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부가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지급했던 국채저금통장. 사할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대부분은 김동선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 일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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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맞이했던 1945년부터 1980년까지 김동선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소련인도 아닌 무국적자로 살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부터 영구귀국한 1994년 4월까지는 어쩔 수 없이 소련 국적으로 살았다.
그 사이에 사할린 강제징용 조선인의 귀향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해방된 조국조차 이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길고긴 '이산(離散)'이었다.
김동선이 고향을 떠나 사할린까지 가는 것은 딱 7일이 걸렸을 뿐이지만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진 50년이 걸렸다. 얼추 날짜로 계산하면 2만일이 걸린 셈이다.
사할린으로 끌려갔던 스무살 청년 김동선이 일흔 노구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소련 여권과 대한민국 여권 그리고 몇 벌의 옷가지, 사할린에서 사용하던 오래된 보온 물병이 전부였다.
부모와 형제들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중국으로 징용갔던 동생은 현재 울산에 생존해 있다)였으며, 평화로운 시골이었던 고향은 공장이 즐비한 공업도시가 되었다. 김동선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와 처지가 비슷한 영주귀국 사할린 1세대와 함께 경북 고령의 대창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할린 1세대 영주귀국자를 위해 세워진 대창양로원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는 모두 40명이며, 이들 중 80세 이상이 19명이다. 1994년 45명이 영주귀국한 이래 지금까지 130여명이 이 곳에 머물렀다.
사할린1세대는 고향에서도 여전히 이산
사할린 한인 동포 영주귀국 사업 어디까지 왔나 |
사할린에서 살고 있는 한인 동포는 강제이주 1세대와 후손을 포함해 약 4만30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대부분은 넉넉치 못한 형편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정부가 한인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벌인 것은 지난 1992년부터. 지금까지 국내에 정착한 사할린 동포 1세대는 약 1600여명에 이르고, 오는 10월에도 600여명의 1세대 동포들이 영주귀국할 예정이다.
이미 영주귀국한 1세대들은 강제 징용 등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배상한 것이 아닌 일본 적십자사의 지원금을 받아 건립된 안산 고향마을과 인천 삼산동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고, 일부는 김동선 할아버지처럼 대창양로원 등 노인요양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영주귀국 사업 초기에는 독신으로 지냈던 1세대만 귀국이 허용돼 러시아에서 가정을 꾸렸던 많은 한인들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2005년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대상자를 광복 이전 출생자와 그 배우자, 2·3세 비속(卑屬)까지 포함하는 사할린 한인지원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러시아와의 외교마찰 등의 이유로 법안 통과가 흐지부지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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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를 이끌고 왔던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이산의 아픔을 삭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육신은 해외동포를 위한 묘역인 천안 망향의 동산에 묻혔으되 넋만은 해방 전 그들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한많은 남화태(남사할린섬) 징용 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
- <사할린 아리랑>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50년이 지난 고향은 생경한 곳으로 변해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알고 맞이해 줄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았다. 사할린에서 "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고 불렀던 아리랑은 결국 고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산(離散)은 한 개인의 선택과는 상관없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저항할 수 없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국땅에서 느껴야 했던 이산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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