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누군가 묻는다. 나만의 명품이 있는가를. 순간 지난해 재미있게 본 MBC 주말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 극중 인물인 황금란의 명품 가방이 떠올랐다. 진나희 여사(박정수 분)가 황금란(이유리 분)이 출산 중에 바뀐 자신의 진짜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키고자 원피스와 함께 사주는 600만 원짜리 그 가방이 말이다.

 

재방송을 함께 보던 누군가 "나도 저런 가방 하나 가져봤으면…" 했었다. 하지만 나는 '글쎄?'였다. 직접 매보면 내가 즐겨 매는 몇만 원대 가방들과 확실히 다를 것이지만 내가 선호하는 취향도 아니고 좋아봤자 그림의 떡 아닌가. 또한 아무리 봐도 여자들이 못 가져서  안달이라는 명품 가방들이 시답잖게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촌스럽기 때문일까? 명품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솔직히 명품이라는 가방들보다 내가 들고 다니는 가방이 훨씬 좋아 보일 때가 많다. 또한 샤넬이나 구찌, 루이비통 등 이른바 세상의 명품이란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인지 명품이라는 것을 말해줄 이들의 마크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수준의 나에게 무슨 명품?

 

"흔히 말하는 그런 명품 말고 왜 사람들마다 자신만의 명품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오래 간직하고 있는 어떤 추억이 깃든 물건이랄까. 싸구려지만 고가의 메이커 제품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잘 쓰고 있는 물건, 정말 특별한 것들을 찍은 카메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그는 명품 근처에도 못갈 뿐더러 명품입네 하고 알려줘도 명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명품 수준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뒤이어 이처럼 말한다.

 

순간 동생이 직접 바느질해 커버를 씌워준 일기장과 사진도 잘 나올 뿐더러 가방 속에 넣고 다니기 편해 몇백만 원짜리 DSLR이 결코 부럽지 않은 소니 사이버샷 H50카메라, 9년째 쓰고 있는지라 손때가 까맣게 묻었건만 도무지 놓고 싶지 않아 혹자들의 유쾌하지 못한 눈길마저 더러 느끼기도 하는 명함 지갑, 친정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산으로 들로 일하러 나갈 때 밥을 싸가지고 다녔다던 대나무 도시락 등 특별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 물건 몇 개가 떠올랐다.

 

이런 물건들과 함께 떠오른 것은 지난 2월 25일이었던 친정아버지 생신 선물로 우리 칠남매의 뜻을 모아 만든 달력 한 권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게 되는, 잠에서 깨어나 보고 잠들기 전에 보고, 엄마 아버지 생각나면 보고, 형제들의 안부가 궁금하면 보고, 이유 없이 눈길이 가니까 보고…. 이처럼 하루에 몇 번을 보는지 셀 수조차 없이 보고 또 보는, 고향의 부모님과 우리 칠남매가 주인공으로 세상에 딱 8부뿐인,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들에 간직할.

 

김장날부터 '어부바 산악회'까지... 단 8부뿐인 명품달력

 

이 달력의 1월과 2월에는 지난 2006년 1월 구룡포에서 찍은 단체사진과 지난해 3월 친정아버지 생신에 아버지 문패가 걸린 고향집 대문 앞에서 찍은 우리 형제들의 단체사진이 있다. 친정어머니 생신이 음력 12월 17일인지라 해마다 설을 앞둔 1월이나 2월에 어머니 생신이 오고, 아버지 생신은 음력 2월 4일인지라 2월 말이거나 3월 초일 때가 많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고자 넣은 것이다.

 

큰 사진 한 장씩만 넣은 1, 2월과 달리 3월에는 지난해 4월 친정 식구들만으로 구성된 '어부바 산악회'의 2011년 첫 산행 사진 4장을 묶어 넣었다. 이 날은 '불광사~솔숲~족두리봉~불광중학교'로 이어지는 북한산 산행을 했는데, 다른 산행에서처럼 이야깃거리와 추억이 무척 많은 그런 잊지 못할 산행이었다.

 

가장 재미있는 사건은 막내네 둘째 5살 유경이의 돌발 행동이었다. 밥을 먹다가 예쁜 새가 눈에 띄자 조카인 예찬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다급한 마음 때문인지 제게는 언니인 큰조카(큰언니 딸)를 "예찬이 엄마!"라고 불러 우리 모두를 깔깔 웃게 했다. 항렬로 따지자면 5살인 조카가 큰조카의 아들 예찬이(3살)에게는 엄연한 이모임에도 동생으로 여겨져 챙기고 싶었음인지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그날의 에피소드를 여러차례 이야기했음에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일어 엔돌핀을 솟게 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 형제들끼리 모여 산행을 하지 않았다면, 일 때문에 아빠가 참석하지 못하는지라 어린 아이 둘과 함께 산행할 엄두를 내지 못해 가고는 싶지만 다른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미안해 망설이던 막내 올케와 아이들을 결국 두고 갔다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귀한 선물이리라.

 

외에도 '아차산 산행'과 '북한산 삼천리골~사모바위' 구간 산행 모습을 4월과 11월에 각각 넣었다. 2009년부터 한겨울을 빼고 매달 산행을 했던지라 남한산성이나 인왕산, 또 다른 북한산 구간 등 산행 사진이 워낙 많은데 다 넣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얘들아 참 고맙다...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 제일 값지다"

 

"좋은 선물 해준 우리 자식들 참 많이 고맙다…. 큰 말썽 없이 잘 자라 결혼해 아이들 낳고 건강하게 살아주는 것만큼 큰 선물이 어데 있더냐? 그런데 그 선물로도 모자라 이처럼 좋은 선물 주니 고맙다. 이제까지 받은 선물 중 가장 값지고 가장 큰 선물이다…. 올해는 너희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축복을 받아 무척 행복하다…. 복숭아 사진은 언제 찍었니? 복숭아도 좋지만 박스 사진까지 찍어 이렇게 달력에 넣어줘서…. 도라산 전망대 사진도, 참깨 밭 사진도 모두 좋구만…. 애많이 썼다."

 

지난 2월 25일 친정아버지의 83회 생신날, 모든 형제들이 모인 지난해와 달리 이번 생신에는 일부 형제만 갔다. 나 역시 바빠 아버지 생신에 가지 못했다.

 

2010년부터 우리 형제들만의 달력을 만들어보자 이야기는 했지만 서로 바빠 한해를 꼬박 미룬 끝에 생신 선물로 이번에 만든 달력에 감격하실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달력을 받은 감동을 직접 듣고 싶어 생신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이처럼 말씀하시는데, 이 짧은 말씀을 하시는 동안 여러 차례 말끝을 잇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물론 다른 형제들도 달력에 넣었으리라 생각지 못했을, 아버지를 울컥하게 만든 복숭아 사진은 지난 2006년 휴가 중(8월 6일)에 찍은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70년대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엄마는 미리 말하지 않고 등교 직전에야 돈 달라 말하는 우리 때문에 학용품 살돈 100원을 꾸러 앞집이나 다른 집으로 정신없이 내닫곤 했다. 당시 크레파스 한 통이 1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나는 것이 그리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돈도 아니었던 걸 미뤄 짐작 무척 가난했던 것 같다.

 

와중에 아버지가 산비탈 밭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배나 사과 등을 제치고 복숭아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과일"이기 때문. 돈도 돈이지만 과일이라도 자식들에게 실컷 먹이고 싶으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헤아렸음인지 우리 복숭아는 유독 맛이 좋기로 인근에 소문나기도 했고, 공판장에서 경매가가 높을 때가 상대적으로 잦았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5학년 때 따기 시작해 해마다 수확량이 느는 복숭아 덕분에 중학생 때부터 집안 살림이 어느 정도 피기 시작했다.

 

그러니 복숭아 사진은 아버지는 물론 우리 가족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해마다 첫 수확 중 가장 좋은 것은 자식들에게 먹이고 싶어 하시던, "직접 따먹는 맛"을 강조하시며 밤 12시 넘어 고향집에 도착한 나를 데리고 손전등을 앞세워 과수원으로 가 까치가 쪼아 먹어버릴까 며칠 전부터 전전긍긍하며 지켰을 복숭아를 직접 따보게 하던 1989년 여름 어느 날도 생각난다.

 

아버지의 팔순을 앞둔 몇 년 전, 한 가난한 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한 복숭아나무들을 모두 뽑으며 과수원을 접었는지라 이젠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과 우리 형제들 마음속에는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복숭아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감동과 수많은 사연들과 함께 영원히 말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활명품'... "참으로 고맙데이"

 

이외에 지난 2009년 10월에 형제들끼리 1박 2일 여행을 간 제부도에서의 모습, 2010년 9월 부모님 모시고 간 도라산 전망대에서, 부모님과 함께 우리를 맞아주곤 하는 고향집의 꽃들, 지난 2010년 유독 잘된 참깨 밭에서 찍은 아버지 모습, 큰 언니의 식당 개업 때 오신 친정 엄마의 모습, 지난해 11월 마지막주에 형제들이 친정에 모여 김장하는 모습 등을 테마사진으로 넣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새마을금고 이사장 공로패와 엄마의 인절미 등을 섬네일 사진으로 넣었다. 우리 가족만의 기념일을 메모한 것도 이 명품 달력의 장점 중 하나.

 

이 글을 쓰며 문득 2008년에 읽은 <윤광준의 생활명품>이란 책이 떠올랐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명품이라 말하는 샤넬이나 구찌, 루이비통과 같은 명품이 아닌 누군가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거나 유용하게 쓰이는 생활 속의 물건들을 그와 관련된 역사나 사소한 이야기와 함께 들려줌으로써 명품의 존재 가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라 떠올랐나 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명품이란 명칭이나 존재는 내게 너무나 멀고 막연한 존재였다.  명품과는 거리가 멀고 명품에 목매는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 사람들에게 명품은 부의 상징이기도 한지라 한편으론 가난한 내 삶을 서글프게 하기도 하던 그런 존재로 말이다.

 

"따뜻한 차 한 잔에 얼마나 큰 행복이 담길 수 있는지 알려준 것도 미로였다. 누군가 약간의 수고를 자처하면 모두의 즐거움은 몇 배나 커지는 것이다. 20년 넘게 사용했던 미로를 최근 몽골여행 도중 도둑맞았다. 배낭에 넣어둔 현금과 귀중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과 사연이 담긴 미로와의 인연은 어떻게 하랴. 세상엔 대치되지 못하는 가치가 너무 많다. 미로 주전자는 '애, 쟤'로 인격을 부여해 부를 만큼 좋아했던 물건이다. 떠나가야 새삼 확인되는 사랑의 농도는 사람의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 <윤광준의 생활명품> 중 '미로(MIRRO) 주전자' 이야기 중에서

 

그는 '떠나가야 새삼 확인되는 사랑의 농도'란 말과 함께 여행 때마다 참으로 요긴하게 쓰던, 그래서 자신만의 명품이었던 미로 주전자를 도둑맞아 잃어버린 아픔을 이처럼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명품은 남들에게는 세상 흔한 물건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이나 자신만의 어떤 특별한 사연이 담긴 그런 것들이다.

 

달력에 담은 우리 칠남매의 모습이 남들에게는 그저 도란도란 보기 좋은 모습 정도로나 보이고 말겠지만 사진 한 장만으로도 부모 형제가 보고 싶을 때 보면 위안이 되고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지난날 우리를 살찌우고 키워준 아버지의 복숭아처럼 남다른 사연이 스며있는 사진들만으로 만들어진 우리 칠남매의 마음과 모습이 담긴 이 특별한 달력처럼 말이다.

 

"새삼스럽게 말하면 뭐하겠노. 아무리 봐도 신기하지 않나. 사진을 이렇게 달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어데 이런 달력을 만들 생각을 다 했나.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달력을 내려다 넘겨보고 그러지 않나. 회관에 가지고 가 자랑도 하고 집에 오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하고 그러지 않나. 참으로 고맙데이. 우리 이쁜 자식들. 참으로 고맙데이."

 

"이번에는 처음 만들어 본 것이고 또 시간이 없어 정신없이 만들다 보니 사진도 제대로 넣지 못하고 그래서 많이 아쉬운데 엄마 아버지가 이렇게 좋아하시니 참 좋네. 지난해 이야기 나오자마자 만들어 드릴 걸 한 해 미루었다는 것이 무척 후회되고. 엄마. 내년 달력에는 엄마 아버지 혼례사진도 넣고 우리 어렸을 적에 찍은 가족사진도 넣고, 내년 달력은 미리미리 신경 써서 올해 달력보다 훨씬 더 잘 만들어 드릴게요."


태그:#명품, #달력, #산행, #복숭아, #새장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