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4일 김작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중인 성우 백운철씨(왼쪽)와 진행자 명로진, 권진영씨
▲ 김작가 스튜디오 모습 4일 김작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중인 성우 백운철씨(왼쪽)와 진행자 명로진, 권진영씨
ⓒ 정세진

관련사진보기


각자 생업에 바쁜 탤런트와 개그우먼, 방송작가 등이 의기투합해 2주에 한번 꼴로 회동을 갖는다.

한때 EBS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고전읽기'가 지난 2014년 갑작스럽게 폐지되면서 남겨진 사람들이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명로진 권진영의 고전읽기(아래 명권고)'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한 것.

공중파 방송국에서 독립한 명권고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운 진행과 구성으로 팟캐스트의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지난해 10월 1주년을 맞은 후 지금까지 매주 청취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높은 개런티를 받는 일도 아니고, 후원을 받아 근근히 운영되고 있는 방송을 꾸준히 계속하게 만든 힘은 제작진과 출연자들의 '열정'이었다. 지난 4일 경기도 의왕시에 자리 잡은 명권고 김희영 작가의 집에서 진행된 새해 첫 녹음 현장을 따라가 보았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역할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대를 태워 콩을 삶노라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이 솥 안에서 눈물을 흘리누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우린 원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더냐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어째서 이리도 급히 나를 볶아 대는 것이냐."

<삼국지>에서 조조의 아들 조식이 읊었다는 '칠보시'를 중국어 톤을 살려 '실감나게' 읽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명권고의 진행자인 배우 겸 작가 명로진씨이다.

이날 '김작가 스튜디오'로 불리는 김희영 작가의 자택에는 두 진행자, 명로진 권진영씨 이외에도 이날 낭독을 맡을 성우 백운철, 진정일씨, AD 최보화씨가 자리를 같이했다.

김 작가 스튜디오 거실에는 큼직한 테이블에 독지가가 후원해 주었다는 마이크와 녹음 장비가 즐비하다. 모두들 대본을 들고 오늘의 녹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김 작가가 케이크와 홍차를 내오는 것이 마치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다.

"이번 삼국지는 몇 회까지 갈까요?"
"12회로 가자. 내용도 많고 재미있으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농담을 주고받던 출연진들은 녹음에 들어가자 '급' 진지한 모습이 되었다. 낭독을 하다 틀린 부분이 나오면 최보화 AD는 이를 꼼꼼히 듣고 있다가 펜으로 표시를 해 둔다. 나중에 편집을 하기 위해서이다.

삼국지의 시작 부분, 27살의 젊은 유비가 황건적을 진압할 군대를 모집하는 벽서를 읽는 대목에 오자 갑자기 명로진씨가 권진영씨의 대사에 끼어든다.

"잠깐, 여기는 남자 목소리로 읽는 게 좋겠어."

이 말에 성우 백운철씨가 바통을 넘겨받아 낭독을 이어갔다. 구성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협력하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쏟는 모습이 구경하고 있는 기자까지 몰두하게 만든다. 진지한 낭독 중에 중간중간 '깨알같은' 웃음을 던져주는 역할은 개그우먼 권진영씨가 주로 맡고 있다.

"여포 쥐포 됐네요."

여포가 초선의 미인계에 빠져 양부 동탁을 죽이는 장면에서 권진영씨는 이런 말로 사람들을 '빵 터지게' 했다.

한편 백운철 성우는 즉석에서 '효과음'을 담당했다. 칼을 가는 소리를 듣고 여백사를 오해한 조조가 그의 식솔들을 죽이는 대목에서 돼지 울음소리를 흉내내는가 하면, 찻잔을 바닥에 문지르며 칼을 가는 효과음을 표현하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여줬다.

재미있는 고전 속 진지한 메시지

쉽고 재미있게 해설하는 고전 이야기이지만 진지함도 놓치지 않는다. 조조가 여백사를 살해하는 등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자 권진영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DNA에도 조조 같은 성품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요즘 세태와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명권고는 뜻하지 않게 이념(?)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지난해 말 팟캐스트 게시판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명권고의 선언에 대해 "정치적 발언이 불편하다"는 한 청취자의 글이 올라온 것. 이에 대해 명로진씨는 "교과서는 정치적 문제로 볼 것이 아니며 나름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해 순화해 표현했다"고 못을 박았다.

명로진씨는 "우리는 정치적 색깔이 있다는 의식을 하지 않으며 인문학과 관련해 이슈를 만들려는 것"이라며 "고전을 단순히 읽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공연이나 유튜브 동영상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슈를 더 키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명권고 팟캐스트 방송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구성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EBS 고전읽기 당시 작가였던 김희영 작가는 다른 방송 일도 하면서 시간을 쪼개 명권고를 집필하고 있다. 최보화 AD 역시 EBS에서 퇴사한 이후 명권고에 동참해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원년멤버'이다.

명권고 녹음에 참여하고 있는 성우들은 백운철, 진정일씨 외에도 한미리, 유보라, 이민규씨 등이 있다. 이들은 차비 정도의 비용만을 받고 출연하지만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방송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웃음 속 열정이 있는 명권고 현장

이날 녹음은 평소보다 시간이 다소 많이 걸렸다. 녹음 프로그램이 10분 간격으로 다운됐기 때문이다. 그러자 컴퓨터를 전공한 진정일 성우가 '맥가이버처럼' 나섰다.

"램 용량이 너무 꽉 차있네요. 나중에 한번 윈도우를 다시 깔아 주셔야 할 거에요."

진 성우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이크가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꾸로 꽂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이를 교정해 주었던 것. 소리가 먹먹하게 들리는 이유를 근 2년 만에야 알아낸 일동은 일제히 "진 성우님을 엔지니어로 영입하자"며 웃는다.

이날 오전 10시 30분께 시작된 녹음은 3회 분량을 무사히 마치고 오후 2시경 마무리됐다. 스케줄이 있었던 권진영씨가 먼저 자리를 뜬다.

다음 모임은 언제냐는 기자의 질문에 명로진씨는 "각자 스케줄이 있다 보니 조율이 힘든 게 사실"이라며 "그래도 작품을 정하고 나면 성우분들이 만사 제쳐 놓고 달려오는 것이 늘 고맙다"고 밝혔다.

고전이며 인문학이 실용성 없는 분야로 취급받고 있는 요즘, 대중에게 고전을 전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누구보다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태그:#권진영, #명로진, #고전읽기, #팟캐스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음식과 관련하여 식생활 문화 전반에 대해 다루는 푸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대학가의 음식문화, 패스트푸드의 범람, 그리운 고향 음식 등 다양한 소재들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