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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은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일명 '사법살인'이 일어난지 3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008년 재심 무죄판결로 피해자들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최근 그들과 가족들이 다시 신음하고 있습니다. 유신시절 고문과 조작의 가해자였던 국가는 2011년 이후 빚을 독촉하는 채권자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이 기획은 그에 대한 고발입니다. [편집자말]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 씨가 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아버지 뒤를 이은 박근혜 대통령 임기에 벌이진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박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세상을 크게 본다면, 그렇게 올바른 길로 간다면 스스로 빛날 거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도 좋지만 그 지위에서 합당한 일을 하면 사람이 빛이 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과거의 아픔을 씻어주는 대통령, 지혜로운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 씨가 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아버지 뒤를 이은 박근혜 대통령 임기에 벌이진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박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세상을 크게 본다면, 그렇게 올바른 길로 간다면 스스로 빛날 거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도 좋지만 그 지위에서 합당한 일을 하면 사람이 빛이 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과거의 아픔을 씻어주는 대통령, 지혜로운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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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39년 전 대법원 선고일(1975년 4월 8일)이다. 그날 법정 분위기 등은 여전히 생생한가.
"당시 대법원에는 출정을 못했다. 우리는 요구했는데, 교도소와 정부 당국이 허용하지 않아서 못 나갔다. 안양교도소에 1년 가까이 있을 때였다. 1년 가까이 되도록 가족 면회 한 번 못했는데 대법원 확정판결 받은 다음 날에야 면회가 허용됐다. 그때 가족들을 통해서 여덟 분(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의 희생을 알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시간이 40년 가까이 지났어도 그때 받은 정신적 충격은 잊지 못한다."

- 서울대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여러모로 촉망받았을 텐데 인혁당 재건위사건에 어떻게 휘말린 건지.
"당시 지식인의 사회적인 사명감, 이런 걸 갖고 살았다. 그래서 유신정권 하에 삼선개헌, 유신 등에 침묵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타당한 일 아니라고 봤다. 장준하 선생이 주도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 100만인 서명 받는 활동도 하고 그랬다.

이런 문제에 관심 갖다 보니까 대학생들의 긴급조치반대 활동, 그에 대한 탄압 국면 등에 눈길이 갔다. 당시 경북대나 서울대 등 학생들이 돌린 유인물을 받아보고 지인들과 만나서 자연스럽게 시국 얘기도 나누고 했다. 다른 인혁당 재건위사건 피해자들 가운데 김용원·황현승 선생이나 김종대 선생은 대학 다닐 때부터 알았던 사이였다."

- 체포되던 날 상황은 어땠나.
"그냥 집에 있다가 끌려갔다. 1974년 5월 3일쯤이었다. 서울시 강북구 번동 쪽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침에 건장한 남자 서너 명이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와서 집으로 들어오더니 설명도 없이 끌고 갔다.

가보니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이었다. 첫날은 온종일 한 사무실에 집어넣어 놓고선 그냥 놔두더라.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저녁에 갑자기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내가 어찌해서 이렇게 됐다고 썼는데, 자기들이 보더니 의도한 바와 맞지 않으니까 그 다음부터 고문이 시작됐다."

- 어떤 고문이….
"뭐 무지막지하게 난타했다. 침대봉 있잖아요? 그걸로 엉덩이 쪽을 쳐서 너덜너덜해지고 새까맣게 될 정도였다. 그날 저녁에 그렇게 고문당한 뒤에도 뭐 달리 아는 게 있어야지…. 근데 또 사실대로 쓰면 틀리다고 하니까… 나중에는 '김용원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맞춰 써라'고 해서 그쪽에서 제시하는대로 썼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이후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가 검찰 취조를 받는데 거기선 사실대로 밝혀야겠다 싶어서 진술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검사가 눈빛으로 신호를 주니까 중정 대공분실 요원이 다시 지하실로 데려가더라. 그때 마음이 상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 고문 받고 나서 대인공포증, 불면증 이런 것들이 전부 생겼다."

-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겪고… 그때 정신적인 부분이 망가져버린 것 같다. (지하실) 갔다 와선 어쩔 수 없이(검사 등이) 하자는대로 다 도장 찍어주고 한 게 우리 사건의 전모가 됐다."

-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8년간 옥살이 후에도 생활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간 아픔이야, 그렇게 쉽게 치유되는 것도 아니고…. 나와서도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했다. 보안관찰대상자가 돼서 한 달에 한 번씩은 대공분실 요원 점검을 받았다. 어디 간다고 하면 반드시 이동 경로는 어떤지, 무슨 일로 가는지 등을 제출해야 했다. 주변에 보이지 않는 시선들도 많았다.

1983년인가 1984년쯤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이사갔을 때, 우리 아이들과 옆집 아이 독서지도를 했다. 근데 한 아이가 '할아버지는 간첩이죠?'라더라. 어린 아이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로 섬뜩한 아픔을 겪었다. 주변 아이들에게까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감시당하며 사는 데다 인혁당 재건위사건 당사자라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인연을 끊었다. 그런 와중에 이웃에게서조차 그런 얘기를 들었으니…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 씨가 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창문 넘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2008년 재심에서 무죄판결로 피해자들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최근 대법원이 배상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에 그들은 또 다시 채무자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신세가 됐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 씨가 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창문 넘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2008년 재심에서 무죄판결로 피해자들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최근 대법원이 배상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에 그들은 또 다시 채무자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신세가 됐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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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계에 어려움은 없었나.
"인혁당 재건위사건 전부터 학원에서 강의를 하곤 했다. 출소 후에 강사를 모집한다기에 지원했는데 합격했다. 이제 강의만 하면 되는데 구청에서 신원증명서를 받아오라더라. 서류를 제출했더니 거기에 '긴급조치 1·4호 등 위반'이라고 나오니까 학원 쪽에서 펄쩍 뛰면서 (강의하면) 안 된다고(웃음). 취업이 안 됐다. 그전까지는 상가주택이 있고 해서 별 불편함 없었는데 갑자기 큰 풍파를 겪었다. 8년 동안 아이들과 집사람을 고생시켰으니 가장으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을 담보로 독서실을 시작했고, 나중에 외국어학원을 차렸다.

입소문도 나서 학생들이 제법 모였는데 교도소시절 받은 충격이 남아서 학부형들 관리를 못했다. 학생들 강의할 때는 괜찮은데 성인을 만나면 위축돼서 가슴이 뛰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교도소 안에서도 불면증이라든가 여러 가지 정신불안증, 대인공포증에 시달려서 약을 먹었다. 나와서도 계속 증상이 있어서 남들 보기엔 멀쩡한데 혼자서 고통에 시달렸다. 잘 때도 땀을 흘리고. 극복해보려고 정신과 병원 치료 받고 약 타먹고 온갖 짓을 다했다. 나중에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안 좋아서 시골 가서 요양할까 하고 1987년 양평군으로 왔다. 그러면서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고, 지금은 많이 회복됐다.

그런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을 신청했다. 심의 결과 정신장애 판정을 받았는데, 위로금을 더 준다는 걸 받지 않았다. 형사보상금도 안 받았다. 민사로 국가배상금을 청구했으니까 그것만 받으면 되겠지, 또 그 정도면 되겠지 싶었다. 이래저래 국민 세금으로 받는 돈 아닌가.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일부를 포기했다. 그랬다가 이러한 지경에… 세상에 이렇게 가혹하게 할 수 있는가."


태그:#인혁당, #사법살인, #국가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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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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