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오션 도장노동자 정인숙그는 거제 조선서에서 15년째 도장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민병래
51일 투쟁으로 신세계를 맛보다
재계약을 거부당한 정인숙은 그날로 숨어있던 조합원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노조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2022년 6월 2일에 시작된 51일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거통고조선하청지회는 임금 30% 인상과 고용안정 등을 요구했다. 얼핏 보면 30%는 많아 보이나 사실은 원상회복을 바라는 요구였다. 2016년 이후 대우조선은 조선업이 불황이라며 임금을 깎고 상여금을 줄여나갔다. 조선업 경기가 좋아지면 되돌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업이 다시 호황을 맞았으나 임금과 상여금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51투쟁은 7~8년에 걸쳐 깎인 임금과 상여금을 되돌리는 몸부림이었다.
파업투쟁의 열기는 높았다. 그동안 쌓였던 비정규직의 설움, 일당 노동자의 한이 쏟아졌다. 코로나시절 정규직은 쉬면서도 급여를 받았으나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는 그렇지 못했다. 4대 지원금(귀향비, 휴가비, 격려금, 성과급)은 원청에게만 돌아가고 하청노동자에겐 어쩌다 닭모이만큼 돌아갔다. 독감예방주사비 지원도 직영 정규직에게는 2만4000원이 전액 지원되지만 하청은 50%만 지급되었다. 물론 일당직은 이것마저 제외되었다.
2022년 당시 거제 대우조선소 현장에 1만 2천여 노동자가 있었다. 거통고하청지회의 조합원은 150명 안팎, 1%에 불과한 숫자였다. 대우조선은 해볼 테면 해봐라, 하청업체가 해결할 문제다, 자신과 관련 없다며 콧방귀도 안 뀌었다.
6월 2일 부분파업으로 시작한 51투쟁은 조선소 야드에 여덟 곳 거점을 확보했다. 발판이 없으면 조선소의 모든 작업이 멈추니 발판 쪽에 두 군데를 확보하고 도장 쪽에도 농성장을 마련했다.
나윤옥은 발판기자재업체 대보의 자재가 쌓여있는 서문적치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동료노동자에게 함께 싸우자고 외쳤다. 6월 20일 나윤옥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날은 대우조선 사측에서 경찰투입을 요청하며 긴장이 고조되던 날이었다. 김영수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이 출근선전전을 마치고 선각삼거리에 있는 농성장에 합류하려고 서문으로 들어갈 때 직영의 관리직 등이 막고 나섰다.
나윤옥은 사진을 찍으며 조합원 20여 명과 함께 이 저지선을 뚫어보고자 용을 썼다. 그때 누군가가 나윤옥을 잡아 던졌고, 그 바람에 나뒹굴고 말았다. 허리를 다쳤는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직접 전화를 걸어 119를 불렀다. 회사 앞 대우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별일 없으니 집에 가서 몸조리를 잘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윤옥이 떼를 쓰다시피 해 MRI를 찍어보니 허리뼈 일부에서 압박골절이 발견되었다.
그는 40여 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가 퇴원했을 때는 51투쟁이 끝난 상태여서 동지들에게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외려 등을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입원했던 기간은 산재처리가 안 돼 가해 회사로부터 병원비만 받았다. 파업투쟁에 참가한 덕에 생활의 타격이 컸으나 나윤옥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정인숙은 51파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그가 맡았던 거점은 'N안벽' 그곳에는 LNG선, VLCC선 많은 배가 건조되고 있었다. 여기서 작업하는 노동자를 상대로 선전활동을 했다. 생애 첫 파업, 신세계였다. 연대라는 게 뭔지도 몰랐는데 금속노조위원장과 민주노총위원장을 만나고 악수도 했다. 이름도 가지가지인 시민단체의 격려 방문에 가슴이 뛰고 설렜다. 경찰 헬기가 농성장을 맴돌아도 노조 깃발은 내려가지 않았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서로의 손을 놓지않았다. 장승포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을 세우고 새벽 안개속에 골리앗 크레인이 모습을 드러내면 웅크린 몸을 일으켜 팔부터 치켜들었다.
노조의 투쟁기세가 드높고 생산일정에 차질이 생기자 대우조선은 6월 12일부터 정규직 직반장으로 구성된 '현장직반장 책임자연합회'를 동원했다. 2~3백 명씩 몰려와 농성장 천막을 찢고 절단기로 철사와 전선을 잘랐다. 여러 곳으로 나뉜 조합원은 수에서 밀렸다. 몸싸움은 잦아지고 자칫 모든 거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 6월 22일 유최안이 결단을 내렸다. 30만 톤급 유조선 배 밑바닥에 0.3평 쇠창살을 만들어 자기 몸을 가두고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했다. 이에 발맞춰 노조 간부 여섯 명도 탱크의 난간으로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였다.
유최안의 모습은 강렬했다. 거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에서 응원의 열기가 넘쳐나고 희망버스가 달려왔다. 금속노조는 세 차례에 걸쳐 연대집회를 펼쳤다. 하지만 파업의 결과는 고작 임금인상 4.5%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서슬이 퍼렇던 시절, 정부는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엄포를 놨고 극우 언론은 불법파업이니 수출 차질이 막심하다느니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대우조선의 정규직 노동자는 기대와 달리 하청노동자의 손을 잡는 데 인색했다. 아무리 연대 투쟁의 열기가 뜨겁고 응원의 목소리가 커도 사내에서 고립된 소수의 거통고지회가 이 엄청난 압력을 이겨내긴 어려웠다. 결국 '손배소송' 등 적지 않은 불씨를 안은 채 투쟁의 깃발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