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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몇 주 전이었다. 까꿍이와 함께 뉴스를 보고 있는데 하필 TV에서 '부천 여중생 폭행 및 시신 방치 사건'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학 강의까지 나가는 부천의 어느 목사가 자신의 여중생 딸을 약 5시간 폭행하고, 딸이 숨지자 그 시신을 11개월가량 방치했다가 발각된 바로 그 사건.

아니나 다를까. 그 전의 북한 미사일 발사 소식에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던 까꿍이는 이내 들어가 잔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아빠하고 함께 보는 뉴스인데 온통 무서운 소식뿐이라며 툴툴거리는 녀석.

부천 여중생 사건
▲ 까꿍이가 본 그 뉴스 부천 여중생 사건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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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기 전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아빠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응? 뭐가? 저렇게 때리면 안 된다고?"
"아니. 저렇게 죽이면 안 된다고. 아빠는 이미 우리 때리잖아."
"잉? 내가 언제 너를 때렸냐?"
"나는 안 때리지만 동생들은 가끔 때리잖아. 뭐 잘못했을 때 회초리 들잖아."
"그거야, 너희들이 뭔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거지."
"알았어. 어쨌든 우리 죽이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아빠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때려 죽이냐? 그럴 일 없어."

비록 말은 그리 했지만 기가 막혔다. 어떻게 아빠의 회초리를 뉴스에서 보도하는 저따위 폭력과 비교할 수 있는지. 나의 회초리는 다 자신들 더 잘 되라고 휘두르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아빠의 심정도 모르는 채 마냥 똑같은 폭력이라고, 심지어 자신들을 죽이면 안 된다고 하다니.

생각의 의자와 벽보기
▲ 혼나고 있는 산들이와 복댕이 생각의 의자와 벽보기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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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눈 옆에 상처 났으니 손들어
▲ 형제의 난 형아 눈 옆에 상처 났으니 손들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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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말을 곰곰이 되씹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도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똑같은 폭력일 터, 아이에게는 뉴스에서 나오는 폭력과 나의 회초리가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나야 부모로서 훈계하는 입장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지만, 과연 저 어린 녀석들이 그런 부모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역시나 아이들을 훈계할 때는 절대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증가하는 아동 학대

그리고 며칠 전, 이번에는 뉴스에서 '평택 실종 아동'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뉴스 첫 머리였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경기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아이들에게 들어가 자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아이들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사실 자체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얼핏 뉴스를 본 까꿍이가 또 질문을 한다.

"또 엄마, 아빠가 자식을 죽인 거야?"
"응? 으응. 그렇다네."
"왜? 아이가 굉장히 큰 잘못을 했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엄마, 아빠가 평소에 문제가 있었나봐. 그러니까 아이를 저리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지. 우린 걱정 마. 그런 일 없어."

녀석은 알겠다며 잠자리에 들어갔지만, 정작 나는 여러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 아동과 관련된 잔혹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과연 이 사건들이 실제로 증가하고는 있는 걸까? 아니면 언론에 드러나는 빈도가 증가하면서 우리가 증가한다고 느끼는 것일까?

혹자들은 정부여당이 선거철을 맞이하여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해 강력범죄에 대한 언론노출을 많이 높였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아동학대 신고 등 여러 통계 자료를 봐도 아동학대와 그와 관련된 사건들은 실제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숫자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지만
▲ 너무 어려워 숫자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지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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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하건대 그것은 결국 사회가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사회든 경제가 어려워지면 범죄율이 증가한다. 생계와 관련된 범죄가 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한 사회적 압박이 커지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사람들의 일탈행위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범죄의 대상인데 대부분 사회에서 가장 약한 이들, 즉 여성이나 아동 등이 주요 피해자가 된다. 최근 극성을 부리는 일베의 주요 표적이 힘없는 여성이듯, 아동들 역시 쉽게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생활고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인 뒤 자살하는 부모들이나,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이 뭐하는지도 모른 채 방치하는 부모들이나, 밖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화풀이하듯 때리며 푸는 부모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가 비정상적이라는 이야기이며, 그 모든 모순의 결과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반영되어 비극의 씨앗을 잉태한다. 학대당한 아이들은 자라서 자신의 자식을 학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순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각각의 부모들을 교육시키면 될까? 경제가 좋아지면 상황이 나아질까? 아니면 아동학대 방지와 관련된 조직들의 예산을 늘리면 해결할 수 있을까?

아동학대 방지의 어려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다
▲ 우리집 삼남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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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
▲ 복면가왕 중인 아이들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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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근본적으로 아동학대를 막기 위해서는 부모들을 교육시켜야 하는 것이 맞다. 아무리 자신의 자식이라도 아이는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며, 그 아이도 고유의 인권이 있음을 각인시켜야 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아동학대는 한 가정 안에서 부모가 자식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육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모든 것이 먹고사니즘으로 귀결되고, 오로지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경쟁을 감수해야 하는 이 시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한 이들에게 누가 나서서 그 자식을 키우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겠는가.

이는 경제가 좋아져도 마찬가지다. 만약 가계의 벌이가 늘어나면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먹고사니즘의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아이들에게 관대해지겠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각 가정의 살림살이는 나아지기 어렵다. 구조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이상 경제성장의 과실은 일부 계층에만 적용될 뿐, 대부분의 가정은 현상유지를 하거나 오히려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 또한 비관적이긴 매한가지다. 정치권은 아동학대방지센터를 만들고, 법적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이 역시 해결방법이 되기는 어렵다. 어쨌든 아이들에 대한 육아를 각 개인들이 전담하고 있는 이상 아동학대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동학대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보호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인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제3자가 아동학대를 인지하기 힘들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식구다
▲ 마을이 키우는 아이들 우리는 모두 식구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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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을 몸소 배우는 아이들
▲ 함크의 아이들 더불어숲을 몸소 배우는 아이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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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인지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해결하기도 쉽지 않은 아동학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내가 떠올린 것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이었다. 이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공동체의 힘이다. 결국 지금과 같은 아동학대가 벌어지는 것은 공동체가 붕괴되고 하나의 가족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 사회에 예전과 같은 공동체가 남아 있었다면 아동학대가 지금처럼 일어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이웃끼리 서로 돕고, 아이들 역시 마을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하는데 과연 어떤 부모가 스스로 고립을 자청하고 아이들을 학대할 수 있을까?

따라서 현재 아동학대 방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동체, 즉 마을을 복원시키는 일이다. 각자가 혼자 살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끊임없이 유무형의 영향을 끼치며 삶을 영위해야 한다.

비록 오늘은 엄마에게 혼났지만, 옆집 이모한테 가서 위로받을 수 있을 때, 아동학대는 사라질 수 있다. 그것은 경제가 나쁘고 먹고살기가 빠듯해도 가능한 일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대문을 열고 옆집의 문을 두드리길 바란다.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결국 자라나는 아이들이 티 없이 밝아야지 않겠는가. 아동학대를 막는 것은 자식을 키우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이의 책무이다.


태그:#아동학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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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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