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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상징이자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탓 루앙' 사원. 종교건축물로 위대한 탑이라는 뜻이다.  건설 당시에 450킬로그램의 금을 사용해 화려했었다. 지난 10월 31일에도 10킬로그램의 금박작업을 했다고 한다.
 라오스의 상징이자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탓 루앙' 사원. 종교건축물로 위대한 탑이라는 뜻이다. 건설 당시에 450킬로그램의 금을 사용해 화려했었다. 지난 10월 31일에도 10킬로그램의 금박작업을 했다고 한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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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지구촌사랑나눔회원들이 라오스 고산족인 폰싸앋마을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마치고 밤비행기를 타기 전 일정은 라오스 수도인 비엔티안 관광이다. 배낭여행을 즐기고 현지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메콩강변 산책에 나섰다.

라오스 최대도시 비엔티안. 정확한 지명은 '위앙짠'이며 '백단향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563년 쎗타티랏 왕이 루앙프라방에서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라오스 수도가 됐다. 1828년 싸얌(현재의 태국)의 침략을 받아 약탈당했던 탓에 화려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 동안 도시가 정비됐지만 우리나라의 도청소재지 정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78만 인구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조용한 수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출퇴근시간에 도로에 즐비한 차를 보면 그 얘기가 맞는 건 아닌 것 같다.

한 손에 칼을, 다른 한 손으론 태국을 가리키는 아누웡 동상

비엔티안 인근을 흐르는 메콩강변에는 '짜오 아누웡 공원'이 있다. 2010년에 세워진 높이 6m의 동상은 라오스 독립전쟁 영웅인 '짜오 아누웡' 왕으로 한 손엔 칼을, 다른 손에는 칼을 차고 건너편에 보이는 태국땅을 바라보고 있다.
 비엔티안 인근을 흐르는 메콩강변에는 '짜오 아누웡 공원'이 있다. 2010년에 세워진 높이 6m의 동상은 라오스 독립전쟁 영웅인 '짜오 아누웡' 왕으로 한 손엔 칼을, 다른 손에는 칼을 차고 건너편에 보이는 태국땅을 바라보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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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 네 귀퉁이 끝에 그물을 달아 주기적으로 오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고기가 잡혀 있으면 뜰채로 건져 담았다
 메콩강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 네 귀퉁이 끝에 그물을 달아 주기적으로 오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고기가 잡혀 있으면 뜰채로 건져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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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과 국경을 이루는 메콩강변을 따라 야시장이 있었던 쪽으로 걸어가니 '짜오 아누웡 공원'이 나왔다. 산책 나왔던 시민들이 꽃과 향을 바치며 짜오 아누웡 동상을 향해 기도를 드린다. 2010년에 세워진 6m 높이의 동상은 한 손에는 칼을 차고, 다른 손은 강 건너 태국을 가리키고 있다.

짜오 아누웡은 비엔티안 왕국의 마지막 왕이다. 싸얌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시절 군대를 이끌고 싸얌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라오스 전쟁영웅이기도 하다. 하지만 군사력 우위를 점했던 싸얌이 세력을 재정비해 비엔티안을 침략하며 비엔티안 왕국은 패망했고 왕은 포로로 잡혀가 방콕에서 죽임을 당했다. 왕의 손가락이 마치 잃어버린 국토 수복의지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태국 입장에서는 반역자에 불과해 못마땅해 한다고 한다.

라오스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왓 씨싸켓' 사원

라오스에서 가장 오래된 '왓 씨싸켓' 사원으로 라오스 미술사에서 가장 가치있는 절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라오스에서 가장 오래된 '왓 씨싸켓' 사원으로 라오스 미술사에서 가장 가치있는 절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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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짜오 아누웡 시절에 건설된 '왓 씨싸켓' 사원은 특이하게도 태국양식이다. 싸얌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짜오 아누웡이 반기를 들고 전쟁을 벌여 일시적으로 영토를 회복했으나 전쟁에 패하여 싸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비엔티안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태국양식으로 건설된 사원은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대법전은 승려들의 출가 의식이 행해지던 곳으로 붓다의 전생을 기록한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불상은 무려 6840개나 돼 불상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사원내부에서는 오래된 벽화를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사원을 설명하는 기록을 보니 라오스 미술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절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닮은 빠뚜싸이. 프랑스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멀리서 본 외관과 달리  가까이서 보니 조잡했다. 시멘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닮은 빠뚜싸이. 프랑스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멀리서 본 외관과 달리 가까이서 보니 조잡했다. 시멘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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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 가장 넓은 타논 란썅거리 모습으로 중요한 정부기관이 모여 있다
 라오스에서 가장 넓은 타논 란썅거리 모습으로 중요한 정부기관이 모여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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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정부 수립이전에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빠뚜싸이'는 프랑스 개선문을 닮았다. 라오스어로 '빠뚜'는 문, '싸이'는 승리를 의미한다. 건축자재는 비엔티안 공항 활주로를 건설하기 위해 미국에서 지원한 시멘트를 사용했다.

멀리서 보았을 땐 괜찮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시멘트가 드러나고 조잡하다. 중앙천장에는 불상과 '낀나리'(새와 사람이 합쳐진 신), 힌두신화인 '라마야마'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입장료를 내고 내부 계단을 올라가면 중간에 기념품 가게가 있다.

박물관 곳곳에는 인도와 흡사한 유물이 많아 인도에서 문화가 전래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박물관 곳곳에는 인도와 흡사한 유물이 많아 인도에서 문화가 전래된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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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국립박물관에는 프랑스식민지배 시절 탄압받았던 라오스인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라오스 국립박물관에는 프랑스식민지배 시절 탄압받았던 라오스인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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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면에 곧게 뻗은 타논 란쌍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타논 란쌍은 라오스에서 가장 넓은 8차선 도로다. 비엔티안의 중심도로로 대통령궁을 비롯한 외국계 은행과 라오스 정부 각 부처가 모여 있는 중심가다. 

프랑스식민 지배기간에 만들어진 국립박물관 구경에 나섰다. 1층에는 크메르 조각상, 공룡뼈, 도자기 파편과 씨앙쿠앙에 있는 돌 항아리 등의 고대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라오스 현대사에 중점을 둬 씨얌의 침략, 프랑스의 라오스 식민통치, 인도차이나 전쟁과 라오스의 독립에 이은 사회주의 정부 수립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프랑스식민지 시절 탄압받았던 사진과 함께 미군이 투하한 불발탄도 전시되어 있었다.   

탓 루앙 사원인근에 있는 와불
 탓 루앙 사원인근에 있는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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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상징이자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종교건축물인 '탓 루앙'은 '위대한 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69m의 직사각형 기단 위에 45m 높이의 탑을 올린 사원은 연꽃봉오리를 형상화한 탑이다.

전설에 따르면 3세기경에 인도 승려들이 가져온 붓다의 사리를 안치했던 장소로 알려졌다. 18~19세기 버마와 싸얌의 침략을 받아 대부분 파괴됐으나 프랑스 통치기간인 1900년대에 들어 복원했다.

1930년대에 재공사가 이뤄졌으며, 1995년 라오스 인민민주의 공화국 탄생 20주년에 맞춰 황금색을 입혀 탑이 번쩍이게 됐다. 건설당시에는 450㎏의 금을 사용해 화려했으나 재건축한 사원은 콘크리트 건물에 금색을 칠했다. 그러나 최근(10월 31일)에 황금 10㎏을 모금해 올리고 금단장을 하고 있었다.

라오스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며 본 전쟁의 그림자

예물을 바치고 불공 드리러 온 가족들
 예물을 바치고 불공 드리러 온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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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북부 고원지대에 있는 씨앙쿠앙은 전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폭탄이 투하된 지역이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기간 동안 베트남과 라오스가 공산화되는 것을 꺼린 미국은 비밀리에 공습작전을 진행했다.

라오스에서 살고 있는  교민의 설명에 의하면 불발폭탄을 이용해 장식한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산악 지역으로 뒤덮인 북부 라오스 지역에서 넓은 평원으로 이뤄진 씨앙쿠앙은 베트남 수도였던 하노이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가 공산화되는 걸 원치 않았고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산악지역을 따라 군사물자 보급로(호찌민 트레일)를 확보했다. 미국은 CIA가 비밀리에 지원한 몽족 용병들을 이용했고 총 58만 944번의 출격을 통해 200만t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씨앙쿠앙에는 지금도 불발탄을 제거해주는 NGO단체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에 이념이 무엇이길래 전쟁의 재앙이 닥쳤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라오스는 불교 신자가 67%로 가장 많다. 기독교도는 1.5%에 불과하며 소수민족들이 토착신앙을 믿는다. 인구의 55%가 라오족인 라오스의 라오족 남성은 평생에 한 번은 승려로 수행하는 것을 삶의 가치로 여긴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평화를 사랑하고 여유롭다. 그런 나라가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 신음한 적이 있다.

탓 루앙 사원을 구경하다 소아과 박승원 원장  부부의 모습을 몰래찍었다. 의료봉사활동에 나선 분들은 이같이 고운 마음씨를 가진 분들이 참여했다
 탓 루앙 사원을 구경하다 소아과 박승원 원장 부부의 모습을 몰래찍었다. 의료봉사활동에 나선 분들은 이같이 고운 마음씨를 가진 분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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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박물관 유물코너에 마주선 학생들. 의료봉사활동에 동참한 학생인 김성은(중1) 학생은 "한국사람들이 라오스 사람에 비해 더 잘산다는 걸 알았지만 라오스 애들이 한국애들보다 더 행복한 것 같아요. 학원에 안 가고 너무 밝아보여서요"라고 말했다. 강현규(대1)군은 "이번 여행을 계기로 유럽배낭여행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국립박물관 유물코너에 마주선 학생들. 의료봉사활동에 동참한 학생인 김성은(중1) 학생은 "한국사람들이 라오스 사람에 비해 더 잘산다는 걸 알았지만 라오스 애들이 한국애들보다 더 행복한 것 같아요. 학원에 안 가고 너무 밝아보여서요"라고 말했다. 강현규(대1)군은 "이번 여행을 계기로 유럽배낭여행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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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박물관에 가서 영어로 써진 현대사를 보니 프랑스는 식민주의자, 미국은 제국주의자로 적혀 있었다. 의료봉사 현장인 몽족 노인들한테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상황을 듣고 싶었지만 대화도 되지 않았고 꺼리는 분위기였다. 전쟁의 상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좌석 옆자리에는 라오스인 부부가 타고 있었다. 내 좌석이 창 쪽인데 "창밖을 보고 싶다"며 양해를 구해 양보했다. 비행기가 서서히 공항 활주로를 흐르고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 순간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굿바이 비엔티안! 굿바이 비엔티안!"을 자그맣게 외치고 있었다. 그들과 대화가 시작됐다.

"한국에 가세요?"
"아니요. 한국을 경유해 미국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미국으로 이민갔습니까?"
"이민간 게 아니라. 저! 그! 그! 예! 뭐, 이민간 거나 마찬가지죠. 텍사스에 살고 있습니다. 인도차이나 전쟁 때 미군편을 들었다가 전쟁이 끝나자 황급히 보트 하나를 마련해 전 가족을 태우고 비엔티안 인근에 있는 메콩강을 따라 흘러내려가 태국 피난민 캠프에 살다 미국으로 갔습니다. 당시 가진 것 하나 없이 이 손목에 찬 시계 하나만 가지고 피난갔습니다."


여수지구촌사랑나눔회원들이  의료봉사활동을 마치고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몽족 어린이들이 학교 담장에 올라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일 무렵 이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렸을까?를 생각하며 이 땅에 평화를 기원했다.
 여수지구촌사랑나눔회원들이 의료봉사활동을 마치고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몽족 어린이들이 학교 담장에 올라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일 무렵 이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렸을까?를 생각하며 이 땅에 평화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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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었지만 얼굴은 울고 있었다. 그들은 "라오스 당국이 반역자라고 해서 입국금지를 했었지만 지금은 금지령이 풀려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도 6.25전쟁이 끝나고 당신처럼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싶어하는데 북한이 허락하지 못해 못 간다"고 했더니 "슬픈이야기!"라고 화답했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1975년 4월 30일이 떠올랐다.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하겠다고 선언해 전군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강원도 전방사단 수색중대에 근무하던 부대에도 훈련중지와 함께 전투태세 명령이 떨어지고 부대원들은 모든 전투준비를 하고 실탄이 지급되기만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폐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쓰레기통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폐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쓰레기통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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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 상황이 되자 우리나라 영해에 미군 핵 항공모함 두 척이 들어오고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다. 다시 의료봉사활동 했던 몽족 마을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전쟁의 참화를 당해야 했나? 우리 같은 평민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쟁은 정치가들의 욕심 때문이다. 

친지 집에서 한 달간 지내다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부부 얼굴이 알려지면 피해를 입을까 염려돼 사진을 찍지 않았다. 당시 전쟁직전까지 갔던 위급한 상황에 대해 얘기하자 "뉴스를 들어 한국의 상황을 잘 압니다. 또 다시 한국에 커다란 비극이 발생할 뻔했네요"라고 말한 그에게서 평화를 염원하는 눈빛을 읽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비엔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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