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2 11:01최종 업데이트 24.06.0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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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아들의 묘비를 닦고 있는 박명선. 김용권은 용미리 시립공원묘지에서 이천민주화기념공원으로 옮겨왔다. 민병래
 
- 1편 <2층 침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엄마의 한맺힌 싸움>(https://omn.kr/28upq)에서 이어집니다.

박명선이 이천민주화기념공원에 도착한 건 점심나절. 용미리 시립공원묘지에서 이천으로 옮긴 건 10여 년 전이다. 이천은 처음에 황량했다. 산을 깎아 만든 묘터는 벌거벗은 듯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막 옮겨 심은 나무는 밑동도 작고 가지도 옹색해 이곳에서 과연 용권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래도 한영현과 이윤성처럼 강제징집으로 숨진 이들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박명선은 묘비에 쌓인 먼지를 훔쳐내며 막걸리와 오징어포를 꺼냈다. 4월의 맑은 햇살이 묘지에 미끄러지며 내려앉는다. 하늘은 얼음장처럼 파랗다. 박명선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용권이의 사진을 보면서 아침저녁으로 얘기를 나누지만 두 해 만에 온 탓인가 나누고픈 얘기, 떠오르는 기억이 많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기의 결정은 너무나 허망했다. 보고서에는 많은 내용이 담겼으나 한마디로 '김용권의 죽음은 진실규명이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이었다. 조사를 재개한 의문사 2기도 2004년 6월 28일 '각하' 결정을 내리고 판단 근거도 공개하지 않았다. 박명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실로 쳐들어가 아예 살림을 차렸다. 전기담요와 솥단지를 가져갔다. 으리으리한 건물에 생선 굽는 냄새, 청국장 냄새가 가득했다. 세상이 아들의 죽음을 이다지도 몰라주는 게 원망스러웠다.

"충격으로 몸이 아파" 8월 3일 겪은 일

김용권은 1986년 8월 3일 208보안부대에서 큰 고초를 겪었다. 4시간 동안이나 뭇매를 맞았다. 208보안부대에서 행정계장을 맡고 있는 추 상사는 자신의 아내에게 김용권이 자신을 면회 오게끔 박명선에게 연락하라고 시켰다. 김용권은 주말 외출이 자유로운 카투사이니 8월 3일 방문하기로 하고 이날 의정부 인디언캠프를 나와 오후 두 시경 포천에 있는 208보안부대에 도착했다.

추 상사는 김용권이 도착하자마자, 서울대 '민민투'와 '세계문화연구회' 출신의 여러 수배자를 잡는 데 협조하라고 꼬드겼다.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이 박종철로부터 캐내고자 했던 81학번 박종운과 82학번 정경현의 행방에 대한 정보였다. 추 상사는 "협조하면 곧바로 제대를 시키고 너와 동생들의 학비, 집안의 빚까지 정리해 주겠다"는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김용권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208보안부대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감금되어 심한 매타작을 당했다. 행정계장이 관리하는 장교 식당이나 식당 옆 창고가 고문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잠시 까무러치기도 했던 김용권이 이 소굴을 나온 것은 18:30분 경. 208보안부대로서는 미군 관할인 김용권의 귀대까지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

추 상사가 앞에서 김용권을 유인했으나 이를 208부대 차원에서 진행했음은 8월 3일의 근무일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날은 일요일인데도 추 상사가 07:10분에, 대공계장은 07: 20분, 운용과장인 소령은 07:30분에 출근한다. 부대장인 박태준 중령도 출근했다. 이날 김용권이 들어온 시각은 14:10분이고 나간 시간은 18:30분이다. 운용과장은 18:45분에 퇴근한다.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도 드러나지만 일요일에 전 간부가 특근을 한 경우는 208부대 창설 이래 이날이 거의 유일했다.

김용권은 8월 3일 겪었던 일을 '지난주 충격으로 몸이 아파...' 라고 8월 11일 일기에 기록했다. 외박 나오면 엄마에게 "추 상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복수하겠다"라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카투사 동료에게도 고통을 털어놓았는데 같은 소대원 임창택은 "1986년 가을 이후부터 나사가 풀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보안대에 불려 가 발가벗긴 채 상당 시간 구타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변한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군대 동기 손용하는 "그가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고 구타를 당했다는 얘기는 당시 부대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라고 말했다.

8월 3일의 충격으로 김용권은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 후로도 계속된 보안부대의 호출로 김용권은 끙끙 앓다가 급기야 용산에 있는 121병원으로 후송되고 10월 10일에는 수도통합병원에 입원했다. 이때 김용권을 진찰한 수도병원 정신과 이문성 대위는 "정서불안정, 기분의 앙양,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증상 등으로 121병원에서 후송되어 왔다. 장기치료가 필요해 1986년 11월 27일 대구병원으로 후송조치를 했다"라고 진료기록을 남긴다. 김용권은 여기서 한 달여 치료를 받으며 증세가 나아졌다. 대구병원의 신경정신과 전문의 곽태섭은 "병실 생활도 원만하고 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정서의 안정이 관찰된다"라며 1986년 12월 20일에 '퇴원상신서'를 쓴다. 이후 김용권은 1987년 1월 9일 퇴원, 자대에 복귀해 통원 치료를 한다. 숨지기 직전인 1987년 2월 18일도 121병원의 신경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고 집에 들렀던 것이다.

이천 민주화공원에서 막걸리 석 잔을 붓고 박명선은 따뜻한 햇볕을 쬐며 오래 시간 아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의 회포를 푼 뒤 박명선은 민주화기념공원 사무실에 들러 아들의 묘소를 잘 돌봐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서울대 교정에 있는 '용권이의 나무'를 만나보러 출발했다. 용권이 나무가 심어진 건 2015년이다.

용권이 죽음을 접했을 때 서울대의 친구들이 큰 힘이 되었다. 친구 허병하는 박명선을 부축해 시신이 놓인 미8군 병원을 찾아가고 헌병대 수사관을 만날 때 동행했다. 장례식 후에도 그는 김용권의 집에 여러 날 머물며 박명선과 김용권의 동생을 챙겼다. 그는 이 일로 수사선상에 올라 쫓겨 다니다가 사복을 입은 6명의 남자에게 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연행을 목격한 허병하의 형이 차로 뒤를 따라갔는데 서빙고 근처에서 동생의 행방을 놓쳤다고 한다. 허병하는 '김용권이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자술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친구들은 급하게 결정된 노제를 위해서도 애썼다. 미8군 종교휴양소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장례 버스는 경영대 강의실에 들려 노제라기보다는 간단한 추모의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두 대 중 한 대에는 가족이 타고 나머지 한 대는 계훈제 선생,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등 민주 인사와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회원이 탔다.

그런데 용산을 출발한 버스는 신림동 방향으로 가지 않고 용미리로 가는 모양새였다. 운전석 뒤에 탄 박명선은 악을 썼다. 왜 약속대로 하지 않느냐고. 그는 핸들을 꺾기 위해 일어섰다. 순간 젊은 병사 하나가 좌석 손잡이를 움켜쥐고 박명선을 가로막았다. 박명선은 울부짖으며 병사의 손을 억세게 물었다. 버스 안은 술렁거렸고 손을 물린 병사는 아픔을 삭이며 눈물만 흘렸다. 명령에 따라 박명선을 제지하면서도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버스는 결국 서울대로 방향을 틀었고 강의실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용미리에서 하관을 할 때 박명선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어루만지고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입관할 때 나이론 속옷을 걷어내고 면으로 만든 속옷을 입혀주었다. 박명선은 경황이 없고 아버지는 투병 중이고 동생들은 어려서 채 신경을 쓰지 못한 점을 챙긴 것이다.

이천민주화공원을 나와 늦은 점심을 마치고 서울대에 도착했을 때는 4월의 햇살이 어느덧 고개를 굽힐 때였다. 마주 보는 관악산의 산그림자가 교정을 덮는다. '해방의 나무'라 이름 지은 용권이의 나무, 그 옆으로 신향림, 한희철 등 여덟 그루의 나무가 더 있다. 단단하고 씩씩한 모양새다. 이렇게 튼실히 커 가는 게 기쁘고 자랑스럽다.
  
서울대에 심어진 민주열사의 나무. 김용권의 나무는 해방의 나무란 이름으로 2015년에 심어졌다. 민병래

길 위의 30년 박명선의 승리

박명선의 가슴을 뻥 뚫어준 소식은 2021년 10월 25일에 전해졌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날 "망 김용권은 보안부대로부터 구타·고문·회유 등을 통해 민주화 학생운동 관련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인정한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아쉽게도 누가 지시했고 누가 폭행을 했다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진전된 결정이었다. 의문사 1·2기의 판정에도 굴하지 않고 길 위에서 30여 년을 보낸 박명선의 승리였다.

인권위원회·국민고충위원회·청와대·국방부·보안사 등 박명선은 대한민국의 힘 있는 기관 앞에서 오랜 세월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 거대한 성벽 앞에서 애끓는 기도를 바쳤다. 그의 작은 심장은 파닥거리고 그의 여린 어깨는 흐느낌에 물결쳤다. 그가 써내려간 호소문, 진정서, 탄원서는 눈물의 강을 이뤘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룬 값진 결실이었다.

헌병대 및 208보안부대 관련자들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받을 때 김용권이 208부대를 방문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프락치로 활용하기 위한 시도나 폭행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군사망사고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출석해서는 "김용권이 보안사의 C급 관리대상으로 208부대에 유인되어 왔으며 폭행을 당하고 수배자 검거에 협력하라는 강요를 받았다"라고 인정했다.

당시 6군단 헌병대 수사과장이었던 최경식은 "망인이 관찰대상 C급으로 분류되어 면담과 회유를 통해 학생운동 계보, 동료의 소재 등에 대해 심문받았다"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208보안부대 보안계장이었던 황의갑은 "보안사령부 차원에서 학생운동권 주요 수배자 검거를 위해 많은 지시를 내렸고 휘하 보안부대에서는 엄청난 실적 부담을 느꼈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밝혔다.

문제는 모든 책임을 추 상사 한 명에게 덮어씌우는 모양새였다는 점이다. 앞서의 보안계장은 "추 상사가 골수 운동권 친척이 있는데 이놈을 회유시켜서 활용해야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대공계장이나 군수계장도 "추 상사가 사령부의 지시도 없이 자신의 소관도 아닌 대공계 일을 했고 방첩의 방자도 모르면서 일을 저질렀다"라고 군사망사고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진술했다. 다른 208부대원들도 추 상사가 '폭력적이다, 아부가 심하고 한 건 올려서 위에 잘 보이려고 안달이었다'라는 내용으로 진술한다.

이들은 2002년과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2기에서 조사를 받을 때는 현역 신분이었으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시점에는 전역한 상태여서 이제라도 진실을 말할 필요를 느꼈다며 진술 번복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데 추 상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1986년 8월 3일의 사건 이후 우울증 등으로 김용권이 입원하기 한 달 전 수도통합병원에 입원한다. 1987년 2월 20일 김용권이 사망했을 당시에도 입원 상태여서 헌병대는 박명선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조사 불가'라고 결정한 바 있었다. 게다가 군사망사고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2019년 출범해 김용권의 죽음을 조사할 때, 이미 추 상사는 사망한 상태였다. 결국 당시 208보안부대 관련자들은 모든 책임을 추 상사에게 덮어씌우는 쪽으로 입을 맞춘 게 아닌가 의심을 갖게 된다.
 
박명선은 30년 넘게 아들을 위해 싸웠다.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는 김용권이 보안사의 가혹 행위와 프락치 활동 강요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민병래
 

어쨌든 군사망사고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많은 한계가 있지만 박명선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김용권은 2008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사망'으로 인정받고 2018년 6월 29일에는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에서 순직3형 결정을 받았다.

김용권은 실제로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는 83학번으로 서울대 경영대학에 입학한 뒤 '세계문화연구회'에 들어간다. 2학년 때인 1984년에는 경영대학생회 학회조직에 가입해 임철봉, 김영규, 김진권, 공영운과 함께 적극 활동한다. 1984년 하반기 들어서는 한층 더 노력했는데 9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대회'에, 10월에는 가리봉오거리에서 열린 '노동악법개정 및 노조탄압반대' 가두시위에 참여한다. 1985년 초 학생운동권은 다가올 2·12총선에 대비 '민주총선쟁취 학생연합'을 꾸리는데 김용권은 이 연합회의 일원으로 "군의 정치개입중단·노동악법 개정"을 내걸고 1월 16일 신한민주당사 점거농성에 들어간다. 이 농성으로 김용권은 임철봉과 함께 구로서로 연행돼 남부지방법원에서 구류 10일을 받고 학교에서도 근신 처분 10일을 받는다.

이후 김용권의 고민은 깊어진다. 선배들은 1984년 말부터 1985년이 되면 세계문화연구회의 회장을 맡으라고 권유했다. 서울대 교무처에서는 근신 조치 이후 입대를 강요했다. 구류를 산 이후 어머니는 졸업 후 네가 집안을 살려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막냇동생도 대학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던 터여서 도저히 학비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용권은 부득이 학생운동을 잠시 보류하고 군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될지는 몰랐지만.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판정을 받아들고 박명선은 기뻤다. 이제 남은 일은 보안사라고 뭉뚱그려서가 아니라 보안사의 누가, 어떻게 용권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를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이다. 추 상사 혼자 저지른 일이라는 208부대원의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은 보안부대에서 조사받을 때 추 상사 뒤로 상관 두 사람이 버티고 있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당시 6군단 헌병대는 박종철의 죽음 이후 전개된 정세를 감안해 208보안부대의 상급부대인 1008보안부대까지 조사하려 했다. 하지만 6군단 헌병대장은 중령이고 1008보안부대장은 대령인 상황, 안 그래도 하늘을 찌르는 보안사의 위세인데 쉽지 않았다. 심지어 보안사는 6군단 헌병대 이승환 수사관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고 가 208보안부대에 대한 수사 상황을 캐묻기까지 했다. 보안사가 막무가내로 수사를 방해하고 은폐 공작을 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완전히 덮을 수는 없는 법. 보안사에서 1988년 5공특위 청문회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내부 문건 중 "유가족의 끈질긴 해명 요구 시 심적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아래 추 상사를 '향후 문제야기 인물'로 적시한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또 박명선의 집요한 정보공개청구 노력으로 6군단 헌병대가 1987년 6월경 국군수도통합병원신경정신과 위생병의 입회 하에 추 상사를 조사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추 상사의 진술내용은 현 국군방첩사령부의 거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진정된 결정을 받아들고 박명선은 팔십이 넘은 몸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2023년 4월에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요청했다. 1년여가 지났으나 이렇다 할 답변을 듣지 못했다.

밝고 싱그러운 아들 사진 "이젠 형 그늘에서 벗어나야지"

서울대에 있는 용권이 나무에 막걸리 석 잔을 붓고 박명선이 정릉으로 돌아온 건 해너미가 북한산 비봉을 넘어갈 때였다. 11평짜리 임대 아파트, 20년 전에 보증금 200만 원을 내고 입주했다. 복도식 아파트고 대개 노인이 거주하는 곳이라 문을 반쯤 열어놓고들 지낸다. 용권이를 잃은 뒤부터 신경성 위궤양이 심해져 박명선의 식사량은 계속 줄어들었다. 요즘은 밥을 거의 삼키지 못하고 산양유 가루에 요구르트를 타 마시고 고구마를 조금 먹는 정도다. 연배 비슷한 이웃이 먹을거리를 챙겨주지만 삼키는 게 쉽지 않다. 박명선이 현관에 다다르니 북한산의 비탈을 내려온 바람이 어깨를 어루만진다. 고마운 북한산의 볕과 바람이다.
 

정릉에 와서 박명선은 된장을 쒀 팔았다. 자식들은 말렸지만 손을 놀려서 뭐하겠는가? 용권이를 잃은 아픔에 빠지지 않으려고 언제나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북한산의 햇빛과 기운을 잘 받게 복도에서 된장을 쒔다. 마침 맞게 익으면 주먹만한 젓갈통에 담아 동네 미장원을 돌아다녔다. "맛있다, 고향 어머니 맛이다"라는 칭찬을 듣는 게 돈 몇 푼 받는 것보다 즐거웠다.

이곳에 와 다시금 가슴 아픈 이별도 겪었다. 남편은 아들의 죽음을 접하고 충격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3개월 때론 6개월이나 입원한 적도 있었다. 결국 남편은 용권이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났다. 아들 둘은 오랫동안 일주일마다 돌아가면서 아버지 목욕을 시켰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박명선은 집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현관에서 안방까지는 고작 대여섯 걸음이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아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군복을 입고 카투사 막사의 자기 방에서 찍은 모습, 밝고 싱그럽다. 한때는 서랍 속에 있었다.
 
카투사 근무시 김용권의 모습. 막사의 자기 방에서 찍은 사진으로 박명선이 제일 아낀다. 박명선 제공
 
용권이의 동생은 어느 날 핀잔 아닌 핀잔을 늘어놓았다.

"엄마, 이제 형도 그만 편히 쉬게 형 사진을 고이 싸서 서랍장에 넣으세요. 엄마도 이젠 형 그늘에서 벗어나시구요."

그 말을 듣고 박명선은 한동안 깊게 고민했다. 결혼한 녀석들이 아내를 데리고 집에 다녀갈라치면 꼭 마주해야 하는 형의 사진, 며느리에겐 젊어서 죽은 시아주버니의 사진이다. 헤아려 보니 퍽이나 불편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명선은 마음을 다잡고 아들의 사진을 보자기에 싸 고이 벽장 안에 들였다. 딸의 생각은 달랐다. "큰(용권)오빠는 엄마 말벗해 주는 걸 좋아할 거야. 다시 꺼내놔, 그게 엄마 마음도 편하잖아" 그날로 박명선은 다시 사진을 꺼내 머리맡에 놓았다.

박명선은 아들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 품에 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눈앞에 또렷하게 한 장면이 펼쳐진다.

영등포의 작은 집, 방은 두 개뿐이다. 큰 방에 아들 세 놈의 책상을 들여놓고 딸은 작은 방에서 함께 지냈다. 늦은 밤 도서관에서 용권이가 돌아오면 프라이팬에서 부침개가 노릇노릇 익는다. 용권이와 둘째, 셋째의 젓가락질이 바쁘다. 입안 가득 밀어 넣는 삼형제, 박명선은 코카콜라를 컵마다 그득 따라준다. 녀석들의 볼이 미어터진다.

그새 해가 졌는가 사진을 품은 박명선의 작은 어깨 위에 어둠이 깃들고 북한산 먼 골짜기에서 소쩍새의 울음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①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2018년 3월 13일 제정된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에 의해 출범된 대통령 직속기구로 2018년 9월 14일부터 군 사망사건 규명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대상은 1948년 11월 30일부터 대한민국 국군, 의무소방대, 경찰청 의무경찰, 전투경찰순경, 해양경찰청 의무경찰, 교정시설경비교도대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 중 의문이 제기된 사건이다. 군사망사고에 대한 진정의 접수, 조사대상 선정, 진상조사, 고발 및 수사의뢰, 관련자 피해구제 및 명예회복 요청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② 1987.3.17일 자 제6군단 헌병대가 조사한 결과는 "김용권은 86.10.18일 입대 후 동료상병 이종승의 진술에 따르면 미군에 적대감이 있고" 87년 1월10일 대구통합병원에서 원복한 이후에도 "병원에 후송을 괜히 다녀왔다" "밤에 잠을 잘 못 잔다"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볼 때 대구병원에서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 글을 쓰는 데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상규명위원회 조종주 사무처장, 기록단 김문수 위원,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이형숙 사무처장님의 도움 말씀과 감수가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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