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락없었다. 마치 뮤지컬 무대의 주인공에게 스팟라이트(spot light)라도 떨어지듯 내가 내딛는 한 걸음마다 노란 불빛이 길을 비추어준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은 저녁 어스름의 경주 남산 골짜기. 이 산 속에 가로등이 있을 턱이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데… 뭘까? 뭘까?

이런 생각에 몇 번이고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래 봤자 산중에 가로등이 있을 턱이 없다. '내가 뭘 잘못 봤겠지' 하며 다시 무시하고 걸으니 곳곳에 다시 켜지는 노란 불빛. 고개 들면 없어지고, 고개 숙이고 걸으면 다시 켜지는 게 영락없는 도깨비놀음이다. 정말 뭐지?

노란 가로등이 켜진듯한 경주남산
▲ 노란 단풍물이 든 경주남산 노란 가로등이 켜진듯한 경주남산
ⓒ 한선영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혼자서 몇 번 바보 같은 고갯짓을 하다보니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고개를 들 때마다 내 머리 위에 가지를 뻗고 있는 노란 은행잎. '에이, 설마~' 하며 확인해보니 맙소사! 정말 나뭇잎들이 노랗게 길을 비추고 있다. 천천히 걸으며 다시 보니 구름 뒤에 숨은 햇빛이 나뭇잎에 비치어 노란 가로등이 켜진 것이었다. 비가 흩뿌린 뒤의 구름이 자연스레 필터 역할을 해준 셈이다.

경주 남산은 예전부터 '며칠 머무르면서 제대로 봐야할 곳'으로 꼽아둔 터였다. '경주 남산'이라는 곳이 스치듯 다녀갈 곳도 아니거니와 하루 이틀 새에 금방 본다고 알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남산행은 예습하는 셈치고 그냥 눈에 익히고 오자' 하는 생각으로 출발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경솔하고 부질없는 생각이었던지…. 막상 남산에 발을 들여놓자 그런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연이어 펼쳐지는 불상과 탑들의 향연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부처골 감실여래불상
▲ 부처골 감실여래불 부처골 감실여래불상
ⓒ 한선영

관련사진보기


494m의 고위산과 468m의 금오봉, 두 봉우리를 가진 경주 남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이라고는 멀리하며 살다보니, 조금 걷다보면 이내 땀이 송글송글하다. 재미있는 것은 조금 걷다가 땀이 맺힐 만하면 새로운 불상과 석탑이 눈앞에 나타난다.

흔히 바위가 많은 산을 골산(骨山), 흙과 나무가 많은 산을 육산(肉山)이라 한다. 이와는 다른 측면이겠지만, 불상이 많은 경주 남산은 불산(佛山)이라고 부를 만하다.

남산에서 첫 번째로 만난 불상은 부처골 감실여래상이다. 얌전하게 손을 모으고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머금고 지긋이 눈을 감고 있는 품이 아마도 신라 여인의 얼굴이 이랬지 싶다. 앉아 있는 모습이 어찌나 사실적인지, 멀리서 보면 부처라기보다는 실제로 어느 아낙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듯이 보일 정도다. 돌을 파낸 것이 아니라 돌 속의 부처를 찾아냈다더니 정말 그랬다. 바위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보니 그 안에 원래부터 부처가 앉아 계셨던 모양이다.

신라여인이 그대로 앉아있는듯하다.
▲ 부처골 감실여래불상 신라여인이 그대로 앉아있는듯하다.
ⓒ 한선영

관련사진보기


감실불상에 대한 여운을 간직한 채 조금 걷다보면 탑곡 마애불상군에 이른다. 이곳은 사방 둘레 30m의 바위에 비천상, 승려상, 사자상, 삼존불 등 다수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곳의 그림들은 여타의 마애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들이 많아 더욱 눈길을 끈다.

특이한 문양이 많은 탑골 마애불상군
▲ 탑골 마애불상군 특이한 문양이 많은 탑골 마애불상군
ⓒ 한선영

관련사진보기


특히 종려나무를 닮은 나뭇잎은 당시의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여러 가지로 추측만 되고 있는 상태다. '미륵불이 그 밑에 앉아 도를 이뤘다는 용화수(龍華樹)가 이렇지는 않았을까?' 하고 혼자 지레짐작도 해보며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안개비가  흩뿌리던 날의 경주남산
▲ 안개비 속의 경주남산 안개비가 흩뿌리던 날의 경주남산
ⓒ 한선영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불산(佛山), 경주남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다> 총 3편 중 첫 번째 글입니다.



태그:#경주남산, #마애불, #불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