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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수)

오늘도 창 밖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다. 계속 강풍이 불고 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결 따뜻하다. 아무리 기온이 급강하했다고 해도 가을 날씨가 갑자기 겨울 날씨가 될 수는 없다. 견딜 만한 날씨다. 바람이 좀 강하게 불어서 그렇지, 자전거 타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우려 섞인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뿐만이 아니다.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마저 이 추위에 이 무슨 고생이냐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곤 한다. 추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추위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지는 않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이 정도 추위는 금방 가신다. 경우에 따라 시원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추위를 동반한 바람이다. 이놈의 바람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오늘 아침처럼 차가운 맞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할 때는 아무리 인내심을 발휘한다고 해도, 얼마 안 가 지치기 마련이다.

숙소를 나오자마자,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남열해수욕장 뒤로 해발 450여 미터나 되는 우미산이 버티고 서 있다. 도로가 그 산의 중턱을 가로지르며 지나간다. 이럴 땐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지나치게 황당한 경우를 당하게 되면 그 순간 그만 할 말을 잃고 마는 것과 같다. 멍하다. 그런 상태로 묵묵히 페달을 밟는다.

아름다운 해안도로
 아름다운 해안도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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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 절벽 위 도로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눈부시다. 티 없이 맑은 햇살이 수면에 부딪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반짝 튀어 오른다. 눈을 뜨고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다. 하늘이 맑은 날, 남해는 절반이 은빛이다. 해를 등지지 않는 이상, 짙푸른 바다를 보기가 힘들다.

우미산 절벽을 내려가는 길에 적금도 연륙교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한가운데 교각이 하늘 높이 서 있다. 바다 위에 다리를 놓고 있는 공사 현장을 보는 게 벌써 몇 번째인가? 반도를 도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인데, 반도와 연결이 되어 있는 섬들까지 죄 돌아서 나와야 하는 내게는 아직 그 다리들이 미완성 상태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리 건설 장면
 다리 건설 장면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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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륙교로 연결이 되어 있는 섬이란 게 대부분 난코스를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과 산길을 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 머리 속에는 섬이 사실은 섬이 아니라 '바다 위에 솟은 산'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게 박혀 있다. 오늘 내가 가야 하는 길에 백일도라는 섬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섬이 고흥반도에서 만나는 마지막 난코스가 되는 셈이다.

백일도 가는 길에 신곡리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할머니 두 분을 만난다. 두 분 중 한 분이 자전거를 세워두고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던진 첫마디가 '추운데 뭐 하러 그러고 다니냐'는 타박이다. '자전거를 타면 추운 줄 모른다'고 했더니, '그래도 마스크는 하고 다니라'고 한다. 어머니들 잔소리는 왜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어딜 가나 '추워서 어떻게 하냐'는 걱정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 걱정을 덜어줄 수 있을지 고민이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40일 넘게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면, 장하다는 생각보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앞서는 게 당연지사다. 그래서 요즘은 누가 '며칠째 여행을 하고 있는 거냐?'는 질문을 하면 '얼마나 됐을 것 같냐?'고 대충 얼버무리거나 날짜를 대폭 줄여서 대답을 하곤 한다.

두 분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한동안 내륙 지역을 달리다가 백일도로 들어가는 길에서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러면서 주변 풍경도 확 바뀐다. 산과 구릉으로 막혔던 시야가 바다를 향해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 풍경 역시 바다가 내비치는 푸른빛만큼이나 깔끔하고 청량한 분위기로 뒤바뀐다.

그곳의 포구가 크지 않아서 좋다. 그 마을에 딱 알맞은 크기다. 포구 너머로 백일도로 넘어가는 짧고 낮은 다리가 보인다. 다리 또한, 그 마을 그 포구와 딱 어울리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그 다리가 사람 머리카락 쭈뼛해질 정도로 높게 치솟은 형세가 아니어서 좋다. 그래도 이름만큼은 다른 연륙교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는지 '백일대교'라고 써 붙였다.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백일도 앞 포구
 백일도 앞 포구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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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 앞 무인도
 포구 앞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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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도는 좁고 길다. 굳이 바닷가 길을 가지 않아도 어디서건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그 바다가 참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 눈을 들어 바라다보는 곳마다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일도는 참 조용한 섬이다. 섬이 크지 않고 이렇다 할 산업 시설이 없어 덩치 큰 차들은 거의 오가지 않는다.

걸어 다니기에 딱 좋은 섬이다. 걸어 다니면서 섬 구석구석 숨은 풍경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무척이나 쏠쏠할 것 같다. 백일도는 바다를 앞에 두고 낮은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이 무척이나 정겨운 섬이다. 바닷가에 살게 되면, 이런 곳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백일도 감나무
 백일도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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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도 해안도로
 백일도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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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도를 나와서는 월정리를 향해 달려간다. 월정리는 특이하게 수백 년 된 사철나무 등이 400여 미터 해안가 방풍림으로 서 있는 마을이다. 해안에 소나무 방풍림이 서 있는 광경은 수도 없이 보아왔다. 방풍림으론 해송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곳엔 사철나무를 비롯해 이팝나무와 팽나무가 주종이다.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월정리까지 가는 길에 너무 허기가 져서 애를 먹는다. 중간에 콧구멍만한 매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마침 비상식으로 먹으려고 사두었던 간식거리도 다 떨어진 상태다. 월정리에 도착해서야 겨우 마을구판장이라고 써 붙인 매점이 하나 보인다. 그곳에서 초코파이 한 상자와 1.5리터 용량의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서는 허겁지겁 먹고 마신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초코파이 세 개째를 먹고 있을 때 누군가 옆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우편배달부가 감 두 개를 들고 서 있는 게 보인다. 나를 보고, '이거 드실래요?' 한다. 그 감 두 개를 얼떨결에 받아든다. 우편배달부가 보기에도 길가에 서서 초코파이를 먹고 있는 내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월정리에서 비로소 나무에 단풍이 드는 걸 감상한다. 북쪽은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아직도 남해는 녹색이 더 짙다. 단풍이라고 할 만한 기운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월정리 바닷가에 와서 단풍이 들고 있는 걸 확인하다니 별일이다. 바닷가에 서 있는 수백 년 아름드리 나무들이 색색으로 물들고 있는 광경이 이채롭다.

월정리 방풍림
 월정리 방풍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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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를 마지막으로 고흥반도와도 작별이다. 고흥반도에 들어선 지 5일째다. 참 길고도 험한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고흥반도는 그 고생을 하고도 결코 후회 같은 걸 할 일이 없게 아름다운 땅이었다. 지금까지 해안선 여행을 하면서 이처럼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준 곳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깊은 감동을 준 풍경이 여러 군데다.

고흥반도를 벗어나서는 벌교읍까지 죽 방조제 길을 따라간다. 방조제 위에서 내려다보는 갈대숲이 장관이다. 순천만 갈대숲에 버금가는 풍경이다. 벌교읍에서는 요즘 주먹 자랑이 아니라, 조정래 '자랑'이 한창이다. 소설 <태백산맥> 속 배경이 된 곳마다 안내판이 서 있다.

오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는 '소화다리'와 '중도방죽'이 있다. 두 곳 다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벌교에 가거든 꼬막만 찾지 말고, '작가 조정래'와도 꼭 인사를 나누고 오시기 바란다. 오늘 달린 거리는 85km, 총 누적거리는 2887km다.

벌교읍, 갈대밭.
 벌교읍, 갈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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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백일도, #벌교, #월정리, #고흥반도,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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