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현장에 선 정인숙옆에 들고 있는 것이 작업용구. 페인트와 롤러,붓,끌 등이 담겨있다.
정인숙제공
정인숙은 출근해 작업지시를 받으면 안전모에 안전화, 안전띠를 메고 보안경과 방진마스크를 낀다. 과일박스 크기 작업통에 페인트와 롤러·붓·헤라들을 넣고 이를 움켜쥔 채 현장으로 간다. 내 몸 하나도 무거운데 10kg이 넘는 작업용구는 유격훈련 때 병사들이 메는 군장에 버금간다.
전처리를 끝내고 스프레이가 뿌려진 곳을 덧칠해 도장막을 두텁게 하는 일이 그의 업무. 정인숙의 롤러와 붓은 엔진룸이나 선체 등 안 가본 곳이 없지만 제일 어려운 곳은 역시 탱크안이다. 저장소 노릇을 하는 탱크는 종류에 따라 높이가 10층, 15층 다양하다. 이런 곳을 팔꿈치에 작업통을 낀 채 수직 사다리로 오르내려야 한다. 처음엔 어질어질했다. 자칫 헛디디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언제나 신경이 곤두선다.
탱크 안에서 도장작업을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환기. 배의 옆면을 칠할 때는 발판을 딛고서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냄새도 가셔준다. 그런데 탱크 안은 도무지 답이 없다. LPG선은 카고탱크라고 탱크 안에 탱크를 집어넣어 환풍기를 틀고 공기를 빨아대도 어지간해서는 바깥 공기와 순환이 되지 않는다. 열명 안팎의 반원이 한꺼번에 작업을 시작하면 탱크 안은 금세 신나 냄새로 가득 찬다. 이때 종종 신나에 취한다. 이미 작업한 곳을 되풀이해 칠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갈짓자 걸음이 되어 구석으로 파고든다.
정인숙도 취한 나머지 배관 파이프에 누워서 한 곳만을 칠한 경우가 여러 번이다. "나는 안 취했어 안 취했어" 하면서 엉덩이를 흔들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귀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상여 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다. 이때 두통이 같이 오면 고통이 몇 곱절이 되고 입에는 신나 냄새까지 나 밥을 넘기기도 힘들다.
정인숙에게 신나 냄새만 적군이 아니다. 작업복 위에 페인트 방울이 스며들지 못하게 녹색 피스복을 껴입고 면장갑 위에 빨간 코팅 장갑을 끼지만 스프레이를 뿌리다 보면 페인트 액이 살갗에 닿기 마련이다.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땀을 훔치노라 얼굴과 목에도 페인트가 묻는다. 그럴 때마다 불에 덴 듯 살점이 벌겋게 일어나고 밤이면 가려워 잠을 잘 수가 없다. 정인숙의 손등과 팔목 언저리는 온통 붉은 반점투성이다. 신나가 만든 상처고 조선소밥 15년이 정인숙에게 준 훈장이다.
나윤옥도 처음에는 도장으로 조선소 일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롤러를 미는 게 어디 쉬운가? 배관이 복잡해 롤러가 미치지 못하는 곳은 1인치, 2인치 다양한 크기의 붓으로 덧칠을 해 막을 입힌다. 쪼그려 팔을 뻗고 때로는 비틀거나 누운 채로 하다 보니 3개월 만에 몸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특히 손목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탈이 났다. 번 돈을 병원비로 털어먹고 다시 시작한 업무가 '발판 하부감시'. 용접과 도장 전기와 배관, 이 모든 업무가 발판 위에서 이뤄지니 밑으로 용접불똥이나 쇳조각, 여러 자재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밑을 지나가는 노동자가 다칠 위험이 크기에 하부감시가 필요하다. 나윤옥은 그날그날 발판길을 따라서 사각콘을 늘어놓는다. 위험구역을 지나지 못하도록 줄을 치고 이를 못 보면 호루라기를 분다. 돌아가기 싫다고 나윤옥의 제지를 무시하는 다른 부서 반장과 몸싸움도 했다.
하부감시만 하면 좋으련만 오지랖 넓은 나윤옥은 발판을 설치할 때 필요한 자재를 날라주는 데모도 노릇까지 했다. 발판·사다리·사다리지지대와 덮개·파이프, 거기에 낙하방지용보드 등 50가지가 넘는 물품을 옮겨주다 지금은 아예 발판 설치와 해체작업 노동자로 나섰다.
발판의 길이는 가장 긴 놈이 4.5m, 무게만 24kg이다. 여기에 브라켙과 클램프가 얽어매지고 작업하며 떨어진 페인트에 흙먼지와 쇳가루가 쌓이면 이래저래 무게가 늘어난다. 용접이 끝나면 배관과 전기, 그리고 다시 도장작업이 이어지니 설치와 해체는 끝없이 반복된다. 하루 500개 이상 발판을 옮긴 날도 있다. 그러니 허리와 무릎, 어깨가 성할 날이 없다. 나윤옥 그만이 아니라 발판팀 대부분이 '근골격계 질환'이라는 거창한 병을 안고 산다. 10만 개나 되는 철판을 이어붙여야 배 한 척이 완성된다. 몸뚱아리는 아우성쳐도 나윤옥은 이 '위대한' 작업을 위해 매일매일 하늘길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