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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KBS)의 교양 프로그램 중 <백년의 가게>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위기와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은 전 세계의 기업과 가게를 소개하는 프로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미국의 모터사이클 '할리 데이비슨', 스위스의 명품 시계 '피아제'부터 1300년 된 일본의 여관과 영화 <로마의 휴일>의 이탈리아 젤라또 가게까지, 전 세계 명가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고 있다. 

지난 2월 이 방송에서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막걸리를 빚어 온 경기도의 양조장, '지평주조'를 소개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지평주조의 사장을 맡고 있는 김기환(31)씨를 찾아갔다.

80년 시간 시간동안 지평양조장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80년 시간 시간동안 지평양조장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사진작가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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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맛에 운명을 걸다

지평주조는 1925년 문을 열었다. 1대 사장인 고 이종환씨가 경영하던 것을 2대 사장인 김교십씨가 인수했다. 이후 3대 사장 김동교씨를 거쳐 4대 사장 김기환씨가 대를 잇고 있다. 한 집안의 3대가 한결같은 막걸리를 빚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김동교씨는 아들 김기환씨가 양조장을 잇는 것에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이미 사양산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 말씀 때문에 어릴 적에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처음 배웠어요."

1960~70년대 막걸리는 국내 주류시장 점유율 부동의 1위였다. 1972년에는 국내 전체 주류 시장 점유율 81.4%(소주 11.3%, 맥주 5.0%)를 차지하며 정점에 달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상황이 달라졌다. 막걸리 소비량은 점차 줄었고, 맥주 소비량이 소주 소비량보다 앞섰다. 소득 수준이 향상되면서 맥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저질 막걸리의 범람도 한몫했다. 빨리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이들이 다 숙성되지 않은 막걸리를 생산해 판매했다.

1988년 시장 점유율 34.9%의 맥주에게 처음으로 1위 자리를 내주었고, 1990년에는 소주에도 추월당해 2위 자리도 빼앗겼다. 2001~2003년에는 점유율 4%대를 기록하며 바닥을 쳤다.

2009년 막걸리 업계에 큰 변화가 일었다. 일본에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막걸리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맥주, 소주, 와인(과실주)의 출고량이 모두 감소한 데 비해 막걸리만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많은 관심과 더불어 '햅쌀 누보 막걸리'까지 출시되었다.

김기환 사장이 양조장 경영에 뛰어든 것도 이러한 변화들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늦기 전에 시장의 변화에 발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2010년, 다니던 홍보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양조장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구상하기도 했다. 스토리텔링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해 작은 전시관을 만들었다.  

전시관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하루 평균 1~2명의 방문객이 찾아오는 정도로는 인력이나 자금 면에서 무리였다. 홍보 전략으로는 큰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변화와 혁신보다는 전통 쪽에 손을 들었다. 어떤 마케팅 전략도 '술맛'보다 경쟁력을 갖출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손맛으로 빚는 술맛, 그래 이거야!

'고두밥'을 만들고 있는 공장장.
 '고두밥'을 만들고 있는 공장장.
ⓒ 사진작가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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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막걸리의 이름난 술맛은 제조과정의 손맛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조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병입 단계에서 사용하는 기계를 제외하곤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술맛을 결정하는 누룩을 제조하는 단계는 가장 손이 많이 간다. 찐 밀가루에 백국균(누룩곰팡이)을 입힐 때 온도가 36~42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적정 온도를 벗어나게 되면 균이 자라지 않거나 죽게 된다. 따라서 온도를 유지하며 골고루 균을 입히기 위해 1시간가량 손으로 섞어주어야 한다.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면 편하기도 하고 생산도 많이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맛이 변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사람 손길을 타고 만들어지는 지평막걸리는 한 달 평균 5만~6만 병 정도다.

양평을 포함한 타 지역의 유통은 도매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평면 내 작은 상점들에는 김기환 사장이 직접 배달한다. 오랜 거래처인 만큼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다. 새로운 홍보전략으로 거래처를 늘리기보다는 오랜 손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 김 사장이 지키고자 하는 경영철학이다.

밀 막걸리에 대한 오해와 추억


막걸리 제조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인 배양실. 일정한 온도 습도를 유지해야 한다.
 막걸리 제조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인 배양실. 일정한 온도 습도를 유지해야 한다.
ⓒ 사진작가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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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양조장에서는 현재 쌀 막걸리(상품명 :미)와 밀 막걸리(상품명 : 진) 두 종류를 생산한다. 누룩의 원료가 밀가루이기 때문에 쌀 막걸리는 쌀 70%와 밀가루 30%의 비율로 배합한 것이 되고, 밀 막걸리는 100% 밀로 생산된다. 숙성 시간을 달리한 쌀 막걸리(동동주, 상품명 : 선)도 생산했었지만 찾는 이가 적어 이제는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밀 막걸리도 수요가 많지는 않다. 막걸리가 우리 술인 만큼 국내산 쌀로 빚어야 좋은 술이라는 인식이 일반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99% 수입에 의존하는 밀가루로는 질 좋은 술이 나올 수 없다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밀가루가 국내산 쌀에 비해 무조건 쌀 것이라는 오해도 밀 막걸리에 대한 편견의 일부이다.

1960년대에는 쌀 막걸리의 제조가 금지되면서 밀가루와 옥수수 등의 전분류로 막걸리를 빚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금지령이 풀렸다. 다시 쌀로 막걸리를 빚을 수 있게 되었지만 밀 막걸리의 맛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많다. 소량의 주문생산이지만 밀막걸리를 생산하는 이유도 여전히 추억의 맛을 찾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스파탐 첨가, 고기에 맛을 더하는 소금간"


지평 막걸리
 지평 막걸리
ⓒ 사진작가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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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찾는 이들이 늘면서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막걸리 자체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졌다. 술의 재료와 첨가물을 세심하게 따지고 음미하며 평가한다.

아스파탐은 단맛을 내는 인공감미료로 사탕, 탁주, 발효음료 등의 다양한 제품에 설탕 대용품으로 쓰이고 있다. 다량 섭취시 인체에 유해하다는 논란이 있었으나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따르면 "성인의 경우 막걸리를 하루에 33병은 섭취해야 인체에 유해한 수준이 된다"며 "가공식품 속 아스파탐은 안전한 수준"이라고 한다.

지평 막걸리에도 소량의 아스파탐이 첨가된다. 김기환 사장은 "아스파탐에 예민하신 분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단맛을 싫어하시는 애주가 분들이 아스파탐의 단맛을 꺼리기도 하시는데 매니아층은 극소수예요. 아직까지는 시장통에서 드시는 소비자들이 주 고객층인데, 그분들은 단맛이 빠지는 걸 싫어하세요"라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제 생각에 (아스파탐 첨가는) 고기에 소금간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아스파탐을 아예 빼버리면 솔직히 술로 먹기 힘들 만큼 맛이 달라져요. 그러면 지금까지 빚어온 저희 술과는 완전 다른 술이 되어 버리죠."

감미료가 첨가된 단맛을 꺼려하는 소비자층을 위해 감미료를 제거한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고심 중이라고 한다.

그는 "막걸리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들이 스스로 어떤 술을 마시는지 정확히 알고 마실수록 가치를 인정받고 정당한 가격으로 판매될 것이라 생각해요"라며 "관심에 상응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도록 노력해야죠"라고 말한다.

"지평의 맛을 오래 지켜가고 싶어요"


지평 양조장의 젊은 사장 김기환(31)씨.
 지평 양조장의 젊은 사장 김기환(31)씨.
ⓒ 사진작가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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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 사장이 양조장을 맡은 지 올해로 3년째다. 그는 "지평막걸리의 전통과 잠재력을 믿고 뛰어들긴 했지만, 현실과 부딪히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술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수수보리 아카데미(경기대학교와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이 만든 전통주 교육기관)'에 다니며 전통주에 대한 공부도 틈틈이 하고 있다.

2010년 1월부터 그의 하루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막걸리'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막걸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지평의 3대 사장 김동교씨는 현재 충청북도 음성에서 미곡 처리 사업을 하고 있다. 양조장을 아들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항상 술에 대한 철학을 강조한다고 한다.

'수익을 기대하지 말 것, 명성에 먹칠하지 말 것, 다른 어떤 것보다 술맛을 최우선으로 할 것.'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지평막걸리의 맛을 오래 지켜가고 싶다."

지평의 맛을 오래 지켜가겠다는 그의 포부에서 지평막걸리에 대한 자신감과 술을 빚는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막걸리와 더불어 웃고 취하던 그 시절, 변함없는 술맛으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지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태그:#막걸리, #지평양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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