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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 개회사를 통해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개발 정책이자, 국민적 의식 개혁 운동이었다"고 치켜세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 개회사를 통해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개발 정책이자, 국민적 의식 개혁 운동이었다"고 치켜세웠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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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6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에 참여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각별한 대담을 가졌다. 일명 '새마을운동 세일즈'라 불리는 이 대담에서 반 총장은 "새마을운동이 산불처럼 번져"라고 칭찬해 박 대통령의 환심을 샀다.

주요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반 총장의 응원에 힘입어 유엔 총회 내내 새마을운동 세일즈에 집중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이셨던 선친께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공 요인들이 어떻게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서 국민과 나라를 바꿔놓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여론은 분분했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세일즈가 외교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평이 있는 반면, 역사학자들과 일부 야권은 "지나친 정치적 선전선동"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평가에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뒷받침했던 새마을운동이 아직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새마을운동이 농민들의 경쟁과 단합을 독려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엔 행사를 통해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인을 적극 자랑했다. 인센티브와 경쟁, 신뢰에 기반을 둔 국가지도자 리더십,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국민 참여 등이 그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새마을운동은 박 대통령의 자랑처럼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농촌 소득은 10배 증가했으나 부채 또한 21배나 증가했다. 저곡가정책 등으로 인한 도농불균형 발전은 이촌향도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새마을운동 기간 내내 수많은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마을 모범부락과 같은 성공 사례조차도 대부분 국가의 자원이 정책적으로 집중된 곳에 국한되어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전개한 사업 또한 농민의 이익과 배치하거나 농민의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례로 마을도로 개선사업은 당시 시멘트 수출이 막히자 농촌을 새로운 소비자로 전환시켰다. 즉 공업을 위해 농촌이 희생된 사례의 하나로 전락한 것. 또 초가지붕을 강제로 개량하면서 지붕이 바뀌는 만큼 농가 부채가 증대했다. 이 때문에 마을 이장이나 새마을 지도자의 건의 사항의 핵심은 제발 관의 개인이나 전시 행정을 자제해달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과 리더십
대대적인 새마을 운동의 전개에는 그 경제적 동기보다 박정희 독재 정권이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통제가 용이했던 농촌사회를 조직하고자 했던 정치적 동기가 더 작용했다. 새마을 운동의 기원이라 할 ‘농촌진흥운동’이나 ‘농촌중견인물양성’이 실제로는 농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듯이, 새마을 운동 또한 1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과 동원의 매개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새마을 운동을 ‘유신체제의 실천도장’으로 규정했다.
 대대적인 새마을 운동의 전개에는 그 경제적 동기보다 박정희 독재 정권이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통제가 용이했던 농촌사회를 조직하고자 했던 정치적 동기가 더 작용했다. 새마을 운동의 기원이라 할 ‘농촌진흥운동’이나 ‘농촌중견인물양성’이 실제로는 농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듯이, 새마을 운동 또한 1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과 동원의 매개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새마을 운동을 ‘유신체제의 실천도장’으로 규정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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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유신 이념의 실천도장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유신 이념의 실천도장으로 규정했다. 해마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새마을연수교육도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을 찬양하고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주입하는 각종 정치교육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었다.

유신시대 새마을운동 교육 이수자는 연인원 약 7000만 명에 달했다. 전 국민이 1인당 2회 꼴로 세뇌교육을 받은 셈이다. 한 연구원은 "날이 갈수록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저항이 커져가자 새마을운동은 당초 표방한 '잘 살기운동'의 본질마저 던져버리고 유신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국민정신개조운동'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덧붙여 그는 "농촌새마을운동을 도시새마을운동으로 확대하고, 유신체제 하에서 5년이 넘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가 충효이념을 모토로 '새마음운동'이란 광풍을 일으킨 것도 국민정신개조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자발적·적극적인 국민 참여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현장시찰 장면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현장시찰 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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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새마을운동과 정신개조'(문상석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에 따르면 새마을운동은 1970년 박정희 유신 독재에 의해서 시작되고 형상화되고 강화되었던 전형적인 관제 동원 운동이었다. 이 관제운동은 자발적 참여를 강요하고, 국가가 주도권을 지녔으되 밑으로부터의 참여를 촉구하고 참여를 강제한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또한 '정신혁명 운동', '정신계발 운동' 그리고 '행동철학 운동'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새마을운동의 정신개조를 통한 근대 인간형 창조는 5월 16일 군사쿠테타와 더불어 박정희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또한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박정희 군사정부는 농민을 정치와 분리시켰다. 박정희 개인도 국가와 동일시되었다. 당시 박정희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국가이면서 동시에 백성의 아버지로 인식되었다. 이는 농민들을 탈정치화 시켰으며 유신의 최대 후원자로서 농민을 부상시켰다. 그리고 이후 진행된 국가 운동에 농민을 쉽게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새마을운동 정치적 악용 용납하지 마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98년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축사를 통해 새마을운동이 지닌 정치역사적 과오를 꾸짖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새마을'이 관변단체라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중략)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시는 권력이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일침을 가했다.

야권 일부 인사와 주요 진보 언론도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의 시대착오적인 새마을운동 세일즈를 비판했다. 이들은 "개발독재 시대의 국민동원 운동을 반 총장이 저렇게까지 찬양하는 게 과연 적절한 처신인가", "적지않은 제3세계 국가들이 새마을운동식을 따라하고 있긴 하지만, 이 운동의 단점과 한계까지 모두 미화할 순 없지 않느냐"라고 성토했다.

정의당은 29일 논평을 통해 "국제 사회 기여와 한국의 발전상에 새마을 운동을 중심으로 놓은 것"이라며 "개발 편향의 새마을 운동으로 파괴된 한국 농촌의 서글픈 자화상이 보이지 않는가? '새마을 홍보 대사'로 전락한 대통령과 그 대통령이 7번 만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라고 꼬집었다.


태그:#새마을운동,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정신개조, #박근혜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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