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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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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곤은 아침 차를 들면서 장부를 살펴보았다. 표국을 개설한 오년 동안 그런대로 성장세를 이어 왔다. 개봉의 숭양표국, 낙양의 대창표국, 장안의 서풍표국과 더불어 화북의 4대표국으로 자리잡기까지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다.

본시 무도에 뜻을 두고 평생 무인으로 살려고 했던 삶이 이렇듯 변할 줄은 자신도 몰랐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더욱 놀랐던 건 자신에게 운영의 자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뛰어나게. 비룡문을 이끌 때에도 4대 제자 중 가장 재바르다는 평에 어울리게 문파가 융성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그저 비천문을 계승한 무공 덕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하나의 문파가 강호에 이름을 높이는 건 무공도 무공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운영의 묘가 더 중요했다. 타 문파와의 교류라든가 강호인들 사이에서의 신망 같은, 무공 외적인 것이 더욱 컸던 것이다.  

4대 제자 중 문파를 개조한 제자는 첫째 사형 모충연과 막내인 담곤 자신 밖에 없었다. 둘째 사형 기승모가 낙양에서 비사문(飛嗣門)이라는 문패를 잠깐 걸긴 했지만 불과 이년도 안 돼 폐문하고 은둔해버렸다. 셋째 사형 습평은 애초부터 은둔의 길을 택해 결과적으로 비천문을 계승한 문파는 비영문과 비룡문만 남게 되었는데 자신마저 표국에 전념하다 보니 비천문의 적통은 비영문으로 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제 모 사형이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비천문의 적통은 비영문이 아닌 비룡문이라고 강호인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다.  

그나저나 그저께는 금의위에서 오더니 어제는 은화사에서 왔다. 모 사형의 임종과 관련해 모종의 비밀이 얽혀있는 것 같았지만 무슨 일인가는 끝내 말하지 않고 있다. 사형에게 관조운이란 제자가 있었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3년 전에 사형을 뵌 적은 있지만 당시는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공을 전수하는 제자 따위는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표국에서 잠복하는 인원은 총 열두 명이다. 금의위 인원이 아홉 명이고 은화사가 세 명이다. 은화사 총관이 금의위까지 같이 지휘하는 것 같았다. 동창의 위세가 많이 쇠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금의위의 상부기관 노릇을 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은화사에서 떠맡은 임무인데 금의위에 인력 지원을 요청했거나. 은화사를 지휘하는 예진충이란 자는 송충이처럼 진한 눈썹만 빼고는 아주 평범한 인상이다. 감찰기관 특유의 위협적인 말투나 유세 부리는 태도도 없다. 하지만 푸근한 반면 어딘지 모르게 단호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아무리 캐도 끝을 알 수 없을 것처럼 한눈에 쉽게 파악되지 않는 자이다.

금의위 무사들은 은밀하게 잠복하여 표국 일에 그다지 방해를 주진 않았다. 그러나 외부 사람들이 표국을 맘대로 휘젓고 다니는 게 그다지 맘에 들진 않았다. 이들을 빨리 철수시킬 방법이 없을까. 담곤의 고민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장문인 어른, 저 택영입니다."

총관사 금택영이 목소리가 들렸다.

"오, 금 관사, 어서 오게."

택영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수헌당 거실로 들어섰다.

"다름이 아니라 장문인 어른께서 작천방의 표물을 직접 확인해 주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왜 그러나? 표물 확인서야 자네가 알아서 발행하면 되지 않은가."
"그게 아니고 장문인 어른께서 직접 확인해야 할 사항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 뭔가 문제가 있던가?"

담곤이 찻잔을 입에 대다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문제라기보다는 이번 표물만큼은 인수 전표에 장문인 어른의 수결을 받아오라는 작천방 배 대인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수결하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표물을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할 이유가 달리 있는가?"

표물을 확인하고 인수인계 절차를 밟는 건 관사 택영의 주관 하에 모두 처리한다. 장부와 서류에 관한 건 거의 모두를 택영에게 일임하였고, 그는 주로 손님들을 접대하거나 대형상단의 호위임무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전략을 짜는 등에 주력하고 있다.

"글쎄, 저도 그 이유를 딱히 모르겠습니다만, 비단 오십 동(棟)이면 상당한 양이고 특히 이번 비단은 공납(貢納: 나라에 바치는 특산물)에 버금가는 최상품 금사(錦絲)인데 상단의 목적지가 위험한 서하(西夏) 쪽이니 만큼 장문인 어른의 각별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래? 물자를 확인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더구나 배 대인이 각별히 요청했다고 하니 모른척 할 순 없지."

담곤이 장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융전에서 수헌당 사이에는 너비가 오십 걸음 길이가 팔십 걸음이 되는 공터가 있다. 이곳에서 각지에서 온 표물을 집결하고 분류한다. 그리고 공터의 길이만큼 창고가 연해 있다. 작천방은 거래가 잦고 물량이 많은 만큼 전용창고가 따로 있다. 오른편 임질재 바로 앞에 있는데 개별 상단의 창고로는 가장 크다.

담곤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컴컴한 실내에 먼지 냄새 같기도 하고 식초 냄새 같기도 한 종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창고는 서늘하고 어두웠다. 일정한 기온과 습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창을 내지 않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택영이 뒤따라오면서 초에 불을 붙이고는 등롱에 넣었다.

"저어, 장문인 어른, 저는 지금 나가장(羅家莊)으로 보내야할 생물(生物)을 급히 마무리져야하기에……,  저는 이만……."

황궁에 특산물로 보낼 정도로 유명한 화명지(華明池) 잉어를 나가장에 보내야 하는 건 담곤도 알고 있었는데 바로 오늘 도착한 모양이다. 나가장이라면 표국의 알아주는 큰손인데다 더욱이 생물이라면 택영이 이만저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고 운송도 조심스러워야 하기에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창고에서 한가하게 숫자나 셀 일은 아니다.

"그래? 금 관사는 나가장 생물을 잘 챙기도록 하게. 이곳을 내가 확인하고 수결을 할 테니."

택영이 담곤에게 등롱을 넘기고는 허리를 굽히며 뒷걸음질로 창고를 나갔다.

담곤은 비단이 실린 수레 앞으로 다가갔다. 비단 오십 동(棟)이면 우마차로 세 대분인데 네 대의 수레가 놓여 있다. 필(匹) 당 크기가 달라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곤이 수레 하나에 눈길을 모으고 한 변의 길이와 높이를 어림짐작으로 헤아리고 있는데, 가운데 수레의 비단이 와르르 무너졌다. 담곤이 놀라 바라보니 안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둘이. 담곤은 뒷걸음치며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선남선녀다. 그들이 비단더미 속에서 솟아난 것이다. 이게 무슨 옛날이야기 같은 장면인가. 담곤의 얼굴에 놀람보다 의아함이 그려졌다.

"담 사숙어른께 관조운 인사드리옵니다."

하면서 청년이 읍을 한다.

"소녀 혁련지도 사숙어른께 인사드립니다."

낭자가 단전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힌다.

수헌당 앞 임질재의 거실, 거탁을 사이에 두고 네 명이 앉아 있다. 모두 날렵한 경장차림인데 중년인과 청년 각각 한 명씩 서로 마주보고 있다. 아침부터 회의를 소집한 건 은화사였다. 처음 금의위와 은화사가 이곳 비룡표국에서 만났을 때 지휘권을 누가 갖느냐를 두고 보이지 않는 기세 다툼이 있었다. 금의위가 호락호락하지 않아 자칫하면 각자가 움직일 뻔했다. 무엇 때문인지 금의위는 금릉에서보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혹시 금의위에서도 눈치를 챈 건 아닐까, 예진충은 생각해보았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금의위라고 자체 정보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금릉에서 수배협조를 요청할 때부터 금의위는 은화사가 무언가를 쫓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이럴 때일수록 틈을 보이면 안 된다. 금의위를 잡지 못하면 앞으로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게 된다. 은화사는 자체 인원이 적어 수색과 추적에 애로가 많기 때문이다.

예진충은 결국 마지막 수단을 썼다. 황궁의 비표를 내밀며 동창의 최고수반인 태감의 밀명이라는 걸 강조함으로써 상황을 장악한 것이다. 풍천의와 조복이라는 자는 일개 지역의 책임자인지라 그들의 수장인 지휘사의 교지가 없는 한 승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은화사의 예진충이 자연스럽게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예진충은 풍천의와 조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틀 동안 비룡표국을 샅샅이 감시하고 잠복을 했지만 소득이 없구려. 관가 놈이 여기 온다는 건 확실한 정보입니까?"
"제가 입수한 첩보도 첩보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더라도 그자가 준목규운 담곤을 찾아 온다는 건 거의 확실합니다. 다만……."

조복이 답했다.

조복은 은화사에서 온 이 자가 첩보의 근거와 제보자가 누구냐고 파고들지 않기만을 바랐다. 막상 따지고들면 둘러댈 말이야 많다. 신분을 밝힐 수 없는, 민간에 심어놓은 세작이라 해도 되고, 하다못해 그만한 정보력과 수집력 쯤은 금의위에서 있다는 식으로 눙쳐도 그만이다. 그러나 한 개의 거짓을 만들어 놓으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웬만하면 관조운이 모충연의 제자이니까 그의 사숙인 담곤을 찾아오는 건 당연한 추론이라는 식으로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

"다만, 뭐요?"

예진충이 다그쳤다.

"지금쯤이면 충분히 오고도 남았을 것인데,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엊그제 박주에서 관병과 마주치자 그들을 해하고 서북관도로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이틀 안에는 정주에 미칠 것으로 생각하는데, 오늘까지 잠복해 보고 기미가 없으면 제가 오판한 걸로 인정하겠습니다."

"오판을 인정한다…….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소."

예진충의 눈빛이 삼엄해졌다.

"우리 금의위로서도 갑작스럽게 통보를 받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점은 있소이다. 이점 예 총관께서 해량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풍천의가 나서서 조복을 거들어 주었다.

"상황보고를 해주시오."

예진충이 말했다.

"표국 내에서 담 국주의 행동은 우리가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가 주로 거하는 수헌당과 구연정은 물론 그밖에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우리 요원의 눈길 안에 있습니다. 그동안 그가 표국 밖으로 나갔거나 수상쩍은 손님을 맞은 적도 없습니다."

조복이 보고했다.

"좋소, 담곤에게는 기밀을 유지한 채 오늘까지 기다려봅시다."

예진충은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속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관조운이 비룡표국으로 잠입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금의위가 보고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추리가 맞아 떨어진 것에 기뻐했다. 관조운이 모충연으로부터 무극진경에 관한 어떤 실마리를 들었다면 당연히 그들의 사숙인 담곤에게 찾아 갈 것이라는 걸 좀더 일찍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난 몇 년 동안 숨죽여 가며 비천문의 4대 제자의 동향을 감시해왔는데, 막상 일이 터지자 계속 뒷북만 쳤다. 두 달 전 장강편운 습평이 피살당한 것은 예상치 못했다치더라도, 나흘 전 모충연이 피습 당했을 때 한발 늦은 건 정말 뼈골이 쑤셨다. 습평 다음에 모충연 아니면 담곤이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걸 왜 놓쳤을까. 부랴부랴 은화사 소주지부에 연락해 모충연의 애제자 혁련지의 저택을 수색해 보았지만 성과는 물론 그 어떤 낌새도 없었다. 경쟁 상계의 몽니로 위장하고 발을 빼긴 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너무 앞서 행동하는 바람에 자칫하면 노출될 뻔까지 했다. 이번 임무는 하나부터 열까지 꼬이고 있다.

상대부 노순광 어른도 못미더웠는지 그의 자제와 첩형관 채욱까지 경부(京府)에서 파견하지 않았는가. 상대부가 이번 임무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는 예진충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동창이 자체 무력을 갖추기 위해 비밀조직 은화사를 창설했지만, 최고의 무력을 갖추기 위해서 무극진경은 꼭 필요하다. 조정의 감찰기관 중 금의위는 어림군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태생이 무력을 갖춘 조직이고, 도찰원은 공식적인 감찰기관이기 때문에 병부의 군사를 언제든지 요청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동창은 가장 실세이면서도 따지고 보면 무력조직조차 없는 것이다. 이를 가장 아쉽게 여긴 사람이 전 사례감이자 아직도 환관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상대부 노순광이다. 그는 간관(諫官)의 상소에 의해 사례감직에서 물러난 후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했다. 간관의 탄핵 뒤에는 도찰원의 견제가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주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공작을 시도했다. 정적(政敵)들에게 자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도찰원은 대비를 했고, 금의위는 자객 이상의 무위를 갖춘 곳이 아니던가.

그 사건 이후 상시적인 무력을 갖춘 조직이 그에겐 절실했다. 동창 내부에서 은화사를 조직한 지 삼년 반, 물러터진 현 제독동창(提督東廠: 태감) 군제상을 설득하여 반쯤은 공식화했지만 황상의 재가가 확실히 떨어진 게 아니어서 대명률의 명부에 오르지도 못했다. 하루 빨리 최고의 수준의 무력을 확보해놓고, 조정의 의론이 가라앉으면 허수아비 태감을 물러나게 한 후 자신이 그 자리를 차고앉아야 했다. 그래야만 옛 시절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누누이 말하던 상대부였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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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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