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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오전 10시를 조금 막 벗어난 시간 부평역 신라저축은행빌딩 앞 노점. 세상에 베푸는 부처님의 자비인가 초파일 아침부터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노점 천막 위 비닐에도 떨어진다.

 

안을 들여다보니 이곳 주인인 양귀자(59) 전국노점상연합회 부평ㆍ남동지역장이 이제 막 장사할 준비를 마치고 늦은 아침밥을 국에 대충 말아 넘기고 있다. 옆을 보니 닮은 듯 안 닮은 듯한 사람이 있으니 양귀자 지역장의 맏언니인 양아희자(67)씨다. 근처에 사는 언니가 동생을 위해 아침밥을 마련해온 것.

 

산청이 고향인 두 자매는 부평에서 살며 서로를 보듬고 지낸다. 내리사랑이라서 그럴까 언니인 양아희자씨는 일주일 몇 번씩 이렇게 아침밥을 손수 지어와 동생에게 내민다.

 

언니 양씨는 "열여덟에 부평에 왔어요. 저도 뭣 모르고 올라와 숱한 고생했지만 그래도 곁에 동생이 있어 든든해요"라며 "동생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꼴을 못 보는 성미를 지니고 있어 늘 고생이 많아요"라고 웃음을 지었다.

 

언니 양씨가 양귀자 지역장의 든든한 후원자라면, 양귀자 지역장은 이곳 노점 상인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지역장을 맡고 있다 보니 어머니 같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노점 일을 시작한지 꼬박 30년이라 같은 처지에 있는 동생들이나 자식 같은 회원들을 누구보다 앞서 챙기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태어난 이 땅의 여성들 중 어디 한 많은 세월 안 살아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 만은 양귀자 지역장 역시 결혼 후 형편이 어려워지자 서른이 채 안 돼 노점길을 나섰다.

 

양귀자 지역장은 "먹고 살기 위해서 고향 산청을 떠나던 날, 저도 언니처럼 열여덟 되던 68년 5월 5일이 잊혀 지지 않아요. 그때 언니가 먼저 결혼해서 부평에서 살고 있었던 터라 이곳으로 왔어요. 여기에 와서 가게 점원일도 하고, 기술 배우려 양장점에서도 일해보고, 그러다 부평공단 반도상사(가발공장)에서 일하면서 군인과 펜팔을 했는데, 얼굴도 모르지만 필체가 아주 좋아서 스물넷 되던 해 지금 남편과 결혼했어요"라고 말했다.

 

결혼과 동시에 부평5동 미나리꽝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린 뒤 남편인 권영조(60)씨가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의복 상표디자인 일을 하던 때라 살림을 영등포로 옮겼다. 하지만 남편이 일하던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다시 언니가 있던 부평으로 내려왔다.

 

양귀자 지역장은 "막 태어난 두 딸은 옹알거리기 시작하는데 회사가 망하고 3개월째 월급은 안 나오니 어디 살 수 있나요. 그래서 쫓아갔어요. 밀린 월급 달라고. 근데 막상가보니 그 집 사정이 더 딱한 거예요. 하는 수 없이 그 집에 쌀 사주고 내려왔어요. 언니도 있겠다, 마침 부모님도 올라오셔서 다시 부평으로 왔어요"라고 당시를 전했다.

 

막상 부평에 내려왔지만 몸뚱어리 하나 말고는 기댈 게 없었던 지라 양귀자 지역장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노점 일을 시작했다.

 

그는 "80년 김장하던 때로 기억 되요. 집에서 김장을 많이 했던 터라 그 김장을 바구니에 이고 시장로터리 노점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막상 갔는데 다른 노점들이 괄시하면서 저 더러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설움에 북받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가며 장사를 시작했죠"라고 말했다.

 

바구니에 이고 다니던 장사는 그래도 열심히 일했던 덕분일까 손수레로 옮겨갔다. 양귀자 지역장은 그 뒤 지금의 부평문화의거리 노점에서 2002년까지 야채와 과일을 팔았다. 엄혹했던 80년대 시절 경찰단속이 떨어지면 손수레에 실린 복숭아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내달렸다.

 

그는 "그 때 끝까지 쫓아와 괴롭히는 정말 독한 경찰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하고 잠시 웃은 뒤, "단속이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경기가 좋았던 때라 월급날만 되면 부평공단에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로 장사가 잘 됐던 때였어요. 오히려 지금이 그 때 비하면 정말 어려운 상황이에요"라고 말했다.

 

설움의 눈물 훔치던 새댁, 상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어머니로

 

갓 서른 무렵에 노점 일을 시작하면서 눈물을 왈칵 쏟아냈던 산청의 새댁은 문화의거리에서 인생의 중대 전환점을 맡는다. 1997년 현재 차 없는 거리인 부평문화의거리가 조성되면서 그 일대 노점들은 반 이상이 문화의거리를 떠나야했다. 이를 계기로 양귀자 지역장은 전국노점상연합회와 인연을 맺는다.

 

양귀자 지역장은 "아마 지금도 부평구청에 내가 속옷만 걸치고 싸웠던 사진들이 있을 거예요. 정말 서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모든 노점의 꿈이 소박하지만 자기 가게를 내는 것이에요. 거리를 정비하면서 노점을 반으로 줄인다며 재산세기록과 타 지역(부평 외), 매매 노점 등을 기준으로 철거했어요.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났지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부평문화의거리에 차 없는 거리 조성을 시작했던 인태연 부평문화의거리상인회 부회장도 행정당국의 무리한 행정과 원칙 없는 철거를 비판했다.

 

당시 노점상인들 사이에서 문화의거리 상점가 상인들에 대한 불만은 높았으나 지금은 전국에서 유례가 없는 공동상인회로 거듭났으며, 상점가 상인과 노점 상인이 한데 모여 '문화의거리'를 살고 싶은 마을 만들기의 대표적 사례지로 만들어가고 있다.

 

양씨가 전국노점상연합회 부평ㆍ남동지역장을 맡은 것은 2002년부터다. 올해로 벌써 7년째로 2년 임기의 회장을 네 번째 맡고 있는 것. 양씨는 지역장을 맡으면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인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먼저 나선다.

 

특히, 노점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점가 상인과 재래시장 상인들의 생존권을 위한 일에 오히려 먼저 나서고 있는 것. 양귀자 지역장과 전국노점상연합회 부평ㆍ남동지구는 인접한 상인회와 공동으로 카드수수료율 인하, 대형마트와 SSM(기업형 슈퍼마켓) 규제 등의 중소상인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성과들은 고스란히 지역 상인들의 연대로 이어졌다. 이제 문화의거리 상점가 상인들은 노점과 상점가를 입술과 이처럼 생각하며 노점을 부평문화의거리의 명소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 두고 양귀자 지역장은 "전노련은 외로운 조직이에요. 숫자가 적은 탓도 있지만 늘 외롭게 버텨야했어요. 그런데 이제 상점가 상인, 재래시장 상인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사는 건 어려워도 지금이 제일 행복한 시절"이라며 "노점의 꿈은 자기 가게를 갖는 거예요. 그러려면 양극화가 왜 심화되는지, 자영업자는 왜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렇게 상인들은 몰락하는데 왜 자꾸 대형마트와 SSM은 늘어만 가는지, 그래서 왜 상인들이 연대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전노련은 제게 그런 사회의 모순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협동과 단결, 연대의 숭고한 뜻을 알려준 곳이에요. 노점의 꿈은 모든 상인들과 함께할 때 실현 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설움의 눈물 쏟아내던 새댁이 어느덧 이 지역 상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양귀자 지역장의 꿈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가게를 갖는 게 아니다. 그는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좀 편하게 살아봤으면 해요. 저도 가게를 갖는 게 꿈이었지만 이젠 건강하고 안 아프고 사는 게 꿈이에요. 다만 저와 어깨 걸고 있는 우리상인들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요"라며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어요. 돈을 벌려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돈을 버는 방식이 잘못된 거예요. 남을 이용해서 득을 보려는 욕심을 버려야해요"라고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30년 부평지킴이, #전국노점상연합회, #부평남동지역, #부평상인대책협의회, #부평 문화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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