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노래 중 화랑북춤팀의 공연. 맨 가운데 넥타이를 맨 남자가 김 발레리다.
민병래
- 고려인 민족학교는 한국에서 잘 모른다. 어떤 곳인가.
"연해주에서 한글과 우리 민족문화를 가르치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곳이죠."
고려인 민족학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에 김 발레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뭇 진지해졌다. 그에게 학교는 누구보다 특별한데 바로 교장 선생님 김 발레리아가 그의 고모이고 우리 북춤에 눈을 뜨게 해준 스승이기 때문이다.
고려인 민족사회 재건 꿈꾼 고모이자 스승 김 발레리아
교장 김 발레리아는 고려인 3세로 소련이 해체될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김 발레리의 아버지가 터를 잡고 있던 연해주로 건너왔다. 중앙아시아 일대에 민족주의 기운이 고조되며 소수민족인 고려인이 핍박받게 된 까닭에서다.
어린 시절 김 발레리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극장 배우들의 순회공연, 가을이면 어김없이 먼 길을 찾아와 심청가와 춘향가를 부르고 우리 가락을 노래했다. 동네 사람들은 해마다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아무리 바빠도 모두 모여 돼지를 잡고 아리랑을 부르며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 극단이 떠날 때는 내년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꼭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두 번째는 아버지의 눈물. 어느 날 아버지는 논일을 마치고 돌아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저 집시 아이들도 자기 말을 하는데 어찌 우리 고려인 아이들은 소련 말밖에 모르냐" 하면서 한탄했다.
김 발레리아의 어린 마음에 이 두 가지 기억이 씨를 뿌려 자신이 크면 민족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게 했다. 마침 그가 전공한 도서관학은 문화대학에 소속되어 있어서 예술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 청년 시절에 익힌 예술적 감수성을 갖고 돌아온 연해주에서 고려인 민족사회를 재건하고 우리 전통예술을 이어가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2019년에 김 발레리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려인 민족학교'를 세웠다. 고려인 4세, 5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글과 우리 전통예술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2층 건물을 빌려 200명의 학생을 모아 방과후 교실로 출발했다. 연해주 정부로부터 민족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재정 지원은 없어 김 발레리아 혼자 힘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야 했다. 학교가 세워진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며 재외동포청과 인천시교육청, 한국의 시민사회가 조금씩 지원해 주고 있으나 임대료, 교사 월급, 교재·교구비는 늘 부족했다.
하필이면 민족학교가 문을 열고 얼마 안 돼 코로나가 터지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어져 학교를 둘러싼 사정은 나빠져만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반씩 운영되는 한글수업 참여자에게 1500루블(2만 6천 원)의 수업료를 받으나 턱없이 모자랄 뿐이다.
고모의 뜻 받들어 북 가르치는 선생으로 합류
김 발레리는 고모의 뜻을 존중해 개교 때부터 북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합류했으나 학교의 사정과 고모의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으니 그의 마음 또한 무겁긴 마찬가지다.
- 어떤 계기로 민족학교에서 북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건가요?
"중학교 때 우리 북춤을 알게 되었죠."
김 발레리는 93년생으로 올해 서른둘, 우수리스크에서 변호사 업무를 하고 있다. 어쩌다 그는 민족예술에 관심을 갖고 선생 역할까지 떠맡았을까? 사건은 열다섯 살에 일어났는데 고모 김 발레리아 집에서 3개월 동안 산 적이 있다. 고모는 그때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만든 '고려인민족자치회의 문화회관'에서 북과 춤 같은 우리 예술을 가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