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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잡아 먹고 사는 사람, 뚜드리고 먹고사는 사람, 새 잡아 먹고 사는 사람, 귀신 잡아 먹고 사는 사람, 싸움만 찾아서 먹고 사는 사람, 입으로 벌어먹는 사람, 땟국으로 먹고 사는 사람, 똥으로 먹고 사는 사람, 뚫고 먹고 사는 사람, 강짜로 먹고 사는사람, 어두운 데서 벌어 먹는 사람,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벌이.'

이 글은 1927년 1월호 <별건곤>에 실린 '현대진직업전람회'라는 글이다. 근대 초기 조선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신기한 직업리스트다." - 책 <사라진 직업의 역사> 중에서.

<사라진 직업의 역사>
 <사라진 직업의 역사>
ⓒ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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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건곤>은 1926년 11월 1일에 창간돼 1934년 3월 1일 통권 101호까지 발행됐던 대중 잡지다. 이 잡지는 그 어떤 시대보다 변화의 바람이 거셌던 1920년대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직업 일부를 이처럼 소개했는데, 일부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알듯 모를 듯한 직업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대부분 뱀 잡아 먹고 사는 사람과 똥으로 먹고 사람은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뱀을 잡아 먹고 살던 땅꾼은 당시 기사에서 '깍정이'라고도 불렀단다. 똥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수세식 화장실 출현과 함께 사라진 똥을 푸던 사람이다.

뚜드리고 먹고 사는 사람은 시계가 거의 없던 당시에 나무토막 두 개를 딱딱 치면서 동네 골목마다 돌던 방범이다. 새 잡아 먹고사는 사람은 말 그대로 새를 잡아 팔던 사람이다. 귀신 잡아먹고 사는 사람은 장님이다. 당시 장님들은 액운이 든 집을 찾아다니며 지팡이로 두드리면서 일종의 주문을 외워 액땜을 해준 후 사례를 받았다고 한다.

땟국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밖에 싸움만 찾아서 먹고 사는 사람은 변호사, 입으로 벌어먹는 사람은 경매쟁이, 땟국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목욕탕 주인, 뚫고 먹고 사는 사람은 연통 수리공, 강짜로 먹고 사는 사람은 신파극에 출연하는 표독스런 여배우, 어두운 데서 벌어먹는 사람은 활동사진 변사,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벌이는 뚜쟁이다. 오늘날과 표현의 차이가 크다. 

이중 어떤 직업은 서양 문물과 함께 생겨났다. 또, 어떤 직업은 수많은 변화를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어떤 직업들은 사라졌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어떤 시대에 존재했던 직업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생활, 사회적 인식, 문화 등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특정 시대를 당시의 직업으로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한 시대의 수많은 직업 중 좀 더 많은 사람이 선망했던 직업에는 특별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어떤 시대보다 변화가 많았으며 수난기였던, 오늘날의 기초가 시작된 조선말-근대 초기, 우리나라에는 어떤 직업들이 있었을까. 당시 존재했던 직업들을 통해 당시를 만나보는 것은, 당시 사람들을 만나 보는 일이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이런 의문들로 시작, 조선말-근대 초기 우리 사회 선망의 직업이었던 9개의 직업을 통해 당시를 추정한다. 이런 직업들에 종사했던 그들이 얼마를 받았으며, 어떤 식으로 일했는지, 사회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았고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그 직업과 관련된 사건 사고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다른 나라에는 유사 직업이 있었는지 등을 조근조근 들려준다.

정조는 소설을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정조 14년, 1790년 8월의 일이었다. 장흥에 거주하는 신여척이란 사람이 이웃집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참다못해 그들을 발로 차서 죽였다. 어처구니없는 살인사건이었다. 형조로부터 이 사건을 들은 정조는 느닷없이 담뱃가게 살인사건을 이야기했다.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종로 거리의 담뱃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소설책 낭독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남자는 소설을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눈을 부릅뜨고 침을 퉤퉤 뱉었다. 그리고 담배 써는 칼을 잡아 소설책 읽는 사람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스토리 텔러'를 '스토리 메이커'라고 생각했던 걸까. 사내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를 들려준 스토리 텔러를 향해 끔찍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그런데 정조는 이 사건을 맹랑하고 우스운 사건일 뿐이라고 말했다." - 본문 중에서

책 읽어 주던 사람 '전기수' 한 부분이다. 소설책을 읽어주다가 졸지에 죽게 된 사람은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 1960년대까지 있었던 전기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책이란 것이 아무나 소유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시절에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나 재상가에 드나들며 소설을 읽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던, 강독사로도 불렸던 그들이다.

정조가 담뱃가게 살인사건을 들려준 이유는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소설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했다. 학문으로 나라를 이끌겠다는 의지였다. 자신 스스로 지독한 책벌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조는 유독 소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결국 문체반정을 통해 자유로운 글쓰기를 탄압하기에 이른다. 단지 소설 때문에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노론에 대한 탄압이었다는 등과 같은 해석도 분분하지만 아무튼 정조에게 소설은 살인까지 부르는 그런 위험천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소설이 유행하는 것을 위험하게 봤다.

식을 줄 몰랐던 전기수의 인기

그럼에도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 계속 유행한다. 전기수들의 입을 통해. 조선시대 유명한 전기수로 이자상과 이업복 등이 있는데, 이자상은 기억력도 뛰어나고 매우 총명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지라 재상가를 드나들며 소설을 잘 읽어 주는 사람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고 한다.

"18세기에는 세책방(貰冊房)이 등장했다. 세책방은 책 대여점을 말한다. 세책방에서 책을 빌리는 사람들은 고가의 책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서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책을 '소유'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빌린 기간 동안 책을 '점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첵방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경제의 발달로 세첵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세책방에 책을 공급해주는 서적중개상의 활동도 탄력을 받았다. 서적 중개상을 '책쾌'라고 부르는데, 18세기에 활약했던 최고의 책쾌는 조신선이었다고 한다. 책을 빌려주는 일종의 도서 대여점이 등장하고 책쾌가 전국을 누비며 책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책에 매료되어 이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이 증가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세책방과 책쾌의 상업 활동은 이야기가 상업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상품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본문 중에서

직업은 사회적 요구 등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또한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운명을 지니게 된다. 전기수도 마찬가지였다. 시대에 따른 책읽기의 변화, 1910년에 베스트셀러였던 최찬식의 <추월색>을 비롯해 옛 대중들이 열광했던 소설들, 1960년대의 글패라는 집단 전기수 등 책과 읽을거리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직업의 역사, 여기에 다 담겨있네

1910년대에 대중들에게 낭독되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혔던 최찬식의 신소설 <추월색>
 1910년대에 대중들에게 낭독되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혔던 최찬식의 신소설 <추월색>
ⓒ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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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전기수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했던 직업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처럼 사라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정조가 소설을 탄압하던 18세기 중반, 쿠바에도 전기수가 있었고 탄압을 받았단다. 쿠바의 직업적 전기수 '락토'는 지금도 존재하는데, 주로 시가 공장 노동자들에게 소설을 읽어준다. 쿠바 시가 노동자들은 주로 에로소설이나 범죄 스릴러물 등을 좋아했다고 한다.

책은 전기수 외에 당시의 평범한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워 쉽게 종사할 수 있었거나 선망했던 전화교환수와 변사, 기생, 유모, 인력거꾼, 여차장, 물장수, 약장수 등의 직업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평범한 사람들 가까이 있었으며, 그들을 울고 웃게 한 이들 직업들을 아는 일은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알아가는 데 좋은 참고가 되리라.

아쉽게도 예나 지금이나 기록은 승자 혹은 기득권자들을 위주로 쓰이기 십상이다. 반면, 어떤 시대나 가장 많은 숫자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나 삶은 간과하기 일쑤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이처럼 지나치기 쉬운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눈물과 웃음을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조목조목 들려준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사라진 직업의 역사> (이승원 씀 | 자음과 모음 | 2011.12 | 1만3500원)



사라진 직업의 역사

이승원 지음, 자음과모음(이룸)(2011)


태그:#직업, #일자리, #전기수, #책읽기, #추월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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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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