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묘비를 닦고 있는 박명선. 김용권은 용미리 시립공원묘지에서 이천민주화기념공원으로 옮겨왔다.
민병래
- 1편 <2층 침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엄마의 한맺힌 싸움>(https://omn.kr/28upq)에서 이어집니다.
박명선이 이천민주화기념공원에 도착한 건 점심나절. 용미리 시립공원묘지에서 이천으로 옮긴 건 10여 년 전이다. 이천은 처음에 황량했다. 산을 깎아 만든 묘터는 벌거벗은 듯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막 옮겨 심은 나무는 밑동도 작고 가지도 옹색해 이곳에서 과연 용권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래도 한영현과 이윤성처럼 강제징집으로 숨진 이들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박명선은 묘비에 쌓인 먼지를 훔쳐내며 막걸리와 오징어포를 꺼냈다. 4월의 맑은 햇살이 묘지에 미끄러지며 내려앉는다. 하늘은 얼음장처럼 파랗다. 박명선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용권이의 사진을 보면서 아침저녁으로 얘기를 나누지만 두 해 만에 온 탓인가 나누고픈 얘기, 떠오르는 기억이 많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기의 결정은 너무나 허망했다. 보고서에는 많은 내용이 담겼으나 한마디로 '김용권의 죽음은 진실규명이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이었다. 조사를 재개한 의문사 2기도 2004년 6월 28일 '각하' 결정을 내리고 판단 근거도 공개하지 않았다. 박명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실로 쳐들어가 아예 살림을 차렸다. 전기담요와 솥단지를 가져갔다. 으리으리한 건물에 생선 굽는 냄새, 청국장 냄새가 가득했다. 세상이 아들의 죽음을 이다지도 몰라주는 게 원망스러웠다.
"충격으로 몸이 아파" 8월 3일 겪은 일
김용권은 1986년 8월 3일 208보안부대에서 큰 고초를 겪었다. 4시간 동안이나 뭇매를 맞았다. 208보안부대에서 행정계장을 맡고 있는 추 상사는 자신의 아내에게 김용권이 자신을 면회 오게끔 박명선에게 연락하라고 시켰다. 김용권은 주말 외출이 자유로운 카투사이니 8월 3일 방문하기로 하고 이날 의정부 인디언캠프를 나와 오후 두 시경 포천에 있는 208보안부대에 도착했다.
추 상사는 김용권이 도착하자마자, 서울대 '민민투'와 '세계문화연구회' 출신의 여러 수배자를 잡는 데 협조하라고 꼬드겼다.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이 박종철로부터 캐내고자 했던 81학번 박종운과 82학번 정경현의 행방에 대한 정보였다. 추 상사는 "협조하면 곧바로 제대를 시키고 너와 동생들의 학비, 집안의 빚까지 정리해 주겠다"는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김용권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208보안부대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감금되어 심한 매타작을 당했다. 행정계장이 관리하는 장교 식당이나 식당 옆 창고가 고문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잠시 까무러치기도 했던 김용권이 이 소굴을 나온 것은 18:30분 경. 208보안부대로서는 미군 관할인 김용권의 귀대까지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
추 상사가 앞에서 김용권을 유인했으나 이를 208부대 차원에서 진행했음은 8월 3일의 근무일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날은 일요일인데도 추 상사가 07:10분에, 대공계장은 07: 20분, 운용과장인 소령은 07:30분에 출근한다. 부대장인 박태준 중령도 출근했다. 이날 김용권이 들어온 시각은 14:10분이고 나간 시간은 18:30분이다. 운용과장은 18:45분에 퇴근한다.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도 드러나지만 일요일에 전 간부가 특근을 한 경우는 208부대 창설 이래 이날이 거의 유일했다.
김용권은 8월 3일 겪었던 일을 '지난주 충격으로 몸이 아파...' 라고 8월 11일 일기에 기록했다. 외박 나오면 엄마에게 "추 상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복수하겠다"라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카투사 동료에게도 고통을 털어놓았는데 같은 소대원 임창택은 "1986년 가을 이후부터 나사가 풀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보안대에 불려 가 발가벗긴 채 상당 시간 구타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변한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군대 동기 손용하는 "그가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고 구타를 당했다는 얘기는 당시 부대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라고 말했다.
8월 3일의 충격으로 김용권은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 후로도 계속된 보안부대의 호출로 김용권은 끙끙 앓다가 급기야 용산에 있는 121병원으로 후송되고 10월 10일에는 수도통합병원에 입원했다. 이때 김용권을 진찰한 수도병원 정신과 이문성 대위는 "정서불안정, 기분의 앙양,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증상 등으로 121병원에서 후송되어 왔다. 장기치료가 필요해 1986년 11월 27일 대구병원으로 후송조치를 했다"라고 진료기록을 남긴다. 김용권은 여기서 한 달여 치료를 받으며 증세가 나아졌다. 대구병원의 신경정신과 전문의 곽태섭은 "병실 생활도 원만하고 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정서의 안정이 관찰된다"라며 1986년 12월 20일에 '퇴원상신서'를 쓴다. 이후 김용권은 1987년 1월 9일 퇴원, 자대에 복귀해 통원 치료를 한다. 숨지기 직전인 1987년 2월 18일도 121병원의 신경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고 집에 들렀던 것이다.
이천 민주화공원에서 막걸리 석 잔을 붓고 박명선은 따뜻한 햇볕을 쬐며 오래 시간 아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의 회포를 푼 뒤 박명선은 민주화기념공원 사무실에 들러 아들의 묘소를 잘 돌봐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서울대 교정에 있는 '용권이의 나무'를 만나보러 출발했다. 용권이 나무가 심어진 건 2015년이다.
용권이 죽음을 접했을 때 서울대의 친구들이 큰 힘이 되었다. 친구 허병하는 박명선을 부축해 시신이 놓인 미8군 병원을 찾아가고 헌병대 수사관을 만날 때 동행했다. 장례식 후에도 그는 김용권의 집에 여러 날 머물며 박명선과 김용권의 동생을 챙겼다. 그는 이 일로 수사선상에 올라 쫓겨 다니다가 사복을 입은 6명의 남자에게 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연행을 목격한 허병하의 형이 차로 뒤를 따라갔는데 서빙고 근처에서 동생의 행방을 놓쳤다고 한다. 허병하는 '김용권이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는 자술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친구들은 급하게 결정된 노제를 위해서도 애썼다. 미8군 종교휴양소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장례 버스는 경영대 강의실에 들려 노제라기보다는 간단한 추모의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두 대 중 한 대에는 가족이 타고 나머지 한 대는 계훈제 선생,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등 민주 인사와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회원이 탔다.
그런데 용산을 출발한 버스는 신림동 방향으로 가지 않고 용미리로 가는 모양새였다. 운전석 뒤에 탄 박명선은 악을 썼다. 왜 약속대로 하지 않느냐고. 그는 핸들을 꺾기 위해 일어섰다. 순간 젊은 병사 하나가 좌석 손잡이를 움켜쥐고 박명선을 가로막았다. 박명선은 울부짖으며 병사의 손을 억세게 물었다. 버스 안은 술렁거렸고 손을 물린 병사는 아픔을 삭이며 눈물만 흘렸다. 명령에 따라 박명선을 제지하면서도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버스는 결국 서울대로 방향을 틀었고 강의실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용미리에서 하관을 할 때 박명선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어루만지고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입관할 때 나이론 속옷을 걷어내고 면으로 만든 속옷을 입혀주었다. 박명선은 경황이 없고 아버지는 투병 중이고 동생들은 어려서 채 신경을 쓰지 못한 점을 챙긴 것이다.
이천민주화공원을 나와 늦은 점심을 마치고 서울대에 도착했을 때는 4월의 햇살이 어느덧 고개를 굽힐 때였다. 마주 보는 관악산의 산그림자가 교정을 덮는다. '해방의 나무'라 이름 지은 용권이의 나무, 그 옆으로 신향림, 한희철 등 여덟 그루의 나무가 더 있다. 단단하고 씩씩한 모양새다. 이렇게 튼실히 커 가는 게 기쁘고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