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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빈 장군이 오호도독(五護都督) 첨사(僉事) 시절 왜구의 준동을 막기 위해 토포사 직책으로 영파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상대부는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었다. 모빈이 현지에서 올린 장계가 조정에 파란을 일으킬 때조차도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인다운 기개와 나이에서 오는 열정이 어울려 일시적인 객기를 드러낸 것일 뿐 곧 가라앉으리라고 봤다.

그래봤자 찻잔 속의 태풍이고 우리 안의 맹수일 뿐이다. 자신을 비롯해 내관이 황상의 눈과 귀를 담당하고 있는데 그가 감히 어쩔 수 있으랴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 황상이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경로를 통해 대신들의 의견을 듣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선비 나부랭이들의 상소(上疏)마저 읽기 시작했다. 마침내 대간들의 탄핵으로 상대부는 태감직에서 물러나고야 말았다. 그후 상대부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탄핵의 간을 올렸던 고관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자네가 그자와 대결한다면 어떨 것 같나."

상대부가 예진충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쉽게 승부를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채 대협은?"

이 말은 너무 노골적이다. 예진충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장포에 감춰진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이건 너무 잔인한 질문이지 않은가. 자신과 승부를 쉽게 예측하지 못하겠다고 한 상대를 채욱과 직접 비교하라니. 그것도 면전에서.

"방심하지 않으신다면 채 대협께서 제압하실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십 합은 넘지 싶습니다."

예진충은 채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추켜세웠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내비쳤다. 고수의 세계에서 오십 합이라면 종이 한 장은커녕 먼지 하나 차이도 나지 않는 비등한 실력이다. 오십 합으로 갈리는 승부는 무공의 우열이라기보다는 지형 조건이나 심리적 요인 등 무공 외적인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채욱은 그 말에 아무런 내색 없이 무덤덤하게 서 있다. 그 역시 자극에 쉽게 반응하는 위인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인원을 보강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이해하겠네."
"저와 그자가 맞수라 할지라도 채 대협까지 계신다면 승산은 충분하리라고 봅니다."

예진충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그 문제는 이쯤에서 끝내지. 내가 바쁜 예 총관을 여기까지 오라고 한 이유는 따로 있다네."

상대부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금의위와 공동 작전을 수행한다지?"
"네, 수배와 추적을 하려니 저희 인원들로만은 한계가 있어 금의위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예진충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은화사가 금의위에 인력지원을 요청하는 건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단지 그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취급될 뿐이다. 상대부는 이번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될 수 있는 한 기밀을 유지하되 필요하다면 어떤 관부를 이용해도 좋다고 했다.

소수 정예인 은화사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그가 모를 리 없다. 다른 관부에 지원요청을 할 바에야 같은 감찰기관이자 무력을 갖춘 금의위가 가장 적격이라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금의위와의 협조 문제를 꺼내는 것일까. 예진충은 아연 긴장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금의위와의 관계를 문책하려는 게 아니라 당부를 하려는 것이라네."
"네, 경청하겠습니다."

문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예진충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리석을 정도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금의위를 이용은 하되 절대 기회를 주진 말게. 금의위와 우리의 관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아닌가. 진경을 우리 손에 못 넣는 한이 있더라도 금의위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되네. 만약 중요한 순간에 진경이 저쪽에 넘어갈 것 같으면 차라리 파손시켜 버리게나."
"네, 저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명심해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휴, 이것이었구나. 상대부가 자신을 부른 건 금의위를 견제하고 조심하라는 것을 명토박기 위함이었구나. 그런 이유라면 상대부의 당부가 있기 전에 자신 역시 충분히 조심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런데 단지 당부를 하기 위해 날 불렀단 말인가. 그러기에는 상대부의 일처리가 왠지 미덥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중요한 순간을 맞이한 그에게 이런 명령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이면의 의중이 있는 것일까. 예진충은 상대부의 마음의 수를 읽기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복잡한 심중에 휘장을 드리우고 단순한 곳에 집중하기로 했다. 빨리 운부산으로 가서 담곤과 서생을 잡아야 한다.

상대부의 이어지는 말이 없는 것으로 봐서 용건이 끝난 것 같았다.

"시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예진충이 부복하며 인사를 올렸다.

"허어, 예 총관,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그냥 가려고. 오늘은 나와 함께 주연이라도 즐기면서 동안의 노고라도 풀고 가야 하지 않겠나."
"시생, 벌여놓은 일이 있사온지라…, 명일 안으로 담곤과 서생을 추궁해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그 문제는 여기 채 대협에게 맡기게."

아하, 문제는 거기에 있었구나. 이제 진경을 쫓는 임무는 채욱에게 넘기고 나에게는 금의위를 견제하라는 역할만 하라는 의도였구나, 예진충은 그제사 상대부의 의중을 파악한 자신의 노둔함에 속으로 혀를 찼다. 상대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욱이 읍을 하며 말했다.

"대감, 저는 그럼 운부산으로 가겠습니다."
"그러게. 무정도 동백웅도 같이 동행하도록 하게나."
"넵,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채욱이 방을 나가자 상대부가 예진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쯤은 묻어두고 가야되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지시 같았다. 예진충 역시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상대부의 말없는 지시를 조건 없이 받들겠다는 몸짓을 했다.

"자네에게는 내 따로 맡길 일이 있어 그런 것이니 서운케 생각하지 말게나."

놀랄 일이었다. 상대부가 이런 식으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표현하는 건 이례적이다.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일 때 상대부는 예측불허이다. 예진충은 바짝 긴장했다. 상대부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쓸더니만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무림맹의 움직임이 수상쩍다는 사실을 예 총관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모충연이 운명할 때 비영문에 무림맹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그자들이 왜 우리보다 빨리 움직인 것이지?"

상대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림맹은 강호인들의 집단입니다. 우리가 회유한 연장문인도 알고 보면 강호의 무림인에 불과합니다. 그가 속한 비영문도 스스로 인정하든, 하지 않든 무림맹의 세력권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무림맹 역시 비영문을 주시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무림맹이 우리 은화사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
"우리가 관부에 속한 조직이라는 걸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드러내놓고 저희 일을 방해하거나 숨어서 몽니를 부리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협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면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이번 임무의 속성 상 시생은 무림맹에 어떤 정보도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고자 합니다."

"음, 그런데 무림맹에서 수경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네."
"수경대…라면, 특정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조직하는 별동대를 말함 아닙니까?"
"그렇다네. 그런데 이번에 조직하는 수경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되었다네."
"하오면, 대감마님께서 염두에 두시는 건 무림맹의 수경대가 저희가 이번에 도모하고 있는 무극진경의 입수에 그들도 끼어드는 걸 염려하시는 건 아니신지요?"
"음, 그렇다네.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 상승 무공을 얻을 수 있다면 저 죽는 것도 모르고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자들이 무림인들이니까 말일세."
"…."

예진충은 달리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강호행이 끝날 때까지 예 총관이 내 곁에 머물면서 나를 경호해 주게."
"대감 마님의 경호야 그동안 채 대협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채욱을 담곤에게 보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네."
상대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나직이 말했다.
"잠깐, 귀 좀 빌리게나. 예 총관."

예진충이 태사의 앞으로 가서 한 쪽 무릎을 꿇자 상대부는 조금 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예진충이 일어서자 상대부는 한쪽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런 그를 보고 예진충이 오른쪽 귀를 상대부의 입 가까이 댔다. 상대부가 소곤거렸다. 그의 말이 귀에 파고들자 예진충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과연, 대감님의 심계는 소인 따위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공명이 땅을 치고, 자방이 울고 갈 것입니다."

예진충이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상대부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으며 소릴 쳤다.

"하하하,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여기 주안상을 올리도록 하거라. 내 오늘 맘껏 취하며 예 총관의 노고를 치하해야겠다."

상대부의 낭랑한 소리가 문풍지를 울리자 장지문 밖에서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하고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관시위가 방 주위에서 경호를 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예진충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왜 귓속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풀렸다. 동시에 상대부의 용의주도함에 또 한 번 치를 떨었다.

기루의 정원엔 연분홍 모란이 풍성한 자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까르르, 대낮이건만 기녀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돈하루의 후원에 퍼져나갔다. 

덧붙이는 글 | 연재 소설은 월, 수, 금요일에 게재됩니다.



태그:#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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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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