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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룽나무 꽃(북한산 2009.5.19)
 귀룽나무 꽃(북한산 2009.5.19)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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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린재나무 꽃(북한산 2010.6.10)
 노린재나무 꽃(북한산 20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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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과 6월의 북한산에는 귀룽나무나 노린재나무, 팥배나무, 괴불나무, 말발도리 등 다양한 나무 꽃들이 핀다. 물푸레나무나 가래나무처럼 크게 자라기 때문에 관심만으로 쉽게 관찰할 수 없는 나무들도 많지만,  비교적 작게 자라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두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나무들도 많다.

노린재나무는 1~3m남짓 자리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두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그런 나무 중 하나다. 수술이 유독 긴 순백의 꽃과 햇빛을 받으면 나타나는 잎의 무늬가 이처럼 예쁘기 때문에 몇 년째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가듯 꽃이 필 때를 기다려 만나러 가곤 하는 그런 나무이기도 하다.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는 가을에 걸핏하면 집안으로 들어오는 '노린재'는 위험하다 싶으면 그리 유쾌하지 못한 노릿한 냄새를 내뿜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나무가 이 곤충처럼 고약한 냄새를 풍길 것 같은 '노린재'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나무의 줄기나 단풍이 든 잎을 태운 재로 만든 잿물이 노랗기 때문(한자로 '황희)'이라고 한다.

이 노란 잿물, 즉 황희는 전통염색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매염제였다고 한다. 특히 보라색 염색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매염제였으며, 제주도에서 자라는 섬노린재나무로 만든 잿물은 일본인들이 몹시 탐낸 나머지 제주도의 노린재나무를 별도로'탐라목'이라 이름붙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나.

노린재나무
 노린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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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린재나무와 목대장(북한산 2010.6.10)
 노린재나무와 목대장(북한산 2010.6.10)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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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린재나무 잎에는 여러 가지 독 물질이 들어 있어 아무 곤충이나 맘 놓고 먹을 수 없습니다. 잘못 먹었다간 소화도 안 되고, 토하기도 하고, 목숨까지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기 뒤흰띠알락나방에게 이 독물질은 되레 입맛을 돋우는 식욕촉진제가 됩니다. 조상 대대로 노린재나무 잎을 먹다보니 치명적인 독 물질에 내성이 생긴 덕입니다. 게다가 이 독물질을 원료로 해 자신을 지키는 방어물질을 만드니 노린재나무의 독 물질은 아기 뒤흰띠알락나방에게 여러모로 생명줄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어른이고 아기고 뒤흰띠알락나방은 노린재나무가 풍기는 독 물질 냄새를 맡으면 홀린 듯이 이끌립니다. 어른벌레는 알을 낳으러 찾아오고, 애벌레는 알로 있던 노린재나무 잎에서 식사를 하고. - 책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에서

노린재나무로 만든 잿물이 매염제로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비누의 원료인 수산화나트륨(NaOH)이 많이 들어 있어서 매염제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린재나무는 왜 이런 성분들을 가지게 되었을까. 초식동물들에게 쓸데없이 뜯어 먹혀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노린재나무뿐일까. 모든 식물들은 자기 몸을 방어하기 위한 고유한 물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쉬운 예로 우리들이 봄에 먹는 두릅순의 독특한 향은 두릅나무가 노린재나무처럼 몸을 보호하고자 갖춘 방어물질 중 하나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릅나무의 순을 좋아해 싹이 돋는 족족 뜯어 먹는 것처럼 도리어 그걸 이용해 살길을 찾는 곤충들이 꼭 있는 것이고.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 겉표지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 겉표지
ⓒ 상상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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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하다보면 초봄부터 초여름 무렵까지 특히 많은 애벌레들을 만나게 되는데, 좀 더 관심을 두고 살펴보면 같은 종류의 나무에는 같은 벌레로 보이는 애벌레가 살아가고 있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아가 몇 년을 두고 살펴보면 지난해 그 나무에서 봤던 그 애벌레를 올해 다시 그 나무에서 볼 수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잎에 함유한 독물질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는 노린재나무를 오히려 삶의 터전으로 삼아버린 뒤흰띠알락나방처럼 다른 곤충들 역시 자신만의 특별한 식물을 선택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지라 특정 식물과 그에 깃들여 살아가는 곤충을 알면 비슷해 보이는 애벌레가 어떤 곤충의 아기인지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특정 식물과 그에 깃들여 살아가는 곤충들의 생태나 신비로운 세계까지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상상의 숲 펴냄)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고 말면 산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나무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살펴보거나 나아가 어떤 특성을 가진 어떤 나무인지 관심을 두고 살펴보게 되면 상상 이상의 것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나무와 그에 깃들여 사는 곤충들의 은밀한 관계들을 들려준다.

이야기는 모두 30꼭지, '싸움이든 공생이든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 살아가는 곤충들과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전략과 아름다운 공생을 키가 작은 나무(조팝나무나 박쥐나무, 쥐똥나무, 병꽃나무 등)와 키 큰 나무(물푸레나무나 팽나무, 합다리나무 등), 그리고 덩굴나무(노박덩굴과 등칡, 청가시덩굴, 사위질빵 등)로 나눠 들려준다.

곤충은 꽃잎에 반사되는 자외선을 보고 찾아옵니다. 곤충의 눈에 노린재나무 꽃잎은 바깥쪽보다 안쪽이 더 강렬한 색으로 보입니다. 강렬한 색 부분이 자외선이 반사되는 부분이고, 바로 '꽃 안내판(허니 가이드 혹은 유인색소라고도 함)'이지요. 노린재나무 꽃은 꿀 안내판을 꽃 한가운데 그려 놓고 곤충들에게 먹을 것이 있다고 광고를 합니다. 또한 꿀 안내판을 따라가면 수술들이 노란 꽃가루를 머리에 이고 있지요. 노란색도 모든 곤충이 잘 알아보는 색으로 여겨지고 있어 자외선과 더불어 꽃을 찾는데 한 몫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잎이 우거진 숲에 꽃이 달랑 한 송이만 피어있다면? 그것도 팥알만 한 작은 꽃이? 곤충의 눈에 띄기란 하늘의 별따기죠. 그래서 노린재나무는 꽃자루 하나에 꽃을 수십 송이 달아(원추꽃차례) 멀리서 보면 커다란 꽃이 피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에서

저자는 2010년 <곤충의 밥상>을 시작으로 2011년에는 <곤충의 유토피아>, 2012년에는 <곤충 마음 야생화 마음>이란 책으로 곤충들의 흥미롭고 독특한 세계를 일반인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들려주고 있는 정부희 교수다.

참고로 <곤충의 밥상>과 <곤충의 유토피아>는 곤충들의 까다롭고 특별한 먹이 습성과 다양한 삶의 터전이 주제인 책. '더러운 벌레' 혹은 '해충'으로 보기 일쑤였던 곤충들의 특성들과 신기한 세계를 맘껏 만날 수 있어서 흠뻑 빠져들며 읽었던 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자주 펼쳐보는 그런 책이기도 하고.

저자를 처음 알게 된 <곤충의 밥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독성이 있어서 아무 곤충이나 쉽게 먹지 못하는 족도리풀 잎에만 알을 낳는다는 애호랑나비 이야기. 애호랑나비는 대략 18개의 알을 낳는데, 알에서 깨어난 형제 애벌레들끼리 먹이를 두고 싸우는 비극을 막고자 잎이 시원찮으면 알을 적게 낳는 등 족도리풀 잎의 상태에 따라 알의 개수를 조절한다는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게 남고 있다.

쪽동백나무에 사는 애벌레(북한산 2011.6.6)
 쪽동백나무에 사는 애벌레(북한산 20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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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배나무에 사는 애벌레. 어른 벌레가 궁금하다(북한산 2009.5.14)
 팥배나무에 사는 애벌레. 어른 벌레가 궁금하다(북한산 2009.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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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독성이 있는 (점박이)천남성에 사는 애벌레(북한산 2011.5.28)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독성이 있는 (점박이)천남성에 사는 애벌레(북한산 201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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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애벌레인지 제대로 알려면 식물까지 제대로 찍었어야 하는데...
 어떤 애벌레인지 제대로 알려면 식물까지 제대로 찍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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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보니 암술과 수술이 모두 'J'자 모양으로 약간 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식구끼리 꽃가루받이가 되면 어쩌지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암술이 수술보다 1.5배 길어서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잘 묻지 않습니다. 설령 식구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 암술머리에 묻더라도, 또 중매곤충의 몸에 묻은 식구의 꽃가루가 묻더라도, 꽃가루가 식구의 것이면 암술이 금방 눈치 채고 꽃가루관이 자라지 못하게 막습니다. 만일 꽃가루관이 싹이 터 암술자루를 타고 자라더라도 중간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막아 버립니다. 또 어쩌다 수정이 되었다 해도 배(수정 후 이뤄지는 발생 초기 단계의 어린 생물)가 발생하다 멈추거나 발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씨앗을 만들지 못합니다. 즉 자기 꽃가루(화분)가 자기 암술머리(주두)에 떨어져 꽃가루받이(수분)되어도 수정이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자가불화합성' 또는 자기꽃불임설'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친족끼리 결혼을 하면 자손에게서 열성 유전자가 발현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달래꽃은 식구 사이의 수정을 이렇게 능동적으로 막은 조상이 있었기에 건강한 후손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참 똑똑한 식물이지 않나요?-<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 '진달래꽃과 봄 곤충'편에서

꽃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추고 눈이 머물곤 한다. 조금만 눈 여겨 보노라면 조용히 몸을 들썩여가며 꿀을 먹는 곤충들부터 '왜 저렇게 오두방정을 떠시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꽃 저 꽃 촐랑대며 꿀을 먹는 곤충, 꽃이 망가질까 염려될 정도로 꽃을 마구 헤집어대는 곤충 등 다양한 곤충들의 다양한 먹이 모습을 볼 수 있다.

꽃으로선 이 꽃 저 꽃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꽃가루받이를 도와주는 곤충들이 반가울 법한데 고집스럽게 한꽃에만 앉아 꽃술을 마구 헤집어가며 꿀을 먹는 곤충을 보노라면 '저런 곤충들만 날아들면 꽃가루받이는 제대로 되나? 같은 꽃의 암술과 수술이 수정되면 장애 꽃이 나올지도 모르는데'와 같은 쓸데없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말이다.  

식물 관련 책들은 대개 식물 이야기만, 곤충 관련 책들은 대개 곤충 이야기만 들려주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 저자의 책들은 모두 이처럼 각각의 곤충들과 식물들의 특성이나 생태를 알려줌은 물론 둘의 관계까지 세심하게 알려준다. 그래서 얻는 것들도 훨씬 많고 그런 만큼 훨씬 재미있다. 때문일까. 벌써부터 이 저자의 다음 책이 몹시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l 정부희 (지은이) | 상상의숲 | 2013-04-15 | 정가 45,000원



나무와 곤충의 오랜 동행 - 야생의 오랜 친구, 나무와 곤충의 소리 없는 전쟁과 대화

정부희 지음, 상상의숲(2013)


태그:#노린재나무, #뒤흰띠알락나방, #정부희, #곤충,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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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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