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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싸움을 하지 말자."

주말이 지나면 직원인 '띨라(원래 이름이 있지만 하는 짓이 서툴러 애칭을 부릅니다)'네 집에는 커다랗게 써붙인 종이와 함께 마누라가 던진 그릇이며 빗자루 등 부부싸움의 흔적이 보입니다.

이번 주말만 해도 만 페소, 우리 돈으로 25만 원을 날렸으니 마누라가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띨라의 한 달치 월급을 날린 것은 어릴 때 우리가 한쪽 다리를 들고 껑충껑충 뛰며 상대를 쓰러트리는 닭싸움이 아니라, 진짜 닭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그 닭싸움입니다.

사봉 경기장 입구. 15페소의 입장료를 받지만 외국인 특별대우(?) 공짜로 들어갑니다.
 사봉 경기장 입구. 15페소의 입장료를 받지만 외국인 특별대우(?) 공짜로 들어갑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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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은 중앙의 링을 내려다 보는 형태로 우리나라 씨름장과 비슷합니다. 
주말이면 사봉 경기장은 필리핀 남자들로 넘쳐 납니다.
 경기장은 중앙의 링을 내려다 보는 형태로 우리나라 씨름장과 비슷합니다. 주말이면 사봉 경기장은 필리핀 남자들로 넘쳐 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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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접전 '투계'

필리핀 말로 '사봉'이라 불리는 닭싸움은 1521년 마젤란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그 기록이 있을 정도로 필리핀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한가한 주말, 띨라가 그토록 푸욱~ 빠져 있는 사봉 경기에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주말에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사봉' 경기가 열리는 곳입니다. 입장료가 있지만 카메라를 든 외국인이라 공짜로 들여보내 줍니다.

경기장은 우리나라 씨름장과 비슷하지만 수많은 필리핀 남자들이 일제히 한 곳을 응시하며 함성을 지르고 열광하는 분위기에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모래가 깔린 링 중앙으로 닭 주인들이 각각 자신의 닭을 안고 입장합니다. 이때 관중들은 닭의 상태를 재빨리 확인한 후 승리할 것으로 보이는 닭에 돈을 겁니다.

'크리스토'라 불리는 베팅 요원들은 요란한 몸동작과 수신호로 베팅을 접수받습니다. 이때쯤 되면 싸움닭보다 더 흥분한 사람들의 함성이 주변 공기를 들썩일 정도로 커집니다. 베팅이라고 해서 베팅 용지에 원하는 닭과 액수를 미리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손가락 또는 말로 액수를 정하면 베팅 요원이 이를 기억하고, 경기를 한 후에 진 쪽의 돈을 받아 이긴 사람에게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관중석 곳곳에 위치한 크리스토들이 메론, 왈라를 외치며 베팅을 종용하고 수많은 수신호들이 오고가며 즉석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며 아수라장이 됩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관중석 곳곳에 위치한 크리스토들이 메론, 왈라를 외치며 베팅을 종용하고 수많은 수신호들이 오고가며 즉석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며 아수라장이 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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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는 불과 몇 분, 때로는 그보다 짧은 순간에 결정됩니다. 두 마리 닭 중 한 마리가 죽거나 닭 주인이 하얀 수건을 던져 기권 의사를 밝히면 경기는 끝이 납니다. 똑똑한 닭은 상당한 전술을 구사하기도 하며 주인이 외치는 말을 알아듣는다고도 합니다.

어이~ 외국인 친구, 한번 걸어보지

관중석 뒤쪽에 멀찌감치 서서 사진을 찍으며 대여섯 경기를 지켜보다 차츰 경기 규칙을 알게 되었을 즈음이었습니다. 크리스토 하나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어이 외국인 친구! 이리 가까이 오지 그래?"

애써 자리 잡은 사람들을 쫓아내듯 몰아내고 앞쪽으로 내가 서 있을 만한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곤 넉살좋은 표정으로 묻습니다.

"베팅해야지? 한 500페소 어때?"

500페소면 한국 돈으로 약 1만2000원입니다. 아까 보니 대부분 200~300페소 정도 던데 외국인이라고 나름 세게 부르는 모양입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시선은 싸움닭보다 낯선 외국인 여자에게 쏠려 있습니다. 옆에 있던 띨라도 한 번 걸어보라고 부추깁니다.

싸움을 할 두 마리의 닭들이 주인과 함께 입장하면 쌈닭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서로의 몸을 쪼게 합니다.
 싸움을 할 두 마리의 닭들이 주인과 함께 입장하면 쌈닭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서로의 몸을 쪼게 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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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흰 놈에 200페소. 오케이?"
"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구경꾼들 사이에서 엄청난 환호가 튀어나왔습니다. 그 닭에 베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더니 몇몇이 내게 다가와 흥분한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너 정말 닭 잘 골랐어. 저 놈 무지 센 놈이야."

같은 닭에 건 사람들입니다. 닭들의 싸움이 시작되면 함성을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숨소리만 들립니다. 나도 사진 찍는 것도 잊고 경기에 몰입합니다. 하지만 관중들의 긴장감과 달리 싸움닭들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 멀뚱거리며 경기장을 헤매고 있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숨죽이고 있는 구경꾼들의 심장은 오그라듭니다. 보다 못한 심판이 두 닭을 잡아 다시 한 번 서로를 쪼게 합니다.

싸움은 닭의 다리에 작은 칼을 매달아 놓고 닭들이 점프하면서 다리로 가슴을 찌르게 되는데 이 행동이 세 번이면 경기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상 세번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번만 찔러도 상대닭은 힘도 잘 못씁니다.
 싸움은 닭의 다리에 작은 칼을 매달아 놓고 닭들이 점프하면서 다리로 가슴을 찌르게 되는데 이 행동이 세 번이면 경기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상 세번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번만 찔러도 상대닭은 힘도 잘 못씁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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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다다닥!"

자세히 보니 부리로 쪼는 게 아니었습니다. 발 뒤에 뾰족한 것(다리 뒤쪽에 있는 돌기 부분에 단 낫 모양의 칼)으로 순식간에 때립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 번 도약에 5회 발차기 신공으로 상대를 쓰러뜨립니다. 한 번의 접전으로 상대편 닭은 꼬꾸라졌습니다. 깃털을 세우고 대항해 보지만 다시 한 번 펀치를 맞고는 축 늘어졌습니다. 우리 편 닭도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한쪽이 케이오(KO)가 되었는데도 심판은 승패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는 우리 편 닭이나 골골대는 상대편 닭이 일어나지 못해도 잡았다 놓았다를 여러 번 반복합니다. 하지만 한 번 충격을 받은 닭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은 힘들어 보입니다. 경기 종료.

심판은 승자와 패자를 확실히 가리기 위해 계속 싸움을 붙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습니다.
 심판은 승자와 패자를 확실히 가리기 위해 계속 싸움을 붙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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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률 50%의 도박, 사봉

크리스토는 내게도 200페소를 던져줍니다. 승률 50%, 이렇게 흥미진진한 게임이 없습니다. 이 맛에 돈내기를 하나 봅니다. 이기기만 하면 가진 돈의 두 배의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저 구경이나 하자고 온 닭싸움 경기장에서, 200페소 정도는 잃어도 그만이라고 시작한 게임에 푹 빠져 어느새 한탕 대박칠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다음 경기를 기다립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우렁찬 화려한 색깔의 싸움닭에게 300페소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호각 소리과 동시에 상대가 머리를 땅에 깔고 달려오자 이 녀석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더니 상대방의 공격에 바닥에 처박혀 버렸습니다. 목소리만 우렁찬 약골~ 닭 때문에 순식간에 300페소가 날아갔습니다.

시합이 시작되는 시점, 관중들의 함성에 경기장이 들썩거리는 대단한 열기입니다. 마치 한국과 일본의 축구시합을 할 때 시작 휘슬을 울릴 때의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시합이 시작되는 시점, 관중들의 함성에 경기장이 들썩거리는 대단한 열기입니다. 마치 한국과 일본의 축구시합을 할 때 시작 휘슬을 울릴 때의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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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할 거야?"
"당연하지."

'한 번만 더 해보자. 이번엔 틀림없어'

나도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승부욕이 불타는지 몰랐습니다. 내 뇌에는 이미 정상치 이상의 '도파민'이 분비되어 신경조직이 비대해져 더 큰 자극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경기, 또 한경기, 마지막 한 번만 더… 하던 나는 주머니에 있던 1000페소를 다 잃고서야 경기장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닭이 이겨도 닭주인에게 특별한 보상은 없지만 자기 닭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기에 자기 닭에 돈을 겁니다. 싸움닭 전용 수입 사료를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이 개발한 비장의 영양제에는 비타민과 한국산 인삼도 들어있다며 자랑합니다.
 닭이 이겨도 닭주인에게 특별한 보상은 없지만 자기 닭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기에 자기 닭에 돈을 겁니다. 싸움닭 전용 수입 사료를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이 개발한 비장의 영양제에는 비타민과 한국산 인삼도 들어있다며 자랑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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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을 앞 둔 닭들의 발목에는 7~8cm로 낫모양으로 휘어진 시퍼런 칼날이 묶여있습니다. 경기 전까지는 가죽 칼집에 잘 묶여져 있습니다.
 결전을 앞 둔 닭들의 발목에는 7~8cm로 낫모양으로 휘어진 시퍼런 칼날이 묶여있습니다. 경기 전까지는 가죽 칼집에 잘 묶여져 있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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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싸움이 열린다고 해서 언제나 커다란 경기장에서 거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동네 어귀의 한 모퉁이를 막아 특설링(?)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내기를 합니다.
 닭싸움이 열린다고 해서 언제나 커다란 경기장에서 거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동네 어귀의 한 모퉁이를 막아 특설링(?)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내기를 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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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싸움을 하려는 성질을 가진 이 닭들은 키울 때도 같은 닭장에 키우지 못합니다.  한 마리씩 자기 집이 따로 있습니다.
 본래 싸움을 하려는 성질을 가진 이 닭들은 키울 때도 같은 닭장에 키우지 못합니다. 한 마리씩 자기 집이 따로 있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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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밖에는 나처럼 돈을 잃은 사람들이 맥주로 속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경기장을 나서는데 아까 싸움에 진, 내 돈 300페소를 날리게 한, 결국 죽어 버린 닭을 안고 가는 주인이 보입니다. 싸움에 진 닭의 운명은 죽음뿐입니다. 경기 중에 죽거나 살아 있어도 중상으로 곧 죽는다고 합니다. 병아리 때부터 애지중지 키운 닭이 싸움에도 지고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질 터이고, 동시에 내기에서 돈을 잃은 상실감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어때? 재미있지? 잘만 하면 대박치는 거야. 다음 주에도 같이 오자."

띨라는 닭싸움 동지를 얻어 기뻐합니다. 그날 이후 우리 집 벽에도 크게 하나 써 붙였습니다.

"사봉! 경기장 근처에도 가지 말자!"


태그:#필리핀, #사봉, #투계, #닭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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