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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비리? 비리? 그게 뭐야?"

"옛날에 토끼가 다녔던 아주 좁은 벼랑길이래."

"아, 길을 얘기하는 거야? 그런데 왜 '비리'라고 해?"

"나도 처음에 그게 궁금했는데, 벼랑이라는 낱말이 이쪽 말로 그렇다고 하네. 거 왜 있잖아 우리도 어렸을 때 담벼락을 '비림박', '비룸박' 뭐 이렇게 말했잖아. 그것처럼 여기 문경 쪽 사투리로 벼랑길이 '비리', '벼루' 뭐 그렇게 말했던 거라."

"아아! 그렇구나. 난 또 유식하게 한자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거지로 한자를 붙인 말인 줄 알았잖아. 하하하! 어쨌거나 옛말을 살려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참 괜찮네."

 

낯선 이름을 지닌 '토끼비리' 이곳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그 옛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꼭 거쳐 가야하는 옛길이랍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벼랑 위에 난 아주 좁은 길을 말하는 거랍니다. 이곳에 얽힌 옛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바로 고려 때에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일 때, 절벽과 강물에 길이 막혀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때마침 토끼 한 마리가 아주 좁은 길로 내달리더랍니다. 그래서 토끼 뒤를 따라 길을 찾아 빠져나갔다는 얘기지요. 어떤 이는 남쪽으로 진격하다가 발견한 곳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얘기로는 왕건이 견훤에 쫓겨 도망가다가 발견한 길이라고도 하네요.

 

아무튼 그 뒤로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 그리고 상인들도 이 길을 반드시 거쳐 갔다고 하는데, 이름만큼이나 좁고 매우 험한 길이더군요. 실제로 좁은 길을 따라 가다 보니, 옆에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발아래로는 낭떠러지랍니다. 게다가 길은 매우 좁았어요. 그나마 이곳이 명승 제 31호로 지정된 곳이라서 들머리부터 몇 십 미터는 난간을 따로 만들었더군요. 거기까지는 가는데 크게 힘들지 않았어요. 아래를 내려다봐도 난간 때문에 크게 위험하단 생각을 못했는데, 아뿔싸! 얼마 가지 않아 그 난간마저도 없어진답니다. 길도 더 좁아지고 바윗돌을 밟고 지나가야 하더군요.

 

 

"자기야 기어간다고 내 꾸짖지 않을게"

 

"아이고 발 조심해래이, 난간이 없으니까 밑에 보면 억수로 어지럽다. 천천히 와."

 

남편이 나보다 먼저 앞서 가며 사진을 찍고 가는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남편은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길을 가려면 매우 힘들어한답니다. 위험해 보이는 길은 뛰어가듯이 얼른 뛰어넘어 가네요. 실제로 벼랑 밑을 내려다보니, 나도 아찔한 게 어지럽더군요. 게다가 우리가 밟고 있는 바위를 보니, 돌이 반질반질합니다. 길이 거의 바윗돌 위로 나 있는데 이렇게 된 까닭은 바로 그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갔기 때문이래요.

 

"하하하! 자기 시기 웃기여! 그렇다고 거길 뛰어가면 어떡해?"

"아, 난 이런 길 참말로 싫어여. 이런 데를 우째 다녔단 말이고."

"으하하하! 자기야 이것 좀 봐! 딱 자기 보고 하는 말인 거 같은데?"

 

관갑의 사다리길

요새는 함곡관처럼 웅장하고

험한 길 촉도 같이 기이하네

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요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조선초기의 문신인

면곡(綿谷) 어변갑(魚變甲)이 쓴 시

남편이 험한 길을 얼른 뛰어넘듯이 가는 걸 보고 웃음이 나와 크게 웃었는데, 옆을 보니 안내문이 하나 있는데 '관갑의 사다리길'이란 제목을 단 시가 한 편 있더군요. 그 시를 보는 순간 어찌나 우습든지 남편의 몸짓과 견주어보며 한바탕 웃었답니다.

 

"거봐 험한 길일수록 천천히 가야지 그러다 넘어지면 어쩔라고? 여기도 뭐라카잖아. 넘어지는 건 빨리 가기 때문이요.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 말라는데, 자기야 걱정하지마 기어가도 내가 절대로 꾸짖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

"하하하! 아니 그런 시도 있단 말이야? 난 여기 겁나서 빨리 지나쳐 오는 바람에 못 봤는데? 아이 아무튼 난 이런 길 싫어여!"

 

 

 

 

지난날, 옛 선비들이 과거 길에 오르면 반드시 거쳐 가야했던 토끼비리길, 워낙 많은 이들이 다녀서 바윗길이 반질반질해질 만큼 윤이 나는 길, 좁고 험한 길이지만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볼 수 있다는 것도 무척 재미나고 값진 경험이더군요. 토끼비리 길 끝자락은 바로 뒤에 있는 오정산 등산길과 맞닿아 있답니다. 우리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 이제 고모산성으로 갑니다.

 

성문 안 주막거리, 막걸리 한 잔에 지친 몸을 달래고

 

토끼비리 길을 다시 되돌아오면, 고모산성에 올라가는 진남문을 만납니다. 성문 안에 들어오니, 목이 몹시 마르네요. 가지고 온 물도 다 마셨고 날씨는 무덥고 몸도 지칩니다. 때마침 저 앞에서 무언가를 팔고 있는 듯 보이는 곳이 있어요. '꿀떡고개'라고 하는 고갯길에다가 주막을 차려놨는데, 말이 주막이지 그늘막이 있는 평상이었어요. 바로 앞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되살려놓은 듯 초가로 지은 주막거리가 있군요. 그 옛날에는 과거 보러 가던 선비가 토끼비리 길을 따라 와서 쉬었다 가곤 했을 거예요.

 

 

"아이고 잘됐다. 덥고 목도 마른데 여기서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자!"

"좋지요! 하하하"

 

평상이 서너 개쯤 있었는데, 모두 손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처럼 토끼비리 길을 다녀왔거나 바로 위에 있는 고모산성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에요. 주모를 불러다가 막걸리 한 병과 '정구지적(부추전)' 하나를 시켰어요.

 

두 가지 다 해봐야 오천 원밖에 안 하더군요. 값은 매우 쌌지만 맛은 일품이더군요. 게다가 이 더운 날, 몸도 지치고 목도 말랐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옛날 사람들도 우리처럼 이 주막거리에서 막걸리 한 사발씩 하곤 했겠다."

"맞아. 그 옛날에도 지금처럼 주막이 있었다고 하니, 목도 축이곤 했을 거야."

"어쩌면 술 한 잔 한 잔 더 하다가 그만 취해서 이 꿀떡고개 못 넘어간 사람들도 있었을 걸?"

"하하하 맞다 진짜 그랬겠다. 옛날에는 재 넘어가기 전에 꼭 이런 주막이 있었잖아.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한 잔 한 잔 하다가 술에 취하고 해도 넘어가고 해서 여서 자고 다음날 날 밝으면 넘어가곤 했을 거야. 그리고 그땐 산에 호랑이도 있었잖아."

"하하하 그러게, 자 우리도 어서 일어나자 고모산성 둘러보자면 얼른 가봐야지."

 

막걸리 한 잔에 옛 사람들 이 고개를 넘어갈 때를 생각하다가 이젠 고모산성에 올라가려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들립니다. 다듬이질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도 들리는데….

 

'토닥토닥 토닥 토다다닥'

"문경새재는 웬 고오개에엔고, 구보야아 구보~야아아아 눈물이로구나!"

 

바로 아까 우리한테 막걸리를 내주던 주모였어요. 아주머니 두 분이 서로 마주 앉아 다듬이질을 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정겨운지 모릅니다. 게다가 구성지게 노랫가락을 뽑는데, 그 소리 또한 참 멋들어지더군요. 알고 보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위해 다듬이질을 하며 즉석공연을 펼치는 거더군요. 다듬이질 소리에도 가락이 있어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으며 장단에 맞춰 두들기더군요.

 

"아따 아지매, 노랫가락을 우째 그리 잘하요?"

"아이고 고맙심더, 잘한다고 하니께 억수로 기분 좋네예."

 

다듬이질에 맞춰 부르는 주모의 노랫소리에 한동안 발걸음을 붙들어 맵니다.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지요. 구성지고 또 구슬픈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이제 진짜로 고모산성에 올라갑니다.

 

 

신라 때 쌓은 고모산성, 경북 제 일경 진남교 둘레와 멋스런 어울림

 

고모산성은 신라 때 북진정책의 하나로 쌓은 산성이랍니다. 산성 앞에는 영강이 흐르고 마주보는 어룡산과 동쪽으로는 오정산이 있고, 강 위로 나 있는 '진남교'가 어우러져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이곳이 바로 경북 팔경 가운데 제 1경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 산성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 이야기들이 또 퍽 재밌답니다.

 

아까 주막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고모산성을 마고할매성이라고도 했답니다. 옛날 한 할아버지가 날마다 돌을 주워 하나씩 하나씩 쌓았는데, 그걸 본 부인(마고할매)이 말을 타고 다니며 단숨에 이 성을 다 쌓았다고 해서 '마고할매성'이라고도 일컫는다고 하더군요. 전설이기에 현실과는 맞지 않는 얘기지만, 나름대로 재미나더군요.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라 때 이 둘레로 산과 강이 가로막고 있고, 나무가 많아서 숲이 매우 울창했답니다. 그런 곳이기 때문에 전쟁이 나도 화살을 쏠 수도 없고 불도 못 지르기 때문에 성벽을 쌓았대요. 그리고는 성 위에서 아래로 주먹만 한 몽돌을 던져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답니다. 실제로 이곳을 발굴할 때, 성 아래에 돌무더기가 무척 많았다고 하더군요.

 

 

산성 위에 오르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참으로 멋스럽더군요. 푸른 영강이 흐르고 그 위에 우리가 처음 올라오던 철길도 보입니다. 또 진남교가 저 끝에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네요. 산과 강, 옛 성벽이 어우러져 참으로 경북 제 1경이라 할 만 했어요. 식구들끼리 어머님을 모시고 올라온 이들도 있었는데, 그 어머님이 한동안 탄성을 지릅니다.

 

다리가 불편한 듯 성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힘겨워보였는데,

 

"아이고 좋다. 이렇게 좋은 데가 있었구먼."

"어무이는 어디 사시는데예?"

"문경 삽니더. 그래도 내 여는 첨 올라와봤고만."

"참 좋지예?"

"그러게예. 내 오늘 여 안 와봤으믄 우짤뻔 했는지 모르겠네. 여를 언제 또 와보겠능교."

 

하면서 연신 감탄을 합니다. 온 식구가 함께 이렇게 나들이 나온 모습도 참 좋았는데, 나이 드신 어머님을 모시고 온 모습이 퍽 정겹고 살갑게 느껴졌답니다.

 

천년의 발자취, 옛 선비들이 다녔던 과거길 토끼비리와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고모산성, 그리고 꿀떡고개 주막거리에서 만난 주모의 다듬이질과 노랫소리, 고모산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문경을 몹시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내친 김에 다음 주에도 문경 나들이를 꿈꿔봅니다. 이번에는 옛 과거길 따라 가는 '문경새재'로 가볼 참이랍니다.  

 

 

▲ 다듬이질 고모산성 꿀떡고개 주막에서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처음엔, 다듬이질과 함께 문경새재 아리랑도 함께 불렀는데 그땐 아쉽게도 영상으로 담지를 못했지요. 주모의 구성진 노랫가락 소리도 참 멋스럽던데, 아쉽지만 다듬이 방망이 소리 한 번 들어보세요. 이 다듬이질도 강약이 있고 장단이 있더군요. 참 정겨운 소리랍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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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토끼비리, #고모산성, #꿀떡고개, #마고할매,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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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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