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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시다가 있었다. 고 조영래 변호사는 '시다'를 이렇게 설명했다.'시다'란, 말이 견습공이지 실제로는 하나의 독립된 임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라서, 보조 없이는 일해도 시다 없이는 일 못한다고 하는 정도이다. 하루 종일 다리미질과 실밥 뜯는 일, 실과 단추를 나르는 일로부터 업주나 미싱사나 재단사의 사적인 잔심부름까지도 하게 되는 무척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다. (<전태일 평전>, 돌베개)

40년 후, 지금도 시다가 있다. 평화시장뿐만 아니다. 학교도, 도로 위도, 빌딩에도, 공장도, 병원도…. 이젠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2010년의 시다, 우리는 그들을 '비정규직'이라 부른다. 2010년, 비정규직들의 목소리를 통해 40년 전 전태일이 못 다 외친 '인간선언'은 계속되고 있다. 2회에 나눠 모든 세대에 걸쳐 있는 2010년의 시다, 비정규직들의 삶을 따라갔다.... 기자주

[20대①] 좋은 것 하나 없는 이곳, 오늘도 서있어요

야3당, 여성 노동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0월 26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공동회견을 열고 정부의 저출산 대책에 대해 자율형 어린이집 도입 철회 및 비정규직 여성의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야3당, 여성 노동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0월 26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공동회견을 열고 정부의 저출산 대책에 대해 자율형 어린이집 도입 철회 및 비정규직 여성의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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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 아가씨'. 사람들은 박경애(가명·23)씨를 그렇게 부른다. 박씨의 일터는 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 안내 데스크. 하루에도 수백 번 여닫히는 문으로 쉴 새 없이 바람이 들어온다. 겨울에도 감기를 모르고 살던 박씨가 지금은 4계절 내내 감기를 달고 산다.

박씨는 파견직이다. 야간 대학을 다닐 때 낮에 이 기관 총무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 다른 직장을 다니다가 다시 이곳에 입사하게 됐다. 알바 때는 직원들과 똑같이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해도 월급은 70여만 원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때의 두 배 가까운 130여만 원을 받지만 그가 느끼는 박탈감은 더 크다.

"연극이나 뮤지컬 등을 함께 보는 문화 회식이란 게 있어요. 저희도 소속은 총무팀인데 정직원이 저 듣는 데서 '얘는 제외해도 돼'라고 하더라고요. 서류상에는 안내 데스크가 가는 걸로 돼 있고, 예산도 있었지만 우리 대신 알바생들이 갔어요."

한순간에 '제외해도 되는 애'가 됐던 박씨는 "정규직들은 비정규직들을 같은 회사 사람으로 생각 안 한다"고 단언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똑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차는 3배에 가깝다.

박씨와 함께 안내 데스크를 지키는 언니가 있다. 2년여 전, 임신을 해 "보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잘렸던 언니다. 2년간 안내 데스크를 거쳐 간 사람들이 몇 달 못 버티고 계속 바뀌니까 용역회사에서 얼마 전 언니한테 다시 나오라고 했다.

박씨도 내년엔 "아무리 생각해도 정규직보다 좋은 점은 하나도 없는" 이곳을 떠날 고민을 하고 있다. 그는 성과가 잘 안 보이는 안내 데스크 일이 자신과 안 맞다는 생각을 계속 한다. 그런데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에 앞서 내년에 방송통신대에 등록할 계획이다.

"전문대 나온 걸로는 이력서 내고 싶어도 못 내는 곳이 많아요. 연봉도 낮아요. 전에 다니던 회사도 1800 준다고 해서 갔는데 회사가 어렵다면서 1500밖에 안 줬어요. 사회에 나오니 학벌 무시 못하겠더라고요."

[20대②] 30만원짜리 월셋방에 이력서 300통... 내 이름은 계약직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태권도 선수의 길을 걸었던 이철범(28)씨도 뒤늦게 진로를 바꿨다. 태권도부가 있어서 들어갔던 실업계 고등학교는 그가 입학 후 대외 성적이 안 좋은 태권도부를 없앴다. 다른 길을 생각 못 해봤던 이씨는 막막했다. 그나마 그제야 눈에 들어온 전공, 화공과가 마음에 들었다. 환경공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전문대에 진학했다가 4년제에 편입, 대학원까지 들어갔다.

하지만 연구원을 꿈꾸며 2008년 대학을 졸업했던 이씨의 지난 2년은 평탄치 않았다. 1년 2개월 정도 다닌 직장이 지난해 문을 닫았다. 그가 다시 문을 두드린 곳은 정부가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한다면서 대대적으로 뽑았던 행정 인턴이다. 시군구별로 대기, 수질 등 환경오염 정도를 조사해 데이터를 분석하고 통계내는 일을 주로 했다.

"환경행정인턴들 모임이 있었는데 2달도 안 돼 절반이 그만뒀어요."

구청 공무원들로부터 "너는 직원이 아니지 않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이씨도 원래 계약기간이었던 10개월을 다 못 채우고 6개월 만에 행정인턴을 그만뒀다. "비전이 보이지 않았"단다.

이씨가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낸 이력서만 300~400통에 이른다. 취업박람회란 취업박람회는 다 찾아다녔다. 그런 노력 끝에 얼마 전 정부 산하의 한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계약직이다. 프로젝트별로 연구원을 뽑는 연구기관 역시 비정규직이 절반을 차지한다. 석·박사 계약직도 많은 현실에서 이씨는 대학원을 마치지 못했다.

현재 봉급은 92만 5000원. 4대 보험을 제하면 채 88만원이 안 된다. 얼마 전, 옆방 핸드폰 소리까지 들리는 고시원을 나와 월세 30만 원짜리 방을 구했다. 공과금 내고 차비 쓰면 정말 남는 게 없어 점심은 도시락을 싸갖고 다닌다.

1년 계약기간이 한참 남았지만 이씨는 벌써부터 다른 곳에 원서를 넣어뒀다.

"강남구청에서 강남지역 기업들에 지원하는 6개월 인턴과정이 있습니다. 거긴 인턴 끝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 준다고 해서 연락 기다리고 있지요."

1주 전 취업박람회에서도 외국 기업에 원서를 내고 왔다. 둘 다 연락이 온다면 바로 정규직인 외국 기업으로 갈 생각이다. 물론 월급도 더 많다.

"계약직 연구원이 아닌 안정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사가 꿈인데 쉽지 않네요."

20대 비정규직들은 오늘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 하지만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까봐 그들은 늘 불안하다.

[30대①] 왜 우리더러 생수통을 옮기라고 하나요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나가면 영어학원 전단지는 우리한텐 안 줘요."

여의도 한 증권회사건물 시설관리를 하고 있는 김광식(35)씨는 직장도 사회도 작업복 입은 사람을 무시하는 게 못마땅하다.

전기배선관리, 냉난방 조절 등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손길이 가지 않으면 건물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24시간 건물관리를 쉬지 않기 위해 주간(08~18시)-당직(08시~다음날 08시30분)-비번, 3교대로 움직인다. 많은 시설관리용역업체들은 2교대인 당-비로만 돌아 사실 휴일이 없는 셈이다.

시설관리 용역업체 사장은 그 기업 퇴직임원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 인맥으로 잇닿아 있어 원청과 용역업체 관리자들은 친하다. 김씨의 회사 역시 증권회사가 사옥을 늘리면서 시설용역 규모도 커졌다. 증권회사는 김씨 소속 용역업체를 인수해 증권회사 이름을 붙인 새 시설관리용역회사를 만들었다. 업체 사장은 회사를 넘기면서 10억여 원을 받았고, 다시 새 용역회사의 이사가 됐다. 원청과 용역업체가 가까우면 노동자는 피곤해진다.

"여름에는 에어컨 역할을 하는 냉동기를 돌려요. 층별로 격차가 심해서 어떤 사람은 춥다고 하고 또 누구는 덥다고 하죠. 관리자들이 민원을 막아주면 좋은데 관리자들도 총무과 눈치 본다고 우리 고충은 뒷전으로 미룹니다."

김씨는 증권회사 직원들이 신용카드 폐기처리나 생수병 옮기기 같은 본인들 일을 시키는 것도 못마땅하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방패막이 역할을 포기한다.

김씨는 전직 미용사였다. 미용학원부터 시작해 디자이너까지 7년여를 일했다. 보조시절 30만 원이었던 봉급이 300만 원까지 오르기도 했다.

"손님이 숍에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에요. 어떤 컴플레인이 있을까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죠. 밥 먹으면서도 눈치봐야 하고…."

김씨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미용일을 접고 기술 익혀서 마음 편히 일하자면서 시설직을 택했다.

안전장치도 변변찮은 상태로 15m, 30m 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명기구를 갈아 끼우면서도 전기·기계 기술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용역업체 소속으로 몇 년을 일하면서 피해의식에 시달리기도 하고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사라졌다. 다른 곳으로의 이직 고민? 이쪽 업계가 다 고만고만해서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전기기사 자격증을 따서 다른 데 선임으로 갈까 싶어 요즘 자격증 시험공부 중이다.

[30대②] 취업 설계? 내 코가 석자예요

새일센터의 직업훈련 모습
 새일센터의 직업훈련 모습
ⓒ 여성가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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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혼 여성들이 갈 수 있는 일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할인점 캐셔나 식당 서빙 같은 서비스직이 대다수다. 개중 전문직을 원하는 여성들은 자격증에 도전한다. 최해숙(가명·38)씨가 그 경우다. 최씨는 지난해 6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딴 후 7월부터 지역의 한 여성새로일하기센터(새일센터)에서 취업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와 노동부가 함께 추진하고 있는 새일센터는 최씨처럼 결혼 후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취업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여성가족부로부터 인건비가 지원된다. '100만 원 이상 지원' 규정에 따라 상당수 위탁기관 취업설계사들은 100만 원을 받는다. 물론 거기서 다시 4대 보험이 빠진다.

구직자들한테 일자리를 연결시켜주는 취업설계사도 계약직으로 자기 일자리 걱정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 시대다.

"계약기간 끝났는데도 재계약 하자는 말 없으면 바로 잘리는 거죠. 그런데 그 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열악하니까…."

최씨는 작년에 팀에 함께 들어왔던 5명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취업설계사다.

"취업설계사 한 명당 맡는 구직자가 200여 명이에요. 하루에 수십통씩 전화 상담도 하고, 동행면접도 가고, 구인처가 없으면 지역 돌아다니면서 구인업체들을 물색하기도 하고 행정업무도 많죠. 쉴 틈이 없어요. 일은 많은데 처우는 낮으니까 이직이 많은 것 같아요."

센터별로 매월 실적보고를 한다. 취업설계사 별 취업실적 그래프를 붙여놓는 센터도 있다. 실적에 따라 센터에 인센티브가 주어지니 관리자들이 신경을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만큼 취업설계사들은 고달파진다.

초등학생 두 아이가 있는 최씨는 갈등한다.

"학원이다 뭐다 해서 아이들한테 들어가는 거 생각하면 이 돈 받으면서 일하는 거나 집에 들어앉아 아이들 가르치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엄마들이 집을 못 벗어나나 봐요. 저도 그런 고민할 때 많아요."

30대는 안정 속에서 성취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늘 제자리다. "여기에 평생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딴 데 가도 계약직이고, 하는 일도 똑같아서 다른 데나 여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최씨는 우선 지금 있는 센터에서 경력을 쌓는다는 생각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11월호에도 게재됐습니다.



태그:#비정규직, #시다,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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