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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살았던 오늘>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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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자신만의 특별한 날짜가 있을 것이다. 생일을 비롯하여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생일도 있을 것이고, 결혼기념일이나 입학, 졸업과 같은 날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 만난 날, 혹은 누군가 헤어진 날 등 저마다 다른 추억과 사연과 함께 기억되고 있어 잊으려야 잊히지 않는 그런 날짜들 말이다.
한 국가에도, 세계사에도 이처럼 특별한 사연 혹은 사건으로 기록된 날들이 있다. 우리들이 역사로 배우는 것들이다. 혹은 신문이나 잡지의 작은 코너에서 '소사'라는 제목으로 만났던 것들도 그 중 하나. <그들이 살았던 오늘>은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본 오늘 우리보다 먼저 세대인 그들이 살았던 지난 어느 날들의 역사를 날짜별로 들려주는 책이다.

6월 8일자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는 '네이팜탄 소녀'로 유명한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베트남 출신의 AP통신 기자 닉 우트. 사진을 찍을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그는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사진 한 장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이 사진과 사진 속 발가벗은 소녀는 지난 40여 년 동안 반전의 상징이 됐다.

베트남 전쟁의 전세가 점점 베트콩 쪽으로 기울던 1972년 6월 7일 깊은 밤, 베트콩은 사이공 인근의 트랑방 마을을 습격하여 점거한다. 날이 밝은 후 베트남 정부군은 탈환 작전을 펴지만 베트콩의 완강한 저항에 작전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베트남 정부군 부대장은 늘 해오던 대로 미군에 공습 지원을 요청하고, 미 공군은 트랑방 마을에 맹폭을 퍼붓는다.

미 공군이 퍼부은 것은 네이팜탄이었다. 나프타와 팜유를 주원료로 만든 것으로 찐득찐득 달라붙고 물로도 꺼지지 않으며 뒹굴어도 꺼지지 않는 섭씨 3000도에 이르는 화염을 내뿜는 것. 6·25 전쟁 당시 빨치산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수많은 논란 끝에 이제는 사용이 금지된 그 악랄한 무기. 안타까운 것은 그 마을에는 베트콩과 민간인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의 종지부를 찍는데 큰 공헌을 한 그 유명한 사진 <소녀의 절규>.
 베트남전의 종지부를 찍는데 큰 공헌을 한 그 유명한 사진 <소녀의 절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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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발가벗고 울부짖으며 뛰고 있는 소녀는 올해로 49세가 된 '킴푹'이다. 1972년 6월 8일 당시 9세였던 킴푹은 트랑방 마을에 있는 카오다이 사원에서 가족과 함께 사흘째 은신 중이었다. 어느 순간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현장을 벗어나라'고 다급하게 외쳤는데 불과 몇 초 만에 사원이 있던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주황색 불길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네이팜탄의 불길은 당시 무명옷을 입은 킴푹의 왼쪽 팔에 옮아 붙었고 순식간에 3도 화상을 입혔다. 그러자 킴푹은 온몸을 태울 옷을 벗어던지고 울부짖으면서 필사적으로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순간 우트를 포함한 외신기자들이 셔터를 눌렀고. 푹 앞에서 울부짖으며 뛰고 있는 소년은 푹의 오빠로 이미 킴푹의 형제 몇이 네오팜탄의 불길에 희생된 뒤였다.

얼굴만 멀쩡할 뿐, 섭씨 3000도에 이르는 네이팜탄의 불길로 이미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은 킴푹은 우트가 셔터를 누른 직후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만다. 그리고 우트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져 17차례의 수술 후 살아남는다.

책은 킴푹의 이후 행적들-우트와의 극적인 만남과 신혼여행 중에 감행된 망명, 반전 운동, 당시 트랑방에 네오팜탄을 퍼부었던 미군 조종사 존 플러머의 폭격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피폐한 삶과 그녀와의 만남 등-을 들려주며 반문한다. 전쟁이 정말 공포스러운 진짜 이유를. 우리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분노해야 하는 이유를!

미 공군이 독도를 폭격한 까닭은?

트랑방 마을이 네이팜탄의 폭격을 맞은 6월 8일, 그 20여 년 전인 1948년 6월 8일은 미국의 무차별 폭격에 우리의 수많은 어부들이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6월 8일 강원도와 울릉도에서 온 고깃배들이 독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을 때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독도로 접근하더니 갑자기 폭탄을 투하하였다. 뒤이어 독도 주변 수역에서 조업하고 있던 선박을 향해 폭탄을 투하하며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배 위에 있던 이들은 바다로 뛰어 들고 독도에 상륙해 있던 어민들은 동굴로 급히 피하였다.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손짓을 해보았지만 폭격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어민들은 이곳저곳에서 무참히 죽어 갔다. 폭격은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그 후 한대의 비행기가 와서 폭격현장을 한 바퀴 돌고는 사라졌다.―<그들이 살았던 오늘>에서

6월 14일, '미군이 독도를 폭격한 까닭은?'의 일부다. 목록을 훑다가 줄곧 우리의 우방국이었던 미국(군)이 우리를, 우리의 독도를 왜 폭격한 것인지 궁금하고 의아해 가장 먼저 찾아 읽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목만으로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 같은데, 이제까지 왜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은 독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배와 어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한다. 뒤늦은 보도로 폭격 사실이 알려지고 여론이 들끓자, 당시 유력한 용의자였던 미국은 발뺌한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선박과 바위를 구분하지 못해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다" "폭격 30분 전에 정찰기를 보내 상황을 확인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고 약 7000m 고공에서 연습탄을 투하했던 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해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근거 빈약한 거짓말이었다. 어민들은 비행기에서 미 공군의 표식인 원과 별을 보았음을 증언했다. 육안으로 하늘을 가장 높이 올려다 볼 수 있는 높이의 한계는 1000m. 그렇다면 아무리 높아봤자 1000m라는 것인데, 당시의 숨 막히는 상황을 미뤄 짐작하면 한계 높이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폭격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기총사격까지 가했다면 상공 7000m에서 떨어진 연습탄일 수 없다.

당시 경찰 추산에 따르면 미 공군의 폭격으로 "배 14척이 침몰되고, 1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존자의 증언과 언론의 보도는 저마다 달라 사망자는 수백 명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과연 몇 명이 죽었을까?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1948년 5·10 총선거로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첫 긴급동의(독도폭격에 관한 진상규명) 이었음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64년째 잠자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모른 채 말이다.

책에는 사건 당시 미군의 오만한 태도와 사건 발발 2년 뒤에 위령비가 세워졌지만 일본 어민이 이를 파괴한 만행 등이 소개된다. 참고로 들끓는 여론에 미군은 피해자 가족에게 사람의 목숨 값으로 요크셔 돼지 한 마리 값만을 보상한다. 그런데 이마저도 받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오키나와에서 뜬 비행기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독도까지 날아와서 폭격을 퍼부었을까? 독도라는 존재를 미군에게 알린 것은 누구였으며 폭격장소로 추천한 것은 누구였을까. 그 막후에 일본이 있다는 설이 있다. 일본은 독도를 미군의 폭격 장으로 만들어 일종의 무인 중립지대로 몰아가 "한국과의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겠는가"(국제법학자 홍성근)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국회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나왔는데 외무성 관리의 대답은 이러했다. "대체로 그런 발상 아래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 소상한 내막이 어떠하였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에서

오늘은 제64회 제헌절이다. 독도 폭격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48년 5월 10일, 우선 선거가 가능한 38선 남쪽 지역에서 헌법제정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됨으로써 출범한 제헌국회에 의해 1948년 7월 17일에 헌법이 공표되었음을 기리고자 정한 그런 기념일이다.

제헌국회 2주 만에 제출된 첫 긴급동의이었음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묻히고 있는 '독도 폭격'의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 정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양민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한 엄청난 사건을 규명할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과연 이처럼 오랫동안 잠자고 있을 수 있을까?

올해로 64년째인 제헌절을 기념하는 것에 앞서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을 규명하고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그럼에도 피해자인 우리가 외면하고 묻고 마는지라 독도를 향한 일본의 망발이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살았던 오늘>은 '네이팜탄의 소녀'처럼, 수많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긴 영향력 많은 인물을 조명함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보여준다.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 몇을 대략이나마 소개하면 ▲ 음력을 사용하던 조선의 첫 양력 1월 1일의 풍경 ▲ 1936년 1월 8일: 조선농구, 일본을 제패하다 ▲ 1942년 2월 3일: 초세이탄광 갱도 붕괴-지금도 울고 있을 초세이의 원혼들 ▲ 1887년 3월 6일: 국내최초 전기 도입-경복궁을 밝힌 건달불▲ 1990년 3월 9일: 혜영이와 영철이 사망 ▲ 1970년 4월 8일:와우아파트 붕괴-괜찮아, 설마, 사바사바의 동승 ▲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서적 소각-"나의 책도 불태워 주오" ▲ 2004년 6월 21일: 김선일 알 자지라 방송 등장-"나는 살고 싶다" ▲ 1995년 6월 29일:삼풍백화점 붕괴: 사람 생명과 바꾼 하루 매상 ▲ 1925년 7월 21일: 원숭이 재판 판결-진화론 가르치면 불법? ▲ 1987년 8월 18일: 금지곡 해금-금지곡의 광복절 ▲ 1945년 9월 8일:<조선말큰사전> 원고 발견-되찾은 사전과 잃어버린 역사 ▲ 1957년 9월 25일:리틀록 나인 사태-흑백 평등의 도화선, 리틀룩 나인 ▲ 1978년 9월 26일: 번데기 약물중독사건 ▲ 1929년 11월 3일:광주학생운동 발발-'빛고을'의 스러진 빛, 장재성 등이다.

덧붙이는 글 | <그들이 살았던 오늘>-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김형민 (지은이)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12-06-10 | 정가:22000원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김형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2012)


태그:#네이팜탄 소녀, #킴푹, #독도 폭격, #베트남전, #닉 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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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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