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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편 떠먹는 삼국유사> 책표지.
 <하루 한 편 떠먹는 삼국유사> 책표지.
ⓒ 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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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국유사>(5권 2책, 국보 제306호, 국보 제306-2호) 관련 책인 <하루 한편 떠먹는 삼국유사>(화담출판사 펴냄)을 읽었다.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와 <길 위의 삼국유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등 지난 몇 년간 삼국유사 관련 몇 권의 책들을 읽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우선 먼저 뽑아 읽은 것은 '천수대비가(도천수관음가)'와 '정수사구빙녀'다.

내가 아는 한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이유를 가장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로 몇 번을 읽어도 의미가 남다르게 와 닿기 때문이다. 불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라 불자인 내게 좀 더 각별하게 와 닿는다.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희명이라는 계집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멀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 앞에 나아가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렇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 공손히 모아/천수관음 앞에서 간절하게 비옵나이다./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둘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내어 주시옵소서./아이 저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 얼마나 클 것인가.
-<하루 한 편 떠먹는 삼국유사> '분황사 천수대비, 눈 먼 아이를 고치다'편에서.

전해지는 향가는 총 25수. 이중 삼국유사가 전하는 향가 14수 중 하나인 '천수대비가' 이야기다. <삼국유사>를 쓴 당시나 그 이전에는 불교가 우리 민족의 대표 종교라 이 천수대비가도 불교의 상식을 더해 읽으면 훨씬 의미 있어진다. 그리고 감동스러워진다. 아니,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이유와 목적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된다.

천수대비는 관세음보살을 달리 부르는 명칭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지장보살과 함께 가장 친근한 관세음보살은 대개의 불상들처럼 눈 두 개, 손 두 개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나, 수많은 손과 수많은 눈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수많은 중생들의 수많은 고통들을 낱낱이 헤아려 보살펴 준다는 보살, 그 상징으로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표현한 것이다.

그야말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이다. 이런 관세음보살 벽화 앞에 무릎을 꿇고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 앞날이 캄캄한 딸과 그 어미는 애원을 한다. '제발 눈 좀 뜨게 해달라고. 당신의 그 수많은 눈 중 두 개도 말고 한 개만 덜어 내 딸이 앞을 보게 해달라고. 우리의 이 딱한 사정을 못 본 채, 베풀 수 없는 자비라면(고통을 외면한다면), 당신의 자비가 아무리 크고 밝은들 자비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무슨 소용이냐고.

이 이야기와 함께 늘 먼저 읽곤 하는 '정수사구빙녀'도 불교 상식을 더해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애장왕 때, 황룡사는 대단한 규모의 절로 조정에 나가 힘깨나 쓴다는 스님들과 덕망이 높다는 스님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정수는 이런 황룡사의 존재 미미한 승려에 불과했다고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알아서 공부하는 그런 평범한 승려 말이다.

그해 겨울 그 날 눈이 많이 왔다. 삼랑사 등으로 탁발하러 갔다가 황룡사로 돌아가던 정수는 천암사 앞에서 아이를 낳은 후 다 죽어가는 거지 여인을 보게 된다. 정수는 숨소리조차 희미한 거지 여인을 오랫동안 끌어안아 자신의 체온으로 살린다. 그런 후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벌거벗은 채 황룡사로 뛰어간다.

절에 갔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는 정수는 거적때기로 추운 겨울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입고 있는 옷 한 벌이 전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전 재산을, 그것도 더러운 거지 여인을 살린다고 벗어준 정수를 보고 다른 승려들이 속된 말로 한심하다, 미쳤다고 손가락질 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무리 거지라고 해도 여인임이 분명한데 승려가 여인의 속살을 품었으니 계율을 어긴 것(파계)이라며 내쫓아야 한다고 수군거렸다던가.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1206~1289)이 자신이 머물렀던 곳의 역사와 일화(혹은 설화),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일연 스님이 살았던 13세기는 혼란과 고통의 시대였다. 무신들의 권력다툼(무신정권,1170~1270)으로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30년 동안 계속된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꼴은 엉망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가 혼란스럽거나 전쟁이 나면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백성들이다. 고려의 백성들은 시도 때도 없이 번득이는 안팎(무신정권과 몽골침략)의 매서운 칼날에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으리라. 전쟁으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태반이었으리라. 와중에 가족들이 죽거나 흩어져, 집을 잃고 떠도는 유민들도 많았으리라.

정수 스님이 살았던 애장왕 때 역시 9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저물어 가는 나라의 분위기가 여기저기 감지되고, 정치적으로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백성들의 삶이 퍽이나 고단했을 것이다.

국사 지위까지 올랐던 일연 스님이다. 일연 스님에게, 나라의 운명은 나 몰라라 하며 자신의 입신을 위한 권력 싸움에 정신이 팔려 물고 뜯고 하다가 전쟁이 나자 자기들 살 궁리를 하며 강화도로 도망쳐 버린 고려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불교는 자비의 종교다. 중생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찬란한 불상도, 자비의 말씀도 아닌 아픈 사정을 헤아려 눈을 뜨게 한 '천수대비가' 속 관세음보살과 같은 손길이며, '정수사구빙녀' 속 정수스님과 같은 살신성인이다. 그렇건만 헐벗고 굶주린 수많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설법밖에 없음을, 승려들마저 저 살 궁리가 먼저인 실정을 한탄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밥 한 그릇과 얼어가는 몸을 녹여줄 수 있는 옷 한 벌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삼국유사를 쓴 것은 아닐까. 또 자신의 제자들이, 혹은 수많은 불자들이 정수 스님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덜어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길 바라며. 무릇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천수대비가 속 관세음보살처럼, 정수 스님처럼 보잘것없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말 한마디, 사정하나 낱낱이 헤아려 그들의 희망(눈)과 밥과 옷이 되어 주길 바라며 '삼국유사'를 쓴 것은 아닐까. 난 이렇게 <삼국유사>를, 그 관련 책들을 읽곤 한다.

국민들의 사정과 고통은 나 몰라라 한 비효율적인 정책들을 보면서, 국민들 눈에도 빤히 보이는 정치인들의 싸움을 보면 내 머릿속에는 떠오른다. 신도들의 주머니 사정은 결코 헤아리지 않는 종교 현장들을 만나게 되면, 국민들 혹은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거만하고 오만한 정치인들이나 성직자들을 대하노라면 나는 어김없이 '천수대비가'와 '정수사구빙녀'를 떠올리곤 한다.

진정으로 국민들과 신도들을 우선하는 정치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국민들에게 피와 살처럼 정말 필요한 정책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 책 <하루 한 편 떠먹는 삼국유사>는 좀 아쉽기도 하다. 이제까지 읽어온 여타의 삼국유사 관련 책들처럼 내용을 풀어 쓰는 한편 시대적 배경이나 관련 상식 등을 녹여 쓰지 않고 원본만을 풀어 쓴 책이다. 그것도 <삼국유사>의 일부분만을 정리했다.

다행히 2부(삼국유사 정리 편)과 3부(삼국유사 심화 편)에서 삼국유사의 가치나 일연 스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삼국유사의 중요한 현장 등을 다룬다. 때문에 <삼국유사>를 이 책으로 처음 읽는 사람들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이 책 소개 글을 쓰려는데 엊그제 17일 '송파 세 모녀 법'이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 심사 소위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쉽게도 '세 모녀를 돕지 못하는 세 모녀 법일 뿐'이라는 시민단체들의 비판들과 함께 말이다. '천수대비가'와 '정수사구빙녀'를 통해 일연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누구보다 정책자들에게 제대로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세 모녀를 제대로 도울 수 있기를, 더 이상 세 모녀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하루 한 편 떠먹는 삼국유사>|일연 (지은이) | 윤병욱 (엮은이) | 화담(아이오아이) | 2014-10-27 |15,000원



하루 한 편 떠먹는 삼국유사

일연 지음, 윤병욱 엮음, 화담(아이오아이)(2014)


태그:#일연스님, #삼국유사, #정수사구빙녀, #천수대비가, #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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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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