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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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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장군은 전두환 일당이 광주에서 시민 살육을 자행하던 5월 24일 그의 동지들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절명하였다. 유언으로 (시신에) 국군 동정복을 입혀 매장하고, 묘비에는 '김재규장군지묘'라고 쓰고, 부하들과 한 곳에 묻어달라 했으나 신군부는 이를 모두 거부했다. 

그의 구명에 성공하지 못한 함세웅은 뒷날 〈김재규 부장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썼다. 임의로 발췌한다. 

김재규 부장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요구된다. 우선 박정희가 그렇게 끝맺게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던가. 김재규씨도 물론 박정희 군사정권하에서 요직을 맡았던 사람 중의 하나다. 더구나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어쨌든 1979년 10월 26일에 김재규는 박정희를 제거했다. 왜 그랬을까? 의문의 꼬리가 계속된다. 당시 전두환 중심의 계엄사 수사진에서는 차지철과의 경쟁에서 뒤진 위기감과 부ㆍ마 항쟁에 대한 문책 등으로 우발적 사감에서 일으킨 일이라고 강변하면서 김재규 부장의 의거를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의 불효로 단정하려 했다. 

전두환의 당시 이 발표는 칼을 손에 들고 광기로 뛰고 있는 정신병자를 연상케 했다. 계엄사 수사진의 일방적 발표에 국민들은 듣고만 있었을 뿐 그 누구도 감히 아니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박정희 피살 관련 재판기록 일체와 김재규 부장 등의 법정진술 그리고 변호인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평가할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도 김재규 부장 자신의 법정진술과 항소이유서 등을 선입견 없이 듣고 읽어야 한다. 그 진술과 주장에 일관성이 있는지, 당시 상황과 부합되는지, 그리고 정직한 진술인지를 가려낼 필요가 있다. 이 자료집에는 이를 위한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참으로 신선한 그리고 소박한 그의 뜻을 우리는 뒤늦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박정희의 사생활 비밀과 근혜, 지만 등 박 대통령의 세 자녀 중 두 자녀의 문제된 사생활과 부도덕적인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여러 차례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여 개선토록 청원했으나 매번 묵살당했던 점을 또한 증언하고 있다. 공사(公私)를 구분 못하는 박정희 대통령에 비해 그는 공인으로서의 임무를 늘 생각하며 고민했던 공직자였다.

더구나 그는 부ㆍ마사태 이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차지철의 "캄보디아에서도 수백만 명을 쓸어버렸는데 그까짓 100만, 200만, 천만 명을 죽여버리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무서운 말을 직접 들었고 이와 함께 박 대통령 자신이 "과거 자유당 때에는 최인규, 곽영주 등이 발포명령을 했지만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한 비상식적 발언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무슨 일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행하는 옹고집이 있고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기 보다는 개인의 집권욕이 앞섰기에 그 말기 징후를 똑똑히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당시 재판부와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불의한 재판을 통한 사형집행보다는 그 자신 자결의 길을 택하도록 허락을 청하고 그 외 모든 부하들의 생명을 구해 달라는 책임자다운 말을 남겼다.

그의 법정진술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그의 건강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참으로 그는 불가능했던 때에 그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이룩하고 자신의 삶을 던진 희생자로 평가된다. 그는 재판 중에 결코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인품을 훼손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대통령으로서, 상관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어 진술하고 더구나 육사 동기동창생으로서의 깊은 우정도 표현했다. 그의 장점도 열거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운명이 한 개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모순을 타파해야 함을 확신했다. 그뿐 아니라 큰일을 위해 그는 끈끈한 우정도, 보장된 지위도 끊을 수 있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바로 이 점이 더욱 돋보인다. 비록 상관이고 친구였지만 사적인 관계를 공적인 나라와 국민의 자유를 위해 끊고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헌신의 자세다. 

차지철과의 사감이 박정희 제거의 주된 동기였다면 이렇게 돋보이는 진술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일관된 진술과 논리적 제시는 우리에게 큰 설득력을 주고 있다. (주석 11)


주석
11> <암흑 속의 횃불(4)>, 24~2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함세웅, #함세웅신부 , #정의의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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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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