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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훌쩍 넘어 60주년을 맞이한 6.25. 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6.25는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날의 생생한 기억은 참전용사들에게 악몽으로 기억되고 있다. 생생한 증언을 한 참전용사들의 모습. 왼쪽부터 김춘택, 최흥호, 박종언, 이현규, 이병옥 참전용사
▲ 역전의 용사들 반세기를 훌쩍 넘어 60주년을 맞이한 6.25. 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6.25는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날의 생생한 기억은 참전용사들에게 악몽으로 기억되고 있다. 생생한 증언을 한 참전용사들의 모습. 왼쪽부터 김춘택, 최흥호, 박종언, 이현규, 이병옥 참전용사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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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끝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중국과 가까워서 일까. 태안은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외세침략을 많이 받았던 지역 중 하나다. 하지만, 유일하게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의 유린에서 예외였다.

지역 일부에서 '집단학살지였다'라고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돌고는 있지만 유해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근거없는 소문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태안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피아의 접전이 치열했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아비규환의 현장은 없었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젊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참전용사들의 희생은 그 어느 지역 못지 않았다.

휴전직전 치열했던 펀치볼 전투 참전용사의 생생한 증언

군사분계선이 정해지기까지 전방에서는 조금이라도 군사분계선을 밀기 위한 피아간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었다.
▲ 1953년 휴전이전까지의 전선상황 군사분계선이 정해지기까지 전방에서는 조금이라도 군사분계선을 밀기 위한 피아간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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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전 한반도에선 조금이라도 더 군사분계선을 위아래로 넓히기 위한 국지전 형태의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952년 후반기부터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선이 다시 가열되면서 우리가 6.25 전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한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피의능선전투, 펀치볼전투 등이 치러졌고, 고지쟁탈을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반복돼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게 된다.

6.25참전용사 김춘택(80·남면 달산리)씨는 바로 이 때 당시 23세의 청년으로 전선에 투입된다. 그것도 뺏고 빼앗기는 혈전이 계속되며 엄청난 사상자를 냈던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전투'에 말이다.

1952년 12월 15일 국가의 부름을 받고 충남 논산의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김씨는 21연대 2중대 소속으로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뒤 당시 후방에 위치하고 있던 대구 헌병학교에 입소해 후반기교육을 받은 후 펀치볼전투의 중심에 있던 강원도 양구 수도사단에 배치된다.

치열한 전쟁통이라 변변한 막사도 없이 천막을 치고 생활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김씨는 "당시 밀고 밀리던 치열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막에서 자든 막사에서 자든 중요하지 않았다"며 "아비규환의 전쟁통이어서 부대배치 이후 곧바로 전쟁터로 투입됐다"고 회상했다.

펀치볼 전투에서 헌병이었던 김씨에게 주어진 주임무는 부상자와 사망자를 후송하는 차량에 대한 교통정리였지만, 전장의 특성상 주임무와 더불어 ▲주둔지 경계 ▲사상자 후송 호위 임무 등을 맡았다. 비록 소총수로서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펀치볼 전투를 치른 전투원으로서 목숨을 건 현장의 산증인이 되었다.

전사상자 후송을 했던 김씨는 당시 상황을 "전쟁 막바지여서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도 전투가 치열했고, 하루에도 전장터에서 후송돼 나오던 병사들이 트럭에 짐짝 실리듯 실려나왔다"며 "후방이라고 해도 바로 앞에서 포탄이 터져 전우들이 다치고 죽어나가는 모습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또한, "살려달라며 절규를 하는 전우들과 싸늘한 시신으로 후송되는 동료들을 볼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며 "요즘도 가끔 현충원이나 참전비를 찾을 때면 먼저 간 전우들에게 미안하고 또 우리만 살아남아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죄스럽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적진속에서 전사자를 빼오는 것도 목숨을 건 전투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52년부터 휴전이 되기 전까지 강원도 양구와 양양 일대에서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특히, 김춘택 참전용사는 휴전이후에도 12년간의 군생활을 하며 63년도에 중사로 전역했다.
▲ 김춘택(왼쪽), 이병옥 참전용사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52년부터 휴전이 되기 전까지 강원도 양구와 양양 일대에서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특히, 김춘택 참전용사는 휴전이후에도 12년간의 군생활을 하며 63년도에 중사로 전역했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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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와 같은 부대는 아니었지만 김씨보다 먼저 전장터에 투입돼 펀치볼과 그리 멀지 않은 강원도 양양군 토성면 천진리 육본직할 병기부대에 배속돼 전사자들의 영현처리를 도맡았던 이병옥(80·소원면 송현리)씨의 참전기는 더욱 끔찍했다.

이씨 또한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11월 입대해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강원도 지역에 배치를 받아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병기부대였던 이씨의 본래 임무는 훼손된 포와 차량, 총에 대한 수리를 전담으로 맡았던 부대의 소속일원이었지만 전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이씨의 부대에는 '영현처리'라는 임무가 추가로 부여됐다.

임무특성상 전장터에서 전사자를 빼내 오기 위해서는 전장 깊숙이 투입돼야 했기 때문에 이씨의 부대는 적군이 포진되어 있는 적진으로 15대의 차량을 끌고 들어가 부상자와 전사자를 후송해야 했다.

포탄이 터지는 아수라장 속에서의 전사상자 후송임무 또한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비규환의 현장속에서 전사자를 후송하기 위해서는 전사자에 대한 예우는 둘째치고 일단 시신을 전장터에서 빼내오는 게 급선무였다. 이렇다보니 일단 적진으로 들어간 이씨의 부대는 아군이 보이는대로 마치 짐짝 싣듯 트럭에 쌓았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씨의 부대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전사자들을 고이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이씨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1953년)7월 15일 이전에는 트럭 한 대에 10구 정도의 시신을 싣고 나왔는데, 이후 휴전(7월 27일) 직전까지는 전사자가 늘어 장작을 싣듯 닥치는 대로 실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또 "당시 같은 마을(소원면 송현리)에서 함께 입대한 사람이 3명이었는데 1명은 안타깝게도 전사했고, 다행히 한명은 살아있다"며 먼저 간 전우에 대해 미안함을 표시했다.

태안읍에 위치한 6.25참전전우회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당시의 참혹함과 먼저 간 전우들을 생각하며 좀 더 생생한 증언을 토로하려 했지만 다시는 회상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먼저 간 전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최근 모 방송국의 <전우>라는 드라마를 즐겨보며 공감대를 느낀다는 참전용사들. 풍전등화의 위기속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진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후세들은 깊이 깨달아야 하며, 더 발전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한분두분 세상을 떠나고 있는 참전용사들에 대한 처우가 더 개선되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태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펀치볼전투,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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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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