이가 말하는 대부분의 내용에 대해 크게 공감을 하기 때문에 서평이 아니라 책의 요약본 같은 글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내 생각을 쓰기보다는 지은이의 생각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을 읽고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지은이는 정치, 경제, 사회, 인권, 여성, 법률, 평화, 대학 등 여러 문제들에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 각 장마다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지은이가 말하고 있는 진보의 성찰이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된다. 책 속의 여러 사안과 얘기들을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게 참 아쉬울 뿐이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정독하길 바란다.
 
386세대로서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시민단체 활동과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지은이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지식인이란 자신의 자리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제나 강자보단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서 사회의 불합리한 것들을 바꿔나가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교수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지식인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책에는 지은이의 변치 않는 신념과 믿음, 그리고 진보를 향한 열정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묻어난다.
 
"마흔이 넘어 산초 판자처럼 일상을 살고 있지만, 행복(!)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미완의 과제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어느 용사도 감히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고,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으려하는 것이 진정한 기사의 의무, 아니 특권이다"라는 돈키호테의 호언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달려라 로시난테!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빠르지 않게, 반쯤 빠르게.""
(에필로그 중에서)
 
조국 교수가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돈키호테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그의 말처럼 반쯤 빠르게 가다 보면 우리 사회도 더욱 아름답고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성찰하는 진보

, 지성사(2008)


태그:#성찰하는 진보, #조국, #진보, #국가보안법,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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