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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7월 시흥군에 철도 역부 8000명을 동원하라는 관찰사의 명령이 내려왔다. 8000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7월 9일 시흥군청에는 도민 수천 명이 운집하여 명령을 거두라고 요구했다. 군중의 기세는 흉흉했다. 이들 기세에 놀란 시흥군수는 관찰사에게 달려가 동원 숫자를 줄여달라고 청하여 3000명을 할당 받았다. 군수는 각 동(부락단위의 작은 마을)마다역부 10인씩 차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게다가 역부에 드는 비용마저 마을에서 공동부담 하라고 해서 그러잖아도 흉흉한 민심을 들끓게 만들었다. 일본은 역부에게 주는 노임이나 동원비용을 결제하지 않았다. 일본 토건 회사는 이를 관청에 떠 넘겼고, 관청은 다시 마을에 넘긴 것이다. 게다가 중간 관리자들이 역부의 노임을 횡령했다. 일본 토건회사에서부터 관찰사, 군수, 서기까지 줄줄이 횡령하여 안 그래도 적은 임금이 한 끼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경부선> 중에서

1905년에 개통되어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동맥 역할을 했던 경부선 건설에 얽힌 이야기 한 부분이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과 썩을 대로 썩어버린 조선의 관리 혹은 친일파들에게 얼마나 수탈당하고 짓밟혔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는 경기도 시흥군, 경부선 건설 실정에 그치지 않는다. 경부선에 이어 개통되는 경의선(서울~신의주, 1906)과 경원선(용산~원산, 1914)의 실정도 마찬가지였던지라, 당시 의지가지 할 곳 없이 핍박받는 조선인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가 불렸단다.

'힘깨나 쓰는 장정 철도 역부로 끌려가고, 얼굴 반반한 계집 갈보로 끌려간다'는.

눈물과 한의 철도 이야기-<경부선> 겉그림
 눈물과 한의 철도 이야기-<경부선> 겉그림
ⓒ 효형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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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효형 출판)은 일제강점기 이처럼 수많은 조선인들의 눈물과 한(恨)으로 건설되어 우리 민족과 지난 100년을 함께 해온 우리 철도(기차)에 얽힌 이야기다.

저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건설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시작으로 농촌의 젊은이들이 돈을 벌고자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서울로 향하던 1970년대까지, 개통 이후 질곡과 애환의 근·현대사를 함께 해온 철도에 얽힌 사연들을 역사적 순서에 따라 들려준다.

조선 침략을 하려면 반드시 철도를 건설해야 한다며 비밀리에 밀정을 파견하여 사전 답사까지 마친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자 혈안이 된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에게 준다. 그러나 모스는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금에 허덕이며 주저앉게 된다.

이런 모스에게 일본은 180만 원이란 거액을 내밀고, 결국 철도 부설권은 일본에게 넘어간다.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인천~노량진 간 약 33km에 이르는 구간이 우선 개통된다.

경부선은 일본이 조선침략과 수탈을 위해 건설한 철도였다. 일본은 조선 병탄과 장기적인 대륙 침략 계획으로 치밀하게 경부선 건설을 계획한다. 민간과 군대가 협력하여 철도 부설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는 한편,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자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의 필사적인 반대로 1890년 후반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토지수용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일본의 위협에 대한제국 정부는 결국 '경부 철도 합동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말이 조약이지, 강제 체결한 조약인지라 '철도 건설을 위한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등 불리한 조항 투성이인 조약이었다. 이런지라 철도가 지나는 곳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철도부지로 빼앗기고 거리로 나앉는 일이 속출했다.

일제강점기 철도 건설 현장1
 일제강점기 철도 건설 현장1
ⓒ 책속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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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철도 건설 현장2
 일제강점기 철도 건설 현장2
ⓒ 책속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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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봉산군에는 매일같이 2100명의 역부가 동원되어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전쟁 중이라 1냥에서 2냥의 일당을 지급한다고 했으나 거짓이었다. 때문에 집집마다 빚을 내어 역부로 나가는 형편이었다. 역부 일을 해도 차비와 식비 같은 기본적 비용이 필요한데, 일본은 최소한의 비용조차 지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 기장에서는 수백 명이 2000리나 떨어진 신의주 인근까지 끌려와 역부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노임은 물론 식비와 운임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수백 냥의 빚을 진 사람들이 딸을 팔고 부인을 빼앗기는 일도 빈발했다. 뿐만 아니라 철도 현장에서 중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 … 일본인은 조선인 역부를 노예 취급했다. - 책에서

이처럼 조선 대부분의 지역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역부 동원령이 내려지고, 역부에게 드는 비용마저 할당받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조선 전역은 철도 건설을 향한 원성과 분노로 들끓었다. 하지만 일본과 친일파들은 총칼을 앞세워 민심을 짓밟으며 역부들을 강제로 끌어가거나 속임수를 써서 수많은 조선인들을 철도 건설현장으로 내몰았다.

철도 건설 현장 곳곳에서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역부들이 속출한다. 경부선에 이어 경의선, 경원선이 점차 개통된다. 조선인들의 희생으로 건설된 철도가 개통될 때마다 조선 각지에서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철로에 놓아 열차가 탈선하게 하는 등과 같은 분풀이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기차는 점차 조선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그리하여 기차와 함께 조선인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화하고 만다.

일본이 건설한 철도가 우리 근대화에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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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은 '경술국치'라 부르는 한일합병이 강제로 이루어진지 100년 되는 날이다. '국권피탈일'이라고도 부르는 1910년 8월 29일로부터 어언 100년이 흘렀다는 상징성 때문에 방송과 신문은 떠들썩했지만, 그날이 지나고 나면 금방 망각한다. 심지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함으로써 우리의 근대화에 이바지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일본이 건설한 철도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철도가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긴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강제로 병탄하고 철도를 건설한 것이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철도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철도를 건설하지 못했을까. 그렇지 않다. 대한제국 정부도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독립협회 회원을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도 철도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할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기라 철도 건설을 일본에게 강탈당했을 뿐이다.-책에서

일본의 단발령에 격렬하게 저항하던 사람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노서아가비(커피)를 즐기며 서양 문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더불어 신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을 향하는 관부연락선을 타기위해 경부선에 몸을 싣는 젊은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리하여 1930년대가 되면 기차는 조선인의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자, 유학이나 돈을 벌고자 고향을 떠나며, 조선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 신천지 간도로 떠나며, 금강산이나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나기 위해 조선인들은 기차를 탔다.

그런데 조선인들이 이처럼 교통수단으로 기차를 이용할 때,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물자 수탈도구로 백분 활용한다. 압록강변의 울창한 목재와 광물자원을, 호남 지방의 쌀을, 강원도와 함경도의 석탄을 일본으로 실어 가는데 철도는 일등 역군(?)이 된다.

저자는 일제가 조선병탄과 대륙진출을 목적으로 건설한 우리 철도에 얽힌 이와 같은 수많은 사연들을 풍부한 역사 자료들을 바탕으로 쉽고 명쾌하게 들려준다. 때문에 우리 땅에 철도가 건설되던 1890년대 후반 이후 1980년대까지, 중요한 사건들이 참 많아 알려고 들면 숨 막히도록 복잡하게 다가오던 우리 근·현대사를 쉽게 정리해 볼 수 있었다.

혹자들은 일본의 철도 건설이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망언을 한다. '눈물과 한의 철도 이야기'란 부제의 이 책 <경부선>이 부디 그들로 하여금 당시 일본의 철도 건설로 소중한 생명을 빼앗긴 수많은 조선인들을 향해 백배사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읽었다.

일제강점기 어느 철도역
 일제강점기 어느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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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산'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경원선이 건설되어 그 옆을 지나갔다. 마을 옆에 간이역이 생겨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어 '신고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역 이름도 '신고산역'이 되었다. <신고산 타령>은 개화기의 민요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에 대한 반발과 기차가 달리는 소리에 시골 처녀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가난 때문에 팔려가는 여자가 대부분이었으나, 새로운 문명을 동경하여 스스로 집을 떠나는 여자도 있었다. - 책에서

이 부분도 눈길을 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신고산이 우르르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로 시작되는 이 민요가 궁금했던 터라, 이 민요와 관련된, 당시 조선의 수많은 부녀자들이 팔려간 오사카 숭화전 방직공장의 이야기는 좀 더 특별하게 읽혔다. 저자는 이처럼 철도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철도 때문에 생겨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역정을 드라마처럼 재현하여 들려줌으로써 책 읽는 맛을 더하게 한다.

외에 <감격시대> <귀국선> <비 나리는 호남선> <보리밭> 등 오늘날에도 널리 불리우는 노래에 얽힌 사연들이 소개된다. 이광수, 이상, 윤심덕, 윤용하 등의 파란만장하고 불우한 삶이, 박정희의 출세를 향한 부단한 몸부림이,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기관사가 되어 40년을 기차와 함께한 기관사 박천석의 회상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소개된다.

11월 30일, KTX 서울~부산 간 2시간 8분대 시범운행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떴다. 전국을 1시간 30분 통근권으로 묶는다는 계획도 진즉에 발표되었던 것 같다. 전국 어디에서든 1시간 30분이면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엄청난 속도에 덜컹거리는 기차와 함께 남아 있는 옛 시절의 추억들을 떠올리기란 어쩌면 무색하리라. 하지만 그래도 100년 전 철도를 건설하고자 수많은 조선인들이 흘린 무수한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만큼은 자주 떠오를 것 같다. 경부선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일본의 방직공장으로 팔려간 수많은 조선 처녀들의 눈물도.

덧붙이는 글 | 눈물과 한의 철도 이야기-<경부선>|이수광(지은이)|효형출판|2010-09-30|값 :12,000원



경부선 - 눈물과 한의 철도 이야기

이수광 지음, 효형출판(2010)


태그:#경부선, #일제강점기, #관부연락선, #철도건설,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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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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