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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시다가 있었다. 고 조영래 변호사는 '시다'를 이렇게 설명했다.'시다'란, 말이 견습공이지 실제로는 하나의 독립된 임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라서, 보조 없이는 일해도 시다 없이는 일 못한다고 하는 정도이다. 하루 종일 다리미질과 실밥 뜯는 일, 실과 단추를 나르는 일로부터 업주나 미싱사나 재단사의 사적인 잔심부름까지도 하게 되는 무척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다. (<전태일 평전>, 돌베개)

40년 후, 지금도 시다가 있다. 평화시장뿐만 아니다. 학교도, 도로 위도, 빌딩에도, 공장도, 병원도…. 이젠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2010년의 시다, 우리는 그들을 '비정규직'이라 부른다. 2010년, 비정규직들의 목소리를 통해 40년 전 전태일이 못 다 외친 '인간선언'은 계속되고 있다. 2회에 나눠 모든 세대에 걸쳐 있는 2010년의 시다, 비정규직들의 삶을 따라갔다.... 기자주

[40대①] "임금 떼먹는 놈은 가정 파괴범"

40년 전,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신음하던 시다의 자리에 2010년엔 비정규직이 있다.
 40년 전,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신음하던 시다의 자리에 2010년엔 비정규직이 있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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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형(45)씨는 전남 영암에 위치한 대불공단 노동자다. 조선업종에서만 28년째 일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 목포 해안가엔 중소형급 조선소들이 난립했다. 당구비가 10분에 300원 하던 시절, 일당으로 당구 3시간도 못 치는 3800원을 받으면서 일을 배웠다.

몇 백kg에 달하는 철판을 설계도면에 맞춰 자르고, 구부리고, 용접하고, 그라인더 등으로 매끄럽게 하면서 작은 블록들을 만들고 그 블록들을 이어 커다란 배 한 척을 만들어 낸다. 그 과정에서 철판을 들고 가다가 무거운 철판에 깔리기도 하고, 높은 배 위에서 용접하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몇 백℃에 이르는 불꽃에 화상을 입기도 한다. 일하다가 다쳐도 산재처리는 언감생심. 공상처리라도 해주면 다행이다.

"이곳 노동자 대부분이 신용불량자예요. 4대 보험 넣으면 월급이 압류돼서 4대 보험 잘 안 넣죠. 그러니 나중에 사고 나도 보호도 못 받고…."

10년 전 단가 그대로이긴 하지만 일당 10만~12만원인 노동자들이 신용불량자가 되는 데는 복잡한 하도급구조가 한 몫 한다. 원청인 현대삼호중공업이 하청을 주면 업체는 다시 재하청을 주고 재하청업체는 또 다시 '돌발', '급돌발'로 부르는 팀들에 블록별로 일을 맡긴다. 작업반장 한 명에 기술자 몇 명으로 구성된 이런 물량팀들에서 임금체불이 많이 발생한다.

조씨는 "여긴 1일부터 말일까지 일하면 월급이 다음달 20일이나 25일에 나와요. 50~55일 일한 후 월급을 받는 셈이죠. 그러니 1, 2달만 체불돼도 서너 달이 후딱 가죠. 그런 업체 두세 군데 다니면 반 년에서 1년이에요. 집에 몇 개월씩 생활비를 못 갖다 주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갈라진 집들이 꽤 돼요."라면서 "임금 떼먹는 사람들은 가정파괴범"이라고 말했다.

경기를 많이 타는 일이다. 올 여름엔 물량이 많이 감소해 한 달에 12일, 17일 밖에 일을 못했다. 업체 소장들로부터 "집에 가, 이 새끼야" 같은 막말도 듣는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대불공단 일용직 노동자들의 지금 가장 큰 바람은 '월급 떼먹히지 않기'다. 가족생활을 책임지는 중년의 가장들에겐 정말 절박한 문제다.

[40대②] 돈 받아내는 깡패? 그 편견보다 더 무서운 건...

정규직이었다가 비정규직이 된 이들의 박탈감은 더 크다. 에스지(SG)신용정보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1998년 대한보증보험과 한국보증보험은 합병해 서울보증보험을 세웠다. 합병은 당연하다는 듯 구조조정을 동반했고, 두 회사 인원의 55%가 희망퇴직을 했다. 희망퇴직한 직원 상당수가 서울보증보험의 계약직으로 재입사했다. 2004년 3월, 서울보증보험은 에스지신용보증보험이란 자회사를 설립해 계약직 직원 상당수를 강제 이직시켰다.

1998년 전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하는 일은 같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을 돈을 대신 받아주는 일이다. 이를 채권 추심이라 부른다. 혹자들은 "깡패나 하는 일로 생각"하지만 강도연(43)씨는 "빚을 줄일 수 있는 법적 절차를 안내하기도 하고 의미 있다"면서 직업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보다 강씨는 회사내 차별이 더 견디기 힘들다. 2007년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서 '무기계약직'으로 바뀌어 매년 계약하는 불안감은 사라졌다. 하지만 정년이 보장됐다는 것 외엔 달라진 게 없다. 급여는 정규직 대비 65% 수준에 머물렀다.

사측은 동일한 복지혜택을 주기도 부담스러웠는지 정규직들에게 있던 배우자 건강검진, 의료비 지원제도를 없앴다. 하는 일은 똑같은데 신분은 정규직에서 비정규직, 중규직으로 떨어지면서 직원들의 근로의욕이나 회사에 대한 충성도도 함께 떨어졌다.

"사회적으로 핵심사업은 정규직에 맡기고 비핵심사업은 비정규직에 맡기는 구조가 정착돼 버렸다고 해요. 그것도 동의하기 힘들지만 채권추심회사에서는 추심업무가 핵심사업 아닌가요?"

강씨는 '핵심업무'를 하고 있는 자신들이 비정규직인 게 이해가 안 된다.

[40대③]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라 여겼는데"

고용보장이 돼도 저임금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힘겹다. 오영숙(46)씨는 세종대학교 생협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 처음엔 시간제로 일해서 방학 때는 쉬고 다시 계약하길 반복했다. 작년에 정규직이 돼 호봉도 생기고 방학 때도 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월급은 94여만 원(공제 후), 그다지 높지가 않다.

"애가 셋이에요. 대학생 둘, 초등학생 6학년 하나. 남편이 좀 벌어도 생활비가 쪼들리죠. 큰 애가 주말에 공사장에서 막노동 알바를 하는데 짠해요."

결혼 후 15여 년 만에 처음 한 직장생활이었다. 남편과 10년 넘게 하던 비디오·책 대여점을 닫고 "나중에 박스는 줍지 말고 살아야지" 싶어 시작한 일이다. 하루 이용객만 2800여 명. 무거운 식판들을 나를 때는 팔목이 욱신거리고, 많은 양의 김치 등을 하느라 팔꿈치 인대가 마구 쑤셔온다. 팔 곳곳에 튀김 기름이 튀긴 자국이 남아 있기도 하다.

처음에 일할 땐 대학생이 된 것마냥 신선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물론 학생들이 식권을 홱홱 집어던지고,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이것저것 시킬 때는 욱하기도 한다. 그래도 작년에 정규직이 되고 나서는 이곳이 "마지막 직장"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올초부터 학교가 식당운영을 생협이 아닌 외부 외식업체에 맡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그 잡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힘들게 일하면 좋은 소식이 들려와야 할 텐데 맥 빠져요. 50 넘으면 직장 구하기 힘들잖아요. 애들 학자금 대출받은 거 갚을 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죠." '

마지막 직장'을 꿈꾸는 '아줌마'들의 바람을 '턱없이 큰 요구'로 취급하는 세상이다.

[50대①] 손빨래에 고추 따는 요양보호사?

요양보호사는 어르신을 돌본다는 보람도 있지만 각종 허드렛일과 성폭력 등에 시달리는 사각지대도 있다.
 요양보호사는 어르신을 돌본다는 보람도 있지만 각종 허드렛일과 성폭력 등에 시달리는 사각지대도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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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불안하니 전문직을 택하는 중년여성들도 많다. 최근엔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기 열풍도 불었다. 간병인으로 일하던 조춘희(53)씨도 "앞으로 보호사 자격증이 있어야만 이런 간병 일도 할 수 있다"는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를 보고 2년 전 자격증을 땄다.

학원비만 60만 원, 차비와 식비 합해 족히 100만 원은 들었다. 그런데 조씨처럼 자격증을 딴 사람이 전국에 80만 명 있다. 그 중 21만여 명만 이 일을 하고 있고, 정부는 이마저도 줄일 예정이다.

"자격증 갖고 있어도 돈 벌기 힘들어요. 급여가 정해진 게 아니라 2명 하면 24만 원, 3명 하면 30만 원 하는 식이죠. 임금이 너무 작아서 하루 일하다 하루 파출부 다니는 식으로 투잡을 뛰죠."

요양보호사는 치매·중풍 등 노인성 질환으로 독립적인 일상생활이 힘든 노인들을 위해 노인요양 및 재가시설에서 신체 및 가사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종이다. 본래는 시설에서 요양보호사들에게 서비스 대상자들을 선정해 줘야 하지만 현실은 요양보호사가 대상자를 직접 구하는 경우가 더 많다. 동네 마당발들에게 1인당 얼마씩 쳐서 대상자들을 소개 받는다.

하는 일 역시 거동이 불편한 대상자들을 병원에 데려 가거나 운동시키는 등의 신체지원과 말벗이 되는 정서지원이 주고 가사일 지원은 부수 업무인데 대상자의 가족들이 집안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

"마치 파출부 부리듯, 시장도 봐달라고 하고 베란다 청소부터 손빨래까지 별별 거를 다 시켜요. 시골에선 '고추 따라 들깨 따라'면서 밭일까지 시키죠."

조씨는 '요양보호사는 파출부가 아니'라고 수없이 마음속으로 항변했지만 잘릴까봐 거절도 못했다.

요양보호사가 여자들이다 보니 대상자나 대상자 가족들에게 당하는 성폭력 문제도 심각하다. "나랑 자면 아파트 사준다", "너랑 나랑 잔대도 누가 뭐랄 사람 있겠냐" 등의 희롱을 당하기 일쑤다. 시골은 외진 곳에 집이 많아서 사건이 벌어져도 도움을 청할 데도 변변찮다.

조씨는 "사회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점점 필요해지는 일이다. 그에 반해 자신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하찮게 평가되는 걸 참기가 힘들다.

[고령자①] "지하철에서 일하는 것들 괘씸할 때가 많아"

"얼마 전에 사무소에서 페인트칠을 하는데 우리 엄마들 쉬는 데만 빼고 칠하더라고. 처음엔 예산이 없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페인트가 남았대. 인터넷에 올린다고 하니까 한번 쑥~ 칠하고 말더라고요."

서울메트로에서 청소일을 하는 김홍선(61)씨는 지하철 직원들이 괘씸할 때가 많다. 서울시에서 '새서울가꾸기' 같은 평가를 할 때면 청소하는 엄마들은 달달 볶인다. 하얀 장갑을 끼고 닦았을 때 먼지가 안 묻을 정도로 청소를 해야 한다. 평가에서 등수를 잘 받으면 메트로직원들은 성과급이 나오지만 우리 엄마들에겐 '쓴 커피 한 잔' 돌아오지 않는데도 일은 엄마들이 해야 한다. 서울시장이나 서울메트로 사장이라도 올 때는 며칠 전부터 비상이다. 제발 높은 사람들이 안 왔으면 좋겠다.

치사해서 얘기하기 싫지만 점심값도 그렇다. 같은 지하철에서 일해도 지하철 구내식당 밥값이 메트로 직원들은 1800원, 청소하는 엄마들은 3000원이다.

"3000원이나 주고 어떻게 사먹어. 도시락 싸오거나 휴게실에서 같이 해먹지."

지하철에 있는 똥 싼 거, 토한 거 치우는 우리 청소하는 엄마들이 필요한데 대우 좀 잘해주면 좋겠다. 많은 것도 안 바란다. 관절도 안 좋은 엄마들 3층까지 오르내리기 힘드니 휴게실은 1층에 있었으면 좋겠다. 예산 좀 늘려서 기지에 지붕 세워 비 맞고, 눈 맞으면서 청소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대청소 라인이 위험해서 간격 벌어진 데로 다리 빠져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쭉 멍드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어서 용역업체 바뀌어도 계속 일할 수 있고, 예전처럼 지하철 직원들이 사소한 심부름 같은 거 시키지 않아서 좋다.

[고령자②] "백만원짜리 일자리, 당신들이 한 번 해봐"

마트에서 카트 끄는 일도 만만치 않다. 다쳐도 산재 처리는 엄두도 낼 수 없다.
 마트에서 카트 끄는 일도 만만치 않다. 다쳐도 산재 처리는 엄두도 낼 수 없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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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들은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조수연(62)씨도 올해 초 다시 일자리를 구해서 그 행복을 맛봤다. 조씨는 2006년 말, 28년간 일했던 자동차부품업체에서 정년퇴직했다. 한 달에 100시간씩 잔업, 특근을 해도 '산업역군'이란 자부심으로 일했다.

하지만 퇴직한 '산업역군'이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2007년 1월부터 시장에 3평짜리 점포를 얻어 튀김, 잔치국수, 어묵 등을 팔았다. 장사를 1년 정도 하다가 사기를 당했다. 2008년 금융위기로 경기도 안 좋아져서 장사를 접었다.

실업급여를 다 까먹고 아이들 결혼할 때까진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알아봤다. 몸 건강하니까 기술일을 구했지만, 제조업에선 60대를 뽑지 않았다. 택배를 해볼까 하지만 그마저도 나이 때문에 쉽지 않았다.

"육십 넘어서 일하고 싶다는 건 우리 의욕이고 욕심일 뿐 업체에선 안 받아줘요."

일자리 정보를 수집하러 인터넷서핑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고령자취업알선센터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곳을 통해 한 대형마트 카트정리하는 일을 소개받았다. 평생 제조업에서만 일했던 탓에 처음엔 유통서비스업이 낯설었다. 서서 일하고 손님 오면 꾸벅 인사하고…. 점점 노하우를 익혀가고 있다.

하지만 권위적인 용역업체 관리자들의 태도는 아직 적응이 안 된다. 근무했던 자동차부품업체는 관리자가 막말을 하면 노조 회의 안건으로 올라갔지만 마트는 노조가 없으니 건의할 데가 없다.

얼마 전에도 50대의 계약직 직원이 비오는 날 카트를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사무실에 산재처리해 달라고 했더니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고 퇴짜를 놓았다. 결국 그 직원은 퇴사를 했다. 업체는 실업급여처리도 못 해준다고 했다. '노조만 있었으면 근무시간에 다친 건 산재처리가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조씨는 일하는 게 즐겁다.

"어디 힘 안 드는 일 있나요. 일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일한다는 성취감이 있어요."

사실 성취감을 느끼기엔 월급이 적은 편이다. 100만 원이 좀 안 된다. 그나마 조씨는 20년 넘게 낸 국민연금이 나와서 네 식구가 그럭저럭 살 만한데 젊은 친구들은 어떨까 걱정이 된다.

"일자리정책이라면서 100만 원짜리 일자리만 만드는데, 정치인들한테 당신네는 100만 원으로 살 수 있겠냐고 묻고 싶어요. 그런 일자리 100만 개, 1000만 개 만들면 뭐하나. 생활이 안 되는데…."

마트에서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걸 보면 조씨는 "우리 기성세대들이 자식세대에게 그렇게 만들어 준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하다.

20대~60대까지 비정규직은 곳곳에 있었다. 담지 못한 이야기도 많다. 아침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고기를 써는 필리핀에서 온 미등록이주노동자. 유일하게 영양가 맞춰 먹는 식사가 노인복지센터에서 주는 점심인, 복지센터에 구직신청을 해두고 계속 기다린다던 70대 어르신 등.

2010년의 '시다'들은 이처럼 절실하게 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조영래 변호사는 시다들을 "그들은 결국 스스로의 젊음과 소망과 건강과 생명을 그날그날 갉아먹으며 살아야만 하는 피팔이 인생들"이라고 표하기도 했다. 사회가 비정규직들을 '피팔이 인생'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 사회에 대불공단에서 만났던 39살 노총각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회가 우리를 상품으로 여기고 있어서 서글프다. 우린 상품이 아니다. 따뜻한 피를 가진 인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11월호에도 게재됐습니다.



태그:#비정규직,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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