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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삶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물적 토대가 된다. 이 기초가 건강하고 원활하게 잘 돌아가야 삶의 여러가지 가치 있는 목적을 달성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한정된 재화를 우선 순위에 맞게 잘 배분하는 의사 결정이 곧 건강한 경제의 핵심일 것이다. '경제적'이라는 말에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 혹은 만족을 얻는다는 경제 효용성의 법칙이 들어 있다.

우리의 자녀들은 기술의 발달로 과잉 생산된 물질들에 의한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적어도 먹고 입고 배우는 것에서만큼은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삶의 목적 달성을 위해 무한한 자원과 기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만 했던 옛 시절. 그때야 어쩔 수 없이 고민 또 고민 끝에 한정된 재화를 목적에 부합하게 '잘 쓰기' 위한 의사결정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잘 쓰기' 위한 고민은 덧없어 보인다. '물질'은 '삶의 가치'를 달성하는 '수단'일 뿐인데 뭐하러 그렇게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과연 무한한가? 시간도 하루 24시간 정해져 있고, 내가 벌 수 있는 돈이나 사용할 수 있는 자원 모두 한정돼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나 우선순위에 따라 시간 속에서 하나씩 해나갈 수밖에 없다.

한꺼번에 할 수 없는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란 얘기다. 이 과정에서 '인내'는 모든 희망의 기본 요소이자 성취를 더욱 값지고 보람되게 하는 요소다. 그러나 요즘 사회에서 뭔가 원하는 바를 하기 위한 기다림은 의미가 없어졌다. 지금 내 지갑 안에 돈이 없더라도 당장 무언가를 하거나 물건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 사회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즉 물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여력에 관계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 그것은 '부채'의 일상 생활화를 조장했다. 더 이상 '벌기 - 쓰기 - 모으기'의 구조가 아니라 '일단 쓰기 - 벌기 - 갚기'의 구조가 되면 우리는 끊임없는 소비를 뒷감당하기 위한 '벌기'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가족이 함께 쓰는 가계부가 필요한 이유

가계부와 통장 그리고 각종 생활비 영수증
 가계부와 통장 그리고 각종 생활비 영수증
ⓒ 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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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사는 자녀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경제 교육은 '당장 해버리지 않고, 모아서 하는 경제 구조'를 갖도록 독려하는 일이다. '당장 해버리는 습관'은 스스로 감당키 어려운 부채의 늪에 빠지게 될 우려가 크다. 물질 부족의 시대보다 경제 교육적 여건은 더욱 악화된 셈이다. 이에 특별한 경제 교육보다는 가정에서의 일상적 경제 활동의 흐름을 아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가계부'를 온 가족이 함께 쓰는 것은 핵심 가치가 될 만하다.

우리 가정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자녀들과 공유하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아이들이 너무 빡빡한 가정 살림을 보게 되면 오히려 위축되지는 않을까요?" "일찍부터 숫자들을 접하게 되면 너무 돈돈거리는 아이로 자라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상담 결과를 통해 보게 되면 오히려 어른들이 융통성이라는 미명하에 왜곡된 경제적 데이터를 만들지만, 아이들은 매우 정확한 기준을 갖는다.

매월 마이너스가 발생하는데 가계부는 적어 무엇하냐며 던져 버리는 것은 어른들이다. 왜 마이너스가 나는지, 도대체 어디에 얼마를 쓰고 사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마이너스 가계 구조는 직면하기에 불편하지만, 어쨌건 제대로 파악해야 '마이너스'가 나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2년 전, 초등학생 대상 어린이 경제 교육을 하면서 '돈에 관해 부모님께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적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용돈 올려주세요' '돈 때문에 싸우지들 마세요''성적 오르면 돈 주겠다던 약속 지키세요'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아이들이 써낸 말은 무엇이었을까. '제 세뱃돈 어딨어요'가 단연 1위였다. 아이들은 자신의 세뱃돈의 거취(?)에 대해 이런저런 의혹들을 앞다퉈 제기하기에 바빴다. 항상 가져가놓고 돌려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정작 뭔가 사고 싶은 걸 사달라고 하면 '돈 없다'고 반응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다. 아이들 입장에서 나름 목돈을 받는 흔치 않는 기회인지라 기억이 더욱 강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남자 어린이는 큰 소리로 엄마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절 되게 미워해요. 용돈을 받은 적도 없고, 뭐 필요하다고 이야기만 하면 '왜 그렇게 돈돈하느냐'며 막 야단만 쳐요. 저한테만 맨날 돈 없다고 하는데 우리 집에 돈 없지 않아요."
"돈이 있는데도 설마 그러시겠니. 뭐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데, 막상 돈이 없으면 엄마 마음이 아파서 그러시는 걸거야."

"아뇨! 엄마는 항상 TV보면서 막 물건 사요! 맨날 저한테만 돈 없다고 그러는 거라니까요."

아이들의 세뱃돈은 어디로 갔을까

나중에 교육 내용을 부모님들께 알려 드리자 웃기도 하고 황망해했다. 부모님들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적지 않은 돈이 늘상 자녀들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는 데 들어가는 걸 생각하면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물론 세뱃돈이나 기타 아이에게 들어오는 각종 명목의 '용돈'을 꼬박꼬박 아이 이름으로 모으는 부모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지도 않은 돈 따로따로 관리할 만큼 꼼꼼하게 돈 관리하는 집이 몇 집이나 될까.

"다 지들한테 쓰여졌겠지. 설마 그 돈을 뭐 따로 날 위해 썼겠어요?"

물론 어디로 없어진 게 아닌 이상 '살림살이'에 쓰여졌을 것이다. 불신과 오해는 비단 세뱃돈만이 아니다. 남편들도 뭔가 돈이 필요한 시점에 "그동안 벌어다 준 돈 다 어디로 간거야?"라는 볼멘 소리를 주워 섬기기 일쑤고, 살림을 도맡은 가정주부는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더럽고 치사해서 나도 돈 벌어야겠어요. 누가 나 좋자고 살림만 하고 있는 줄 아나."

돈이 얼마가 들어와서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가 있다면 이 상황에서 대화가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소비 예산를 짜보면 알겠지만 어느 항목 하나 마땅히 줄이기가 어렵다. 소소한 하나하나의 지출이 모여 제법 큰돈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일상생활 자체를 유지하는데도 기본적으로 꽤 큰돈이 든다.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은 그 어떤 항목보다 식비 예산이 많이 들고, 가족 간의 교류와 친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은 '가족 관련 예산'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은 상대적으로 '문화예술비' 예산이 클 것이고,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는 가정은 '여행 레저비' 예산을 높게 책정할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골고루 다 누릴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소득이 정해져 있으므로, 어느 한 항목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항목의 예산들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런 유기적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서로 의논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몸으로 경제관념을 익히게 된다. 

김진욱씨(가명·기혼·45) 가정에서는 주된 지출 항목별로 소비 예산을 아래와 같이 짜서 한쪽 벽에 붙여 둔다. 소비 예산은 지난해 지출 내역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므로 올해 지출의 좋은 기준이 된다. 정해진 예산에 맞게 지출하는 습관을 키우기 위해 매월 가계부는 해당 항목별로 결산한다. 물론 예산에 반영되지 않은 긴급한 지출이 발생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자유입출금 통장에 넣어둔 비상자금으로 충당하고, 다시 열심히 쓰여진 금액만큼을 채운다. 긴급하지는 않아도 예산 세울 때 미처 생각지 못한 지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자녀를 둔 4인 가족의 '소비예산표'다. 항목을 세부화해서 관리하기보다 '주요 테마별'로 묶어서 얼마 정도가 필요한지를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작성되었다.
▲ 연간 소비예산 작성 사례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자녀를 둔 4인 가족의 '소비예산표'다. 항목을 세부화해서 관리하기보다 '주요 테마별'로 묶어서 얼마 정도가 필요한지를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작성되었다.
ⓒ 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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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자전거를 사달라고 해요. 예전 같았으면 생각 없이 여윳돈이 없으니 나중에 사자고 했을 것 같아요. 아니면 사주더라도 그냥 사주지 않고 뭐라도 조건을 걸고 사주겠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경제 교육을 받고서는 이제 무조건 일단 예산 속에서 해결 방법을 더불어 모색해봐요. 뭐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는데, 다만 당장 생기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얘기해요. 물론 신용카드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사줄 수야 있죠. 하지만 먼저 쓰고 갚아나가는 삶이 아니라, 정해 놓은 예산 안에서 돈을 모아서 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죠. 

'건강한 일상생활'이나 '풍요로운 일상생활', '자녀 양육비'와 같이 아이들과 관련 있는 예산 항목 중에서 어딜 얼마만큼 줄여서 자전거 살 예산을 마련할까를 의논하는 거죠."

두 아이들에게 모두 자전거를 사주려면 50만 원이 필요하다. 아이들과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다가 결국 '과일' 예산과 '가족 나들이' 예산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둘을 합치면 매월 8만 원 정도의 예산이 확보되고, 이를 7개월 정도 모으면 둘다 자전거를 살 수 있다.

"추석에 어른들로부터 받은 용돈을 자전거 사는 데 보태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2개월 앞당겨 5개월 만에 자전거를 살 수 있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어찌나 자전거를 애지중지하는지 몰라요. 예전 같았으면 어디에 세워뒀는지도 잊고 놀만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젠 잔소리하지 않아도 잘 챙기고 닦고…."

이제 아이들에게 자전거는 단순한 자전거가 아니다. 가족 모두가 5개월 동안 과일도 안 먹고, 주말마다 같이 갔던 문화 공연이나 인근 호수공원에 나들이도 가지 않고 얻게 된 사랑과 희생의 추억이 담긴 보물이다.

게다가 어른들이 주신 용돈으로 스스로 기여를 했으니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아이들에게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선물하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돈을 잘 썼다고 여기는 경험이다. 돈을 쓰고 나서 돈이 아깝지 않고 뿌듯하고 마음이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면 자연히 돈을 함부로 낭비하거나 너무 돈 그 자체를 목적시하지 않게 된다.

절감된 고정비용을 자녀에게 인센티브로?

늘상 정해진 날짜에 자동이체되는 고정 비용은 아이들에게 어떤 경제교육 요소가 될 수 있을까? 우선 고정비용은 가계부로 일일이 기입할 필요가 없다. 아래와 같이 1년치 현황판을 만들어 매달 지출되는 금액의 추이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년치 고정비용의 현황 및 추이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절감효과'를 파악하기에 편리하다.
▲ 연간 고정지출 현황표 사례 1년치 고정비용의 현황 및 추이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절감효과'를 파악하기에 편리하다.
ⓒ 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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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초등학생 자녀를 둔 윤미숙(가명·기혼·36)씨는 관리비, 전기요금, 가스비 등의 공과금을 1년치로 합산한 후 전년도보다 절감된 금액이 생기면 자녀들에게 특별 보너스로 지급하겠다고 지침을 정했다.

그러자 지난 연말 연간 결산 후 아이들에게 지급하게 된 총액은 무려 4만2000원! 그래봐야 매달 평균 겨우 3500원 정도 줄어든 셈이다. 전기요금이나 가스요금을 줄여봐야 돈 몇 푼이나 아끼겠느냐고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연간 통계를 내보니 제법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총명하고 원칙적이다.

"애들 아빠가 제일 고생이 많았어요. 이 방 저 방 불 켜두고 다니는 습관, 집에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보일러를 덥도록 트는 습관, 텔레비전 틀어놓고 잠드는 습관 등을 아이들에게 줄줄이 지적받게 됐거든요. 제가 잔소리할 때보다 훨씬 효과가 좋아요. 저 같은 경우는 자꾸 깜빡 잊을 때가 많은데 애들은 정말 철저하더라구요. 절약도 하고 좋지 않은 습관도 고치고…. 그야말로 일거양득 아니겠어요?"

소비는 '습관'에 가깝다. 좋은 습관이 몸에 배게 되면 낭비하지 않고도 내 삶의 가치에 최적화된 삶을 나름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몸에 배인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절약'은 좋은 삶의 가치이긴 하지만 전기 덜 쓰고, 보일러 안 트는 것이 가족 구성원에게 강박과 스트레스가 된다면 오히려 자녀들로 하여금 '절약'이 부정적 가치로 비칠 수 있다.

가족이 더불어 함께 쓰는 가계부로 절약이 우리 모두에게 이득을 남기고, 이 이득은 더 풍요로운 가족의 삶에 기여하는 돈이 된다는 선순환 구조임을 이해하게 될 때 스트레스받는 돈 관리가 아니라 즐거운 돈 관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즐거운 돈 관리라야 우리의 자녀들은 '정해놓고 쓰기'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무조건적인 소비를 권하는 위험한 사회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박미정 기자는 현재 (사)여성의 일과 미래 재무상담센터에서 참경제교육과 재무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태그:#어린이경제교육, #소비예산, #가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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