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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좌소가 있던 자리에서 바라본 창덕궁. 우뚝 솟아있는 건물이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이다.
▲ 창덕궁 시좌소가 있던 자리에서 바라본 창덕궁. 우뚝 솟아있는 건물이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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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시좌소(時坐所)를 찾았다. 궁은 아니로되 임금이 있는 곳이다. 영양위 정종의 집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임금의 누이. 즉, 문종의 외동딸 경혜공주의 집이다. 부왕이 승하한 경복궁이 적적하다하여 창덕궁으로 이어하려 했으나 방치돼있던 창덕궁은 임금이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수리공사 중에 누이 집에 있는 것이다.

경혜공주를 끔찍이 사랑했던 문종은 공주가 배필을 맞아 출가할 때 향교동의 민가 30여 채를 철거하여 집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창덕궁 요금문 앞 향교동은 힘 있는 자들의 집단 주거지다. 집이 헐리게 된 사대부들이 반발했다. 급기야 대간(臺諫)이 나섰다.

"사람이 사는 곳을 철거하여 집을 지으면 원망이 일어날 것이니 정지하소서.'
사헌부 지평 윤면이 직언했다.

"부마에게는 으레 집 한 채를 지어 주는 것이니 지어 준다면 모름지기 집터를 가려야 할 터, 어느 곳에서 새삼스럽게 빈 터를 얻겠는가?"

문종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궁궐 못지않은 집을 지어 주었다. 현재 시좌소로 쓰이고 있는 집이다.

단종이 태어나고 현덕왕후 권씨가 승하한 곳. 문종은 세자시절 이곳에서 2명의 부인을 생별하고 1명의 부인을 사별했다. 경복궁에 있다.
▲ 자선당 단종이 태어나고 현덕왕후 권씨가 승하한 곳. 문종은 세자시절 이곳에서 2명의 부인을 생별하고 1명의 부인을 사별했다. 경복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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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혜공주는 아버지가 세자일 때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세자의 딸이기에 공주가 되지 못하고 평창군주라 불렀다. 그가 태어날 때, 세자에게는 세자빈 순빈봉씨가 있었다. 간택 후궁 권씨에게 시선이 꽂힌 세자가 후궁을 총애하자 순빈봉씨는 궁녀 소쌍을 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애로 맞불을 놓았다. 그럴수록 세자는 권씨에게 빠졌고 승은을 입은 권씨는 공주를 낳았다. 비로소 왕실의 여자가 된 것이다. 품계도 세자궁 내명부 하위품계인 종4품 승휘에서 종3품 양원으로 승격했다.

퇴출된 순빈봉씨에 이어 세자빈에 책봉된 권씨는 현재 임금인 아들을 낳고 다음날 산후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평창군주 나이 5세였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잃은 군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병세가 악화된 세종이 손자사위 들이기를 소망했다. 왕실이 바빠졌다. 서둘러 배필을 골랐다. 동지중추 정충경의 아들 정종(鄭悰)이 선택되었다. 부랴부랴 혼례를 서둘렀다. 배필을 정한지 8일 만인 1월24일 가례가 올려졌다. 군주가 혼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2월17일 세종이 훙(薨)했다. 아버지가 등극하자 군주(郡主) 꼬리표를 떼고 공주(公主)가 되었다.

행복도 잠시, 문종이 등극한지 2년 만에 승하했다. 동생이 왕위에 올랐지만 외롭다. 이 세상에 혈육이라곤 동생밖에 없다. 왕위에 있는 동생 역시 고독하다. 이 세상에 기댈 곳이라곤 누나밖에 없다. 그래서 임금이 누나 집에 와있는 것이다. 그 집에 수양이 온다니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시좌소 바로 앞에 있는 창덕궁 서문
▲ 요금문 시좌소 바로 앞에 있는 창덕궁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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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옥체 강녕하신지 문후 여쭙니다."

수양이 예를 갖췄다. 하지만 보통의 신하들이 갖추는 예하고는 격이 달랐다. 큰절을 생략하고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예, 어서 오시지요. 숙부."

나이도 어리다. 종실로서는 숙질관계다. 신하로 맞아들이기에는 거북한 수양이다.

"청할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수양이 운을 뗐다. 승전색(承傳色)김연과 환관 한숭 그리고 영양위 정종이 수양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잔뜩 긴장했다.

"전하께서 왕비를 맞아들이는 예(禮)를 늦출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계청(啓請)하려고 하였으나 상제(祥祭) 기간이 지나지 않아서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 일에 대하여 생각한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지금 전하의 몸은 곧 종사의 몸이요 만민의 주인인데 어찌 개인 한 몸으로만 생각하시고 만백성 종사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모름지기 왕비를 맞아들이소서."

임금의 혼인문제를 들고나온 수양, 그속에 감추어진 꿍꿍이는 무엇일까?

부왕의 급서로 왕위에 오른 어린 임금, 이제 미령 11세다. 아직 장가들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다. 임금은 나랏님이고 왕비는 만백성의 국모인데 백성들의 어머니 자리가 비어 있으니 장가들라는 것이다.

"불가하다, 또한 이 일은 입 밖에 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단호하게 잘랐다. 삼년상이 지나지 않았으니 거론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이 어찌 예(禮)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종사의 문제가 더 크므로 상례(常例)에 구애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순(舜) 임금도 예법을 어기고 장가들었는데 어찌 예가 아님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불효 중에 가장 큰 것이 후사가 없는 것이기에 계청한 것입니다. 이 일은 종사에 관계되니 윤허하소서."

"진실로 불가하다, 다시 말하지 말라."

"신이 종사의 대계로써 청하는 것이니 전하께서 신의 청을 가납하시기가 어려우시면 대신들과 의논하여서 가부를 결정하소서."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

수양이 물러나왔다. 승전색(承傳色)김연과 환관 한숭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양의 입에서 임금의 혼인문제가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영양위 정종 역시 의표를 찌르는 수양의 계청 이면에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광화문 홍예를 통하여 들여다 본 경복궁. 전면에 보이는 것이 흥례문이고 그 다음 근정문을 지나면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이다.
▲ 속살 광화문 홍예를 통하여 들여다 본 경복궁. 전면에 보이는 것이 흥례문이고 그 다음 근정문을 지나면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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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좌소를 물러나오던 수양이 도승지 박중손을 찾았다.

"전하께서 나의 계청으로 미편해 계신다. 마음이 진정되신 후에 이를 올려라."

봉장(封章)을 건네받은 박중손이 수양이 시좌소를 나가자마자 임금에게 올렸다.

"신은 세종대왕과 문종대왕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기를 생각하니 호천망극(昊天罔極)합니다. 신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충심으로 보필하고자 감히 관견(管見)을 가지고 진술하오니 자애로운 마음으로 굽어 살피소서.

첫째는 바른 사람을 가까이 할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임금의 덕(德)도 신하에게 달렸고 부덕(不德)도 신하에게 달렸다.' 하였습니다. 또 '신하가 바르면 임금도 곧아진다.' 하였으니 임금이 덕을 기르고 업(業)을 닦는 것은 신하에게 달렸다 하겠습니다.

둘째는 백성의 힘을 아낄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는데 근년에 공역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현릉 역사(役事)야 폐할 수 없다하겠으나 창덕궁과 흥인문 영선은 불요불급한 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살 소지가 다분합니다. 실제로 창덕궁 역부가 길에서 굶어죽었습니다. 신은 상제 중에 이토록 큰 공사를 벌였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급하지 않은 공사는 정지하여 백성을 휴식하게 하소서.

셋째는 군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용맹스러운 무부(武夫)는 공후(公侯)의 간성이다.' 하였습니다. 옛 성왕(聖王)은 무부의 사정을 살펴서 뜻을 펴게 하고 노고를 보상해주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임금을 위해 싸웠습니다. 우리나라는 힘이 넉넉지 못하여 전하의 친위 내금위(內禁衛) 군사들마저 녹봉이 매우 박하고 번(番)을 쉴 여유도 없으니 금군(禁軍)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연변 수령들은 10년이나 20년에 한 번 자리가 바뀌는데 체임(遞任)하여 돌아와서는 1기(期)를 채우지 못하고 도로 수령을 제수 받아 나갑니다. 부인이 평생 몸을 바치는 것은 남편인데 견우성과 직녀성의 애절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벼슬 있는 것이 벼슬 없이 편안히 사는 것만 못하다는 하소연이 나오는 것입니다.

넷째는 도적을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허물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시킨다.' 하고 또 '고의로 지은 죄는 형벌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가난과 배고픔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고의로 저지른 도적질은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돈 1전(錢)과 1과(瓜)를 훔친 것도 목을 베었습니다. 비록 지나치게 엄한듯 하나 큰 뜻으로 보면 과하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은 중인은 10관의 자산을 잃어도 살아갈 수 있으나 그 아래의 사람이 그만한 자산을 잃었다면 굶주려도 먹을 것이 없고 추워도 입을 것이 없게 되어 굶어 죽게 됩니다. 이는 도적이 사람에게 칼을 대지 아니하였을 뿐 사람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은 학문이 거칠고 허술하여 말이 글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채택하소서."

수양의 돌발행동은 환관 김연과 한숭에 의해 즉각 안평과 김종서에게 전달되었다.


태그:#수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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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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