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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조복은 관조운에게 불을 피우라고 했다. 반야봉의 뒤편이라 불빛이 산장까지 미칠 염려는 없었다. 관조운은 근처 덤불에서 잔가지와 땔감을 모았다. 마른가지를 들고 오던 관조운에게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쌓던 관조운이 힐끗 혁련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관조운을 마주 보았다. 관조운이 눈에 힘을 주었다. 혁련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관조운은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키자 마른가지에 불이 붙었다. 이윽고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관조운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이것이오?'

관조운이 조복을 향해 보이며 말했다. 관조운의 손 안에 있는 건 책자였다. 제목이 손에 가려져 다 보이진 않았지만 위에서부터 두 글자는 드러났다. '無極'(무극).

조복의 얼굴색이 달라지며 벌떡 일어섰다.

"그, 그건…?"

관조운은 대답하지 않고 불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책자 가까이 댔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음…."

조복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은화사든 금의위든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진 알았지만 이번 일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무극진경'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저 서생놈의 손 안에 있다니. 역시 진경은 태허진인의 사대제자인 준목규운의 별장에 숨겨져 있었구나. 거기 숨겨져 있다는 걸 은화사에서 눈치 채니까 다른 곳으로 숨기려다 나에게 잡힌 것이구나.

조복은 이 모든 게 자신에게 갑자기 주어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풍요의 여인, 요족의 어머니가 나를 돌본 거야. 좋아, 구차하게 부상당한 늙은이나, 서생을 끌고 다닐 거 없이 저거 하나로 무영객과 결판내면 되겠군. 5만 냥이 아니라 10만, 아니 그 배라도 부를까. 조복은 마른 침을 삼켰다.

"우릴 놓아주면 이걸 당신에게 주겠소. 사숙님은 지금 치료가 필요하오."

관조운이 책자를 불 곁에 대고 다시 한번 흔들었다.

"…."

조복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자가 얕은 꾀를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진경인가 확인부터 해야 한다. 만약 진경이 틀림없다면 이들을 놓아주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자신이 먼저 사라지면 된다.

"책을 넘겨! 그러면 내가 조용히 사라져주지."
"아니오, 당신을 어떻게 믿겠소. 우리의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넘기지 않겠소."
"일단 나에게 넘기기부터 해!"

조복이 인상을 쓰며 한 발자국 나아갔다. 관조운이 책자를 양손으로 잡더니 가운데를 부욱 찢어 두 조각내었다. 그리고 한 조각을 불꽃 가까이 댔다.

"어, 어. 알았어."

조복이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관조운은 여차하면 책자를 모닥불에 던질 기세다. 

"흐흐…, 그럼 어떻게 하길 원하나?"

조복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첫째, 사매가 사숙어른을 모시고 안전한 곳까지 빠져나갈 때까지 당신은 나와 이곳에서 지내야 하오. 둘째, 그전에 혹시 은화사나 금의위에게 잡힐 경우 당신이 나를 어떻게든 빠져나가게 해주어야 하오."
"사형, 그건 안 돼요. 사숙어른을 모시는 건 사형이 하세요. 여기 남아있는 건 제가 할 테니까요."

혁련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냐, 사매. 내가 남아 있는 게 나아."

관조운이 말했다.

서로 자신이 사지(死地)에 남겠다고 하는 남녀를 보고 조복은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군. 사제 간의 의리가 저 정도니. 그러나 그까잇 의리라는 게 무슨 썩어빠진 물건이냐. 제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으랴.

"좋아, 그 정도는 들어주지."

조복이 흔쾌히 답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있소."
"또 뭐야?"

조복이 짜증스럽게 반문했다.

"당신에게 진경을 넘기고 나면 나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이오?"
"난 네놈 목숨 따위에 관심 없어. 그러니 조용히 사라져주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오."
"은화사나 금의위의 포위망을 뚫고 안전한 곳까지 나를 데려다 주어야 하오."
"그건 나도 장담 못해!"

조복은 대답을 하고 나서 이내 후회했다. 일단 응해주는 주는 척을 해야 했다. 여차하면 진경을 불속에 던질 것 같은 저 자를 안심시킨 후 기회를 봐서 기습으로 손에 넣으면 그만인 걸. 그 뒤야 알게 뭐람. 

"그럼 할 수 없구료."

관조운이 반으로 나뉜 책의 몇 장을 찢어 불 속에 던졌다.

"아, 안 돼!"

조복이 소릴 질렀다. 동시에 뒤에 있던 혁련지가 공중을 붕 날랐다. 그녀의 손에는 심운검이 쥐어져 있다. 혁련지는 조복이 관조운과 실랑이하는 틈을 타 포승줄을 푼 것이다. 그녀는 사문의 필살비기인 청운십삼식 중 제 십이식 창파궤형(摐波垝形)을 펼치며 조복을 노렸다.

그러나 조복은 노련했다. 그는 어느새 칼을 뽑아 반바퀴 돌더니 뒤에서 짓쳐오는 혁련지의 검을 맞받아 튕겼다. '챙!' 하는 금속성이 공기를 찢으며 혁련지의 검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조복의 신형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책자의 나머지 부분이 불속에 던져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 이런! 그는 탄성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상체를 숙이고는 왼손을 뻗어 불속에서 책자를 꺼냈다. 책은 불이 붙었지만 완전히 타버린 건 아니었다. 불씨를 털어내는 조복의 눈앞에 빨갛게 불이 붙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눈을 향해 찔러들어 왔다. 조복이 '흥' 하고 냉소를 지으며 검으로 나뭇가지를 쳐내는 순간 뒷목에 묵직한 충격이 왔다. 아뿔싸, 계집년에게 뒤를 보였어. 검이 날아가는 걸 보고 방심했군.

조복이 터져나오는 후회를 미처 끝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폭발하는 듯한 충격이 낭심에 전해졌다. '으윽' 그는 숨을 삼키다 못해 넘어가는 소릴 질렀다. 앞으로 쓰러지는 조복의 사타구니에 관조운이 일격을 가한 것이다.

혁련지는 초식을 펼치면서 일부러 아귀힘을 풀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 그녀의 검이 날아가게 한 것이다. 조복이 그녀의 검을 튕겨낸 관성으로 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갈 때 혁련지는 왼손에 쥔 검집으로 조복의 뒤통수를 노렸다. 마침 조복은 불속에 있는 책자를 꺼내느라 상체를 숙였다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혁련지가 조복의 풍지(風池)혈을 정확히 찔렀다. 두터운 가죽으로 덧댄 검집의 끝은 예각이어서 유사시에는 무기 대신 사용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혹 살상을 피하고 적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조복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고꾸라지자 관조운은 조복의 등에 올라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분노가 솟구쳤다. 화염처럼 타오르는 분노 속에서 그는 자신을 태워버리고 싶었다. 관조운의 눈에 조복의 검이 보였다. 조복의 손에서 검을 빼고는 검끝을 아래로 향한 채 높이 들자 싸늘한 목소리가 관조운의 정신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형, 그만해욧!"

혁련지가 냉정한 눈길로 관조운을 쳐다보았다.

"그자는 금의위 위관이에요. 목숨을 앗았다가는 우리가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게 될 수도 있어요."

관조운이 검을 옆에 던지고는 혁련지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는 의문이 눈에 어렸다.

"이 자를 묶어놓고 우리가 여길 빨리 뜨는 게 상수예요."

혁련지가 말했다.

듣고 보니 그녀의 말이 타당했다. 금의위를 대원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자운헌에는 조복에게 살해된 금의위 대원도 있다. 자칫하면 그 자의 살해 혐의까지도 뒤집어 쓸 수도 있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그녀의 말대로 결박을 해놓고 도망을 가는 게 상책이다. 

관조운은 혁련지를 포박했던 끈으로 조복을 묶었다. 먼저 손을 뒤로 돌려 감은 후 조복의 몸을 끌고 나무로 가서 묶으려니 줄이 모자랐다. 덩치가 큰 탓이었다. 관조운은 조복의 품을 뒤져 포승줄을 꺼냈다. 금의위 사방들은 포승줄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았다. 조복의 몸을 나무에 칭칭 감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혁련지가 담곤에게 가서 그의 몸을 일으키려 했다.

"관두게, 자네들이나 먼저 빠져나가게. 노부는 이 몸을 가지고 먼 길을 갈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 때문에 자네들까지 잡힐 위험이 있다네."

담곤은 통증이 밀려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사숙어른. 저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관조운이 말했다.

"아냐, 이러다간 우리 모두 잡히고 마네. 그렇게 되면 대사형의 유언을 저버리게 됨은 물론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지. 그러니 자네들 먼저 가게나."

담곤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는 차라리 여기서 금의위에게 발각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 그들이 당장은 나를 어떻게 하진 못할 것이고 나아가 나의 부상도 치료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저희들끼리만 가겠습니까?"

혁련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아냐. 설령 은화사가 나를 체포한들 그들에게는 나의 정보가 소중하기 때문에 함부로 여기진 못할 것이네. … 이왕 내가 이 지경이 됐으니 자네들이 내 몫까지 사형의 유지를 받들어 주게."

담곤은 인상을 구기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관조운과 혁련지가 동시에 눈길이 마주쳤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의 의견을 구하는 눈짓이었다.

"어서 가게. 이대로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되니, 자네들만이라도 빨리 진경을 찾는 것이 이 사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야. 우물쭈물하다가 은화사가 이 비밀을 알아차린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니까 말이야."

담곤의 말이 빨라졌다. 심리적으로 다급해졌다는 증거다.

혁련지는 사숙의 의견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부상을 입은 그를 데리고 깊은 산을 탈출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약 은화사의 추적을 뿌리치지 못하고 잡히면 그동안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는, 그야말로 죽 써서 개 준 꼴이 된다. 이럴 바에야 사숙의 말처럼 자신들이 먼저 진경을 찾고는 뒷일을 그와 의논하는 게 순리일 것 같았다.

"그럼, 저희들이 불충(不忠)인 줄은 아오나, 사숙어른의 고견에 따르겠습니다."

혁련지가 말했다. 관조운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형, 지금으로써는 사숙어르신의 말씀을 따르는 게 큰일을 어그러뜨리지 않는 일이에요."

혁련지가 차분하게 말하자, 관조운은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형편과 크고 멀리 보는 관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장부는 인정에 끌리지 않고 대의를 생각해야 한다. 사매처럼 판단이 빨랐으면 좋을 걸. 관조운은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숙어른. 저희가 외람되게 떠나더라도 부디 존녕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나. 노부가 열흘 안에 묘적암에 안 나타나거든 자네들이 따로 행동하고, 만약 진경을 찾거나 혹은 중요한 단서를 입수하면 낙양의 비룡문으로 날 찾아오게."

담곤은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크게 숨을 쉬었다. 새액 새액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사질들을 떠나게 하느라 무리하게 말을 한 것 같았다.

관조운은 퉁소와 문병이 들어 있는 바랑을 멨다. 그와 혁련지는 담곤을 향해 절을 하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내며 북쪽 대항산으로 달려갔다.

날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다. 흐엉, 흐엉, 부엉이 소리가 반야봉을 주위로 길게 여운을 남기며 공중에 떠돌았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요일 주 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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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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