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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여행학교] 연재 기사를 시작하며
지난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이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부부는 이 여행을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라고 부른다. 애초부터 별도의 건물이 있거나 특별한 교육과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길과 여행이 주는 배움의 크기를 가늠하며 '학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부터 그 '학교'에서 한 달 동안에 있었던 아이들의 재기발랄한 이야기들을 들려드릴 계획이다.

라오스로 가는 길- 태국 치앙마이에서
▲ 라오스 여행학교의 아이들 라오스로 가는 길- 태국 치앙마이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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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여행학교에 참석하기로 한 청소년들의 부모들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용돈은 얼마나 줘서 보내야할지...?"
"컵라면을 몇 개 넣을까 하는데 괜찮을까 해서요."
"열대지역이라도 겨울인데 옷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애 아빠가 배낭을 새 것으로 사야한다고 하는데, 쓰던 것 가져가면 안 될까요?"

이래저래 부모들은 걱정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 없이 아이들만 여행 보내는 것 아닌가. 그것도 한 달 동안. 또 라오스라는, 자신들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거나, 들어보았다 해도 처음엔 그 나라가 세계지도 어디 있는지 짐작조차 안 되던 곳으로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새삼 짠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질문들 다음으로 똑같이 등장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울산발 사투리 버전으로 한 번 재생해보면,

"아~들 얘기 들어보니까, 쩌거들이 숙소도 잡고 마 싹 다 해야 된다 카던데 진짜라예?"

진짜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차에 실려 다니거나 가이드에 끌려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여행자가 되어 여행을 만들어 가는 것. 이미 학교와 집에서 너무 많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아이들에게 여행마저도 하나의 주어지는 프로그램으로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을 보고 오는 것 이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봤다는 기억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원했다. 그래서 스스로 숙소도 구하고 식당을 찾아들어가 밥도 사먹고 볼거리도 찾아다니는, 그러다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 제주 올레 걷기여행1 김영갑 갤러리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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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우선 중요한 조건이 안전이었다. 그래서 사전 캠프로 여행을 떠나기 6개월 전 여름 방학 동안에 제주도에서 3박4일의 걷기 여행을 했었다. 안전은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잘 알고, 아이들 또한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서로와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둠을 나누었고 함께 걸었다. 그렇다고 그 이상의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출발지와 목적지가 있을 뿐이었다.

캠프에서 처음 알게 된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어도 이제 그만 자야 할 시간이라고 강제하지 않았고, 입맛이 없다고 아침밥을 굶어도 간섭하지 않았다. 배낭끈을 엉덩이까지 늘어뜨려 폼 잡고 다녀도 그러면 많이 걷기 힘들 거라고 단 한 번 알려주었을 뿐이다. 단지 3박4일 동안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걷는 것. 그리고 매일 잠자기 전에 일기 쓰는 것.

첫날, 제주올레 2-3코스를 9시간 동안 걸었다. 맘 맞는 친구를 만나 전날 꼬박 밤을 새운 고등학교 2학년 윤미와 희경이는 김영갑 갤러리의 그 아름다운 사진들을 앞에 두고도 탁자에 엎어져 잤고, 등산화나 워킹화 대신 바닥 얇고 예쁜 캔버스화를 신고 온 멋쟁이 고딩 성호는 발뒤꿈치가 다 까지고 발바닥에 불이 났으며, 울산에서 온 중학교 1학년 서희는 온 종일 경상도 사투리를 억수로 써가며 더 이상 못 간다고 투덜거렸지만 결국 모두가 목적지인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김영갑 갤러리- 저 아름다운 사진 앞에서 잠만 자는 아이들
▲ 제주 올레 걷기여행2 김영갑 갤러리- 저 아름다운 사진 앞에서 잠만 자는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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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아이들이 쓴 일기가 가관이었다. 평생 이렇게 많이 걸은 적은 처음이라는 고백이야 당연지사다. 그런데 아마존과 같은 밀림을 걷었다는 둥, 바닷가에서 암벽을 올랐다는 둥, 험준하고 높은 산을 올랐더니 탁 트인 산등성이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는 둥, 아이들이 경험한 세계는 여태껏 내가 제주 올레 길에서 결코 만나본 적이 없는 놀라운 세계였다.

도대체 올레길 2-3코스 어느 곳에 그런 세상이 존재했던 걸까? 숲길이 아마존 밀림이 되고, 바닷가 바위길이 암벽이 되고, 야트막한 오름이 험준한 산악지대가 되고 마는 아이들의 눈과 마음은 신기하고도 놀랍고도 귀엽다. 나로서는 남은 인생 동안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상력의 경지임이 분명하다.

더 귀여운 것은 다음날 일기다. 다음날은 7코스를 5시간 동안 걸었다. 난리가 났다. 이제 5시간은 거저먹기란다. 전날 죽을 것 같다고 꾸물거리던 아이들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제법 여행자처럼 걷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둠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고, 뜨거운 햇살 다음에 오는 시원한 바람 맞기를 좋아했고, 터벅터벅 혼자 걸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 일기에 아이들이 보았던 풍경과 길 위에서 느낀 이야기들은 한 층 더 도보여행자의 향기로 갈무리되어 있었다.    

조금씩 도보여행자가 되어가는 아이들
▲ 제주 올레 걷기여행4 조금씩 도보여행자가 되어가는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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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그해 겨울에 떠나게 될 라오스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들이 제일 먼저 질문한 것은 라오스에서는 이번 제주여행보다 더 많이 걸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여행만큼 걸을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나의 대답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이번처럼 너희들이 모둠끼리 다니면서 숙소도 구하고 밥도 사먹고, 볼거리도 찾아다녀야 한다는 설명에, 아이들은 재미있겠다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질문 혹은 관심이라곤 자기 모둠에 어떤 친구들이 속하게 될 것인가 일 따름이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걱정부터 앞서는 부모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부부의 예상과도 조금은 빗나갔다. 그래도 아직 어린 우리가 외국의 낯선 도시에 가서 어떻게 알아서 다 하냐는 질문이나 염려가 있을 법도 하건만, 없었다.

아니 아이들 중에는 그런 의문을 가진 이가 있었을 것도 같다. 하지만 3박4일 동안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혹은 함께 할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용기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이들의 여행은 시작되고
▲ 제주 올레 걷기여행5 이미 아이들의 여행은 시작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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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중에 경기도 고양에서 온 성호(고1)와 정호(중2)라는 형제가 있다. 처음 이 녀석들은 엄마에게 라오스 여행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었고 그냥 제주도에서 캠프가 있으니 다녀 오라는 말만 듣고 왔다고 했다. 내키지 않는데 엄마의 '강권'으로 왔고 겨울방학 동안 해야 할 일도 많으므로 라오스 따위에는 전혀 갈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내비쳤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3박4일의 걷기여행이 끝나고 헤어지는 시간이 되었을 때, 벌써 두 아이의 눈에는 라오스 여행에 대한 기다림이 고여 있었다. 돌아가서 각자 신중하게 생각해본 후 한 달 내로 라오스 여행학교 참가신청서를 보내라고 했을 때, 11명의 아이들 중에 제일 먼저 신청서를 보낸 것도 그들 형제였다. 그날 물어보진 않았지만, 두 녀석은 '여행이란 것의 자유'에 대해 설핏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그 후 아이들에게 한두 달에 한 번씩 이메일로 과제를 냈다. 라오스를 길게 흐르는 강에 대해 알아보기, 라오스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와 그곳에서 하고 싶은 것 세 가지 생각해보기, 자기 집이나 학교를 중심으로 사방 1킬로미터 지역에 대한 지도를 그리기, 여행 에세이 한 권 읽고 독후감 쓰기 등이었다. 

아이들의 과제- 지도 그리기
▲ 아이들이 그린 우리집 지도1 아이들의 과제- 지도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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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과제- 지도 그리기
▲ 아이들이 그린 우리집 지도2 아이들의 과제- 지도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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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은 세 번 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한 번, 여행 길 위에서 한 번, 그리고 돌아와 여행의 추억을 정리하면서 또 한 번. 아이들은 그 첫 번째 여행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라오스를 검색하고 라오스의 도시들을 찾아보면서 라오스라는 나라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집 주변의 지도를 그리면서 여행지에서의 날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괘씸하게도 우리 부부만 빼고 자기들끼리는 서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여행의 설렘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고3이 될 내가 라오스로 여행가는 이유  (글 서윤미)
제주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라오스에 무조건 가야지' 생각했다. 여행이란 건 매혹적이면서도 헤어 나오기 힘들어서일까, 제주도를 다녀온 2주간은 제자리로 돌아온 일상이 더는 제자리 같지 않았다. 왠지 계속 걸어야 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하버드 도서관에 붙어있다는 명언 중 하나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라는 말 때문에 나는 빠르게 적응해야만 했다.

2학기가 개학하자 여러 가지가 고민됐다. (내가 엄청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지만은) 지금 놓지 못할 게 너무 많았다. 예를 하나 들자면, 수학 같은 과목은 하루 공부량 뿐만 아니라 이과생인 만큼 황금기라는 겨울방학 때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하루는 학교 친구한테,

"나 겨울방학에 여행갈 거야. 한 달 동안."

이라고 말했더니 어떤 여행인지 묻지도 않고, "미쳤어?"가 돌아왔다. 가야지, 하면서도 가도되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여졌다.

그러다 <슈퍼라이터>라는 책을 봤다. 여러 여행작가들이 쓴 책인데 '1년 동안 학업이나 일을 중단하고 여행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식의 질문에 정기범씨가 이렇게 답해 놨다.

"(길지만 요약하자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민하던 차에 이 말을 보고 너무 좋아서(내 편 한 명이 더 생긴 느낌에)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한 달 동안 라오스를 배워오자. 그럼 되는 거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처럼. 일단 지르자. 결심한 것이다. 그 후의 일은 그 때 생각해보기로. (남은 기간 동안 더 열심히 하기로 했다. 훨씬 더.)

라오스에 가서 고3 생활을 버틸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고.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거다. 설령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해도 내가 그곳을 가기 위해 노력한 시간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가는 라오스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일은 없기에, 나는 일석이조를 위해 라오스를 가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김향미 & 양학용 부부 여행작가가 2011년 1월에 13명의 청소년과 함께 한 달 동안 라오스를 여행한 이야기들이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이 있다.



태그:#여행학교, #라오스, #제주올레,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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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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