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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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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면 넷째 사숙이 사부님에게 편지를 띄우며 왕유의 시를 인용했고, 사부님이 답장에서 언급한 것으로 봐 '춘계문답'이 넷째 사숙을 가리킨 것이라는 혁련지의 추리는 옳았다. 그녀 총명 덕분에 이곳까지 왔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일단 사부님이 남기셨다는 문집을 찾아야 한다. 혹시 그곳에 답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서실에 있는 책은 모조리 훑어보았지만 문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허탈한 얼굴로 마주보았다.

"할 수 없죠, 뭐, 별채를 전부 뒤져보고, 여기에서도 발견하지 못하면 자운헌 전체를 샅샅이 찾아봐야죠."

혁련지가 새롭게 마음을 먹은 듯 말했다.

둘은 서실을 나와 거실로 들어섰다. 돌연 혁련지가 아, 하며 다시 서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사형, 이것 좀 봐요?"
하고 관조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관조운이 서실로 다시 들어가자 혁련지가 자기(瓷器) 문병(文甁)을 거꾸로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곧이어 그녀는 문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안에 있었어요. 병이 좁아 안이 안보여서 그렇지, 햇볕을 안에 비추고 자세히 보아요."
"정말?"

관조운이 문병을 들고 창가로 갔다. 그리고 문병을 기울여 입구 쪽으로 햇빛이 들어가게 했으나 검은 물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별거 없는데. ……시커멓기만 하고."
관조운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자세히 보세요. 검은 게 뭐죠?"
그말을 듣고 관조운이 검은 물체를 자세히 보니 숯이다. 좀더 살펴보니 숯을 둘러싸고 종이 같은 게 희미하게 보였다. 문병 안쪽 몸통을 따라 둘려진 것이다.

혁련지가 주방으로 가서 기다란 젓가락을 가져와 문병 안에서 숯을 꺼낸 다음 조심스럽게 종이다발을 꺼냈다. 꺼내고 보니 책자다. 갑갑한 감옥을 벗어난 책자가 푸드드 머리를 털었다. 먼지가 흩날리고 묶은 종이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문집은 얇았다. 전체 면수가 육십 쪽 내외에 불과했다. 종이 또한 최상급의 얇은 미농지였다. 부피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우리가 왜 이 생각을 진작 못했을까."

관조운이 말했다.

"문집이라 생각하고 책장하고 책자가 있을 곳만 찾아서 그런 거예요. 설마하니 책을 문병 속에다 넣을 줄을 누가 알겠어요."

혁련지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도 생각을 많이 하셨을 거예요. 누구나 볼 순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못 찾게 할 순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고민하시다 여기 넣으신 거죠. 정말 절묘했어요."
"다행이야. 우리가 찾을 수 있었으니까."

관조운이 문집을 살펴보았다. 겉장에는 '사운첩(思雲帖)'이라는 표제가 쓰여 있다. 안장을 넘기니 눈에 익은 글씨가 보였다. 부드럽되 흐드러지지 않고 소박하되 얕지 않은 필체가 스승님의 품성을 빼닮았다. 책의 종류는 시문집(詩文集)이다. 한유, 이백, 두보, 왕유, 소식, 등 주로 당송(唐宋) 대가(大家)의 시(詩)와 부(賦)를 엮은 책이다. 대가의 시를 필사하고 그 밑에 자신의 감상을 간단히 적었다. 그리고 간간이 자작시(自作詩)도 보였다.

관조운은 스승의 시를 보자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시문의 자질로 볼 때 스승님은 무(武)가 아닌 문(文)이 어울렸을 것 같았다. 그는 스승의 시를 찾아 몇 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보통 대가의 글은 대가의 글대로, 자문(自文)은 자문대로 모아놓던가 아니면 시는 시대로, 부는 부대로 나눌 텐데 그런 분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은이 별로 구분한 것도 아니고 주제 별로 모은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한유의 시가 생각나며 한 장 적고, 소식의 부가 떠오르면 또 한 장 적고, 두보의 시가 기억나면 또 한 장을 적는 식으로 두서없이 묶어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관조운이 아는 사부님은 결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순서와 절차의 구분이 엄격한 분이셨다. 그와 함께 공부를 할 때, 어떤 경서나 시문도 출처와 용도 별로 구별하고 분류하신 분이셨다. 사년 전이라고 해서 이런 식으로 두서없이 편찬하실 분은 절대 아니다. 넷째 사숙의 말을 들어보면 둘째 사숙의 치료를 위해서 이곳 산장에 왔다고 했다. 병자를 정양하는 한가한 산장에서 쫓기듯 혹은 억지로 아무렇게나 하듯 문집을 만들 이유는 없다. 조운은 책을 묶은 끈을 살펴보았다.

매듭과 형태가 사부님답게 튼튼하고 빈틈이 없다. 급하게 묶거나 대충 묶지 않았다. 즉 시간에 쫓겨 급히 만든 게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대가(大家)들의 시와 부를 필사하고 간간히 자작시를 끼워 넣으며 편찬하는 과정에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인가 혹은 드러나지 않은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인가. 우연히 아무렇게나 편집한 걸 가지고 내가 과하게 생각하는 것인가. 관조운은 혁련지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혁련지도 사부님의 기질로 볼 때 결코 아무렇게나 편집하진 않았을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그녀는 문집을 천천히 넘겼다. 문집은 겉장을 뺀 면수가 64쪽에 불과해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체를 일별한 혁련지는 이번에는 뒷장부터 앞으로 넘기면서 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쪽수와 번호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령 2쪽의 두 번 째 시는 두목의 작품이었는데 왼쪽 귀퉁이 쪽 번호는 이십팔(二十八)로 적혀 있고, 11쪽 소식의 부(賦)에는 사십이(四十二)가 적혀 있는 식이었다. 혁련지는 무슨 규칙이나 숨어 있는 의미가 있을까 싶어 살펴보는 기색이었으나 종내는 그녀도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 스승님의 시문집을 찾긴 했으나 기대했던 대로 진경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궁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간 느낌이다. 스승 모충연은 비영문을 은퇴하고 모옥에서 한가롭게 지낸 게 아니라 금의위 무예서 집필에도 관여했는가 하면 강호의 소식을 나름대로 수집하며 알게 모르게 촉각을 세운 것 같았다. 이제 기승모를 수소문했는가 하면 삼제 습평에게도 연락을 했고, 급할 땐 사제 담곤에게 찾아오기도 했다. 관조운이 모옥을 방문했을 때 한가로이 지내던 아니 한가롭게 보이던 일상이 스승님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 하루가 지났다. 관조운은 초조해졌다. 별 다른 해답이나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가운데 산중에 있자니 마음이 불안했다. 이렇게 되면 산장이 안전한 은거지가 아니라 오히려 퇴로가 막힌 막다른 곳으로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은화사나 금의위가 자신들의 행방을 파악하고 추포할지 모른다. 하루만 지나면 금의위는 비룡표국 국주 담곤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숙이 자신과 사매와 함께 빠져나갔으리라고 자연스레 추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산장이 노출 안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며칠이 지나면 발각되고 말 것이다. 운대산 초입에서 습격한 흑의인만 보아도 자신들의 행적이 누군가에게 알려졌다는 증거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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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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