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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육신사"라고 부르는 묘골 전경
 보통 "육신사"라고 부르는 묘골 전경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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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빈서원(洛濱書院) 이름만 봐도 이곳이 물가에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물(氵)이 붙어 있는 낙(洛)은 낙동강을 뜻하고, 빈(濱)은 '물 가(濱)'를 가리킨다. 게다가 빈(濱)은 현재 낙빈서원이 있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河濱面)의 이름자 중 한 글자다.

낙빈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21에 있다. 그런데 낙빈서원의 사당인 숭정사(崇正祠)는 육신사길 64에 있다. 강당과 사당의 주소가 상당히 다르다. 가보지 않고서는 두 건물이 붙어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지만, 주소만으로는 낙빈서원의 강당과 사당이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작은 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는 강당과 사당

실제로 낙빈서원에 가보면 강당만 있고 사당이 없다. 사당만 없는 것이 아니라 동재도 서재도, 전사청도 홍살문도 없다. 사당이 없으니 당연히 내삼문도 없다. 강당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서원 강당은 마치 작은 서당처럼 홀로 대나무숲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다.

사당에 가보면, 이번에는 강당이 없다. 홍살문도 있고, 외삼문과 내삼문도 있고, 재실과 전사청도 있지만, 강당은 없다. 강당과 사당이 앞뒤 또는 좌우로 함께 있어야 서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낙빈서원의 강당과 사당은 얕은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1km나 떨어져 있어 서로 보이지도 않으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낙빈서원은 여느 서원과는 구조가 확연히 다르다. 그렇게 된 사연은 구구절절해 낱낱이 설명하기가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눈과 마음으로 낙빈서원 답사를 대신할 독자들을 위해, 또는 현장에 들르고도 그 점에 대해 무심히 지나칠 방문객들을 위해 부족하지만 해설을 곁들일까 한다.

낙빈서원 강당
 낙빈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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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빈서원은 본래 사육신 중 한사람인 박팽년과, 아들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을 모시는 사당 절의묘(節義廟)로 출발하였다. 사당을 지은 이는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었다. 다른 사육신의 남자 직계 자손들은 모두 처형됐지만, 그는 사육신 사건 당시(1456년)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어 죽임을 면했고, 태어났을 때는 어머니의 여종이 낳은 딸과 바뀌치기를 해 또 다시 살아났다.

여종은 '아들' 박비를 데리고 하빈면 묘골마을, 현재 육신사가 있는 산골로 들어와 숨어 살았다. 박비는 이름에도 '노비 비(婢)'를 넣어 진짜 종의 아들인 양 행세했다. 그러던 중 성종 대에 이르러 사육신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박비는 자수했고, 성종은 '충신의 자손'이라고 칭찬하면서 그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박비는 이름도 박일산으로 고쳤고, 그와 그의 후손들은 묘골마을에 99칸 거대한 기와집을 짓고 생활할 만큼 크게 번창했다.

사육신의 남자 자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손자

그런데 5대손 박계창이 제사를 앞둔 어느 날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이 자신의 조상 박팽년과 더불어 거니는 꿈을 꾸었다. 다섯 충신은 계창에게 '우리는 자식들이 다 죽임을 당해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는 듯했다. 계창은 깨달은 바 있어 다섯 분의 위패를 제작하여 사당에 극진히 모셨다. 이렇게 하여 육신사(六臣祠)라는 이름이 태어나는 단초가 만들어졌다.

사당 숭정사
 사당 숭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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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창이 세운 사당이 지금의 육신사인 것은 아니다. 박계창은 다섯 사육신을 추가로 모시면서 절의묘를 크게 지어 하빈사(河濱祠)라 이름하였다. 그 후 하빈사는 1691년(숙종 17) 정구, 장현광 등 선비들의 주도에 힘입어 서원으로 승격되고, 1694년(숙종 20)에 이르러 '낙빈서원'이라는 이름을 사액받았다. 그래서 사당도 낙빈사(洛濱祠)가 되었다.

이때 건축된 서원 강당과 사당은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맞아 함께 철거되었다. 그 이후 1924년 사당 없이 강당만 중건되었지만 재실 규모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74년 현재의 육신사 위치에 정부 지원을 받아 거대한 사당 숭정사가 지어졌다. 하지만 서원 본건물인 강당이 마땅하지 않았으므로 지방 유림들이 논의를 거쳐 1982년 지금의 자리에 재건하였다.

이제 낙빈서원의 강당 건물과 사당이 약 1km 거리에 따로 떨어져서 있는 까닭이 헤아려진다. 서원은 제사도 지내지만 젊은 후손들을 모아 공부를 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박일산의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은 낙빈서원을 처음 지을 때 묘골마을에서 1km가량 조금 떨어진, 얕은 산능선을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조용한 골짜기에 터를 잡았다.

강당과 사당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까닭

그런데 낙빈서원 강당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된 본래의 강당과 사당 터에 복원되었지만, 사당 숭정사는 박일산이 지은 태고정(보물 554호), 박팽년의 7대손 박숭고가 1644년(인조 22)에 지은 충효당, 그리고 1778년 건물인 도곡재(대구시 유형문화재 32호) 등이 있는 묘골마을에 지어졌다. 제각각 다른 곳에 재건되는 바람에 서원 강당과 사당이 앞뒤도 좌우도 아닌, 1km 거리를 둔 채 따로 따로 서 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답사자들은 낙빈서원은 잘 알지 못할뿐더러, 심지어는 묘골마을만 둘러보고 돌아가기도 한다. 육신사와 묘골마을을 동일시한 탓이다. 골짜기 밖에서 보아서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없는 묘한 곳이라 하여 묘골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래서 박비가 숨어살았던 이 마을만을 가리켜 "육신사"라고 임의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사 외삼문
 육신사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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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는 글자만 따지면 여섯 신하를 제사지내는 사당을 가리킨다. 묘골마을에는 사당이 한 곳밖에 없다. 낙빈서원의 사당인 숭정사가 바로 그곳이다. 따라서 육신사가 곧 낙빈서원의 사당이고, 숭정사이다.

하지만 묘골마을의 사당 숭정사는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도 함께 모시기 때문에 굳이 따지면 칠신사라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묘골마을 앞에 '육신사'라는 간판을 내건 것은 사육신의 드높은 지명도를 활용한 홍보 전략인 셈이다. 어쨌든 마을 전체를 육신사로 불러 달라는 홍보 전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름은 육신사이지만 실제로는 일곱 분 모셔

서원의 핵심 건물은 강당과 사당이다. 즉, 묘골마을에 있는 사당(숭정사)과 재실(태고정, 도곡재), 묘골마을 밖에 있는 강당을 모두 보아야 진정으로 낙빈서원 전체를 답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낙빈서원을 둘러보았다고 말하려면 하빈면 묘동4길 21에 있는 강당만이 아니라 하빈면 육신사길 64에 있는 숭정사, 태고정, 도곡재 등을 남김없이 답사해야 한다. 그래야 박팽년, 박일산 그리고 서원을 짓고 사당을 세운 후대인들의 마음 세계를 모두 생각해보게 된다.

사육신 기념관
 사육신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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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묘골마을 입구에는 2010년에 건립된 사육신기념관도 있다. 기념관은 사당 혹은 서원 강당과 전혀 별개의 건물이므로 "육신사" 호칭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하지만 육신사, 즉 묘골마을에 가서 사육신기념관을 보지 않고 돌아섰다면 그 역시 육신사를 모두 답사했다고 말할 수 없겠다.

묘골마을에는 참으로 볼 것이 많다.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답사해야 할 곳들을 죽 나열해 본다. 사육신기념관, 충효당, 도곡재, 외삼문, 홍살문, 태고정, 사육신 조형 육각형 탑, 숭정사, 그리고 낙빈서원 강당!

육신사에서 낙빈서원 가는 중에 있는 삼가헌도 꼭 봐야

그런데 이 정리도 옳지 않다. 묘골마을에서 나와 낙빈서원으로 가는 중간에 중요민속자료 104호인 삼가헌(三可軒)이 있기 때문이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가 1769년(영조 45)에 지은 살림집으로, 낙빈서원의 부속 건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를, 그것도 낙빈서원 강당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고 있는 집을 외면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삼가헌
 삼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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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앞 안내판은 '삼가란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다',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다',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세 가지 요구가 드높고도 강철같다. 특히 마지막 구절,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더욱 그렇다. 구태여 그 의미를 따져보지 않아도 저절로 사육신이 연상되는 표현이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밤에도 빛나는 밝은 달과 님은 단종이다. 박팽년은 단종을 향한 자신의 충성심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세조의 회유를 거부한 그는 모진 고문 끝에 마침내 옥중에서 절명했다. 박팽년이 남긴 시조는 한 수 더 남아 있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랴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쫓을 손가"

중국 여수는 금이 나는 강이다. 하지만 여수에서 사금이 생산된다고 하여 모든 강에서 금이 나지는 않는다. 중국 곤강산은 옥이 나지만 다른 산에서는 나지 않는다. 아무리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지만 옳지 않은 남자를 따를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임금은 단종 한 분뿐, 수양대군을 왕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사당 앞에 사육신을 상징하는 육각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사당 앞에 사육신을 상징하는 육각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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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 모퉁이를 돌아서면 좁은 길이 나타난다. 좌우로는 산비탈이 이어지고, 그 사이에는 손바닥만한 밭이 놓여 있고, 밭 가운데로 오솔길 같은 들길이 뽀얀 실선을 긋고 있다. 길 끝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낙빈서원이 보인다.

왼쪽 산비탈은 온통 대나무숲이다. 시퍼런 대숲은 서원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길을 사육신을 기려 세워진 서원으로 가는 길답게 만들어준다. 바람이 일어 대숲에서 설렁이는 소리가 우수수 발끝에 떨어진다.


태그:#사육신, #육신사, #박팽년, #낙빈서원, #사육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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